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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변호사 노무현>

[변호사 노무현]

[속물 변호사]

[교제]

[변호사는 본래 그렇게 해서 먹고 삽니까 ?]

[부림 사건]

[민중의 삶]

[인권변호사]

[문재인 변호사]

[6월 항쟁]

[변호사 업무정지]

<라봉봉>

 

[변호사 노무현]

겨우 사법고시에 합격해 판사가 되었지만

판사시절에도 노무현은 결국 판사가 적성에 맞지 않다고 생각해

1년도 못하고 7개월만에 그만두었고

1978년 5월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습니다

 

변호사 시절 노무현

 

당시 사법부 역시

경기고-서울대(서울법대) 라는

KS 라인 인맥 , 카르텔이 주류네트워크였고

가난한 고졸출신 사법시험 합격자인 노무현은

그런 주류네트워크에서도 밀려난 인물이기도 했고

 

법조계를 장악한 경기고등학교와 구 명문고 출신들 , 현재는 외고나 과학고가 경기고 노릇을 하는중

 

무엇보다도 어린시절부터 찢어지게 가난해

반항심도 커지고 설움에 눈물도 흘리고 그랬던 한때문에

보수적인 판사생활에서도 적응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하루라도 빨리 큰 돈을 벌고 싶었을 것이기에

노무현은 판사를 그만둔후 곧바로 부산으로 내려가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긁어모읍니다

 

변호사 시절 노무현

 

이전 시대엔 일제강점기였기에

일본인들이 대부분 한국에서 고위직을 하고 있었는데

일제가 패망한후 그들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자

대한민국 건국초는 공직이 많이 텅텅 비어있었고

한국전쟁후 베이비붐으로 아기도 엄청나게 낳았기에

한국엔 고위직들 수가 극소수였기에

대한민국 건국초엔 젊은 청년장군도 나오던 시기였고

성장기인 박정희 정부때에도 사회지도층들도 젊었고

나라 자체가 젊은 시대고 고위직들도 젊고 적은 시대였는데

 

그 고위직중에서도 끝판왕이 법조인이었기에

당시 법조인이 나라안에 매우 적었고

 

사법시험 50년보다 변호사시험(로스쿨) 때 폭발적으로 증가한 변호사들

 

노무현이 변호사 생활을 하던 1970년대 당시는

1년에 사법고시로 고작 100명을 선발했기에 워낙 법조인이 적었는데

100명들 마저도 대부분 커리어를 국가공무원인

판검사로 시작했기에 민간에는 변호사가 거의 없었고

이점을 이용해 노무현은 빨리 돈 왕창 긁어모으려고

판사 그만두고 변호사로 직업을 바꿔서 부산으로 내려갔고

 

노무현이 부산에 변호사생활을 할때

부산에서 영업했던 변호사숫자는 10명도 안되었고

이는 엄청난 독점수준이기에

당시 변호사들은 지역구내의 돈을 다 긁어모을 수 밖에 없었고

당시 변호사들은 승률에 관계없에 다 부자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2020년 법조인 평균재산 27억 , 1년후 현재 33억잼ㅋ , 사법고시 합격후 부자여자한테 장가가기 쌉가능

 

당장 부산에 치킨집이 단 10개만 존재하고

더이상 치킨집이 생겨나는 것을 국가적으로 제한해버린다면

치킨집 사장들은 하루 50마리 팔던거를

500마리 , 1000마리씩 팔 수 있고

떼돈을 긁어모을 수 밖에 없는 구조이고

이게 바로 경제에서는 '독과점' 이라는 것인데

 

하물며 전문기술 , 오랜 지식습득과정이 필요한 법조인은

치킨집에 비해 말할것도 없고

 

독점잼

 

이런것때문에 옛날 2000년대 전까지 ,

지금보다 법조인 , 의사수가 훨씬 적고

아기도 많이 낳았던 시기에는

법조인 , 의사들이 부자인 것을 넘어서

조금만 일하면 건물사고 빌딩 올린다는 전설이 있는 그런 시대였고

 

당장 노무현이 변호사 영업하던 시기

부산에 변호사가 10명도 안됬다는 기록만 봐도

 

(노무현까지 포함해 부산 변호사 수가 총 3명이었다는 말이 있음 ;;)

 

이게 허풍이나 구라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속물 변호사]

가난에 한이 맺혀있었던 노무현은

당시 사건수임이 없다보니

사법서사(법무사)들이 하던 등기 , 저당 등 업무까지 손대서

부산지역 사법서사들의 반발을 샀고

 

변호사가 법무사 상위호환이라

이게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는건데

 

마치 간호사 말고도

의사 역시 환자에게 주사를 놓는게 법적으로 문제없이 가능하기에

의사가 간호사들 월급까지 따먹기 위해

혼자 간호사들도 고용 안하고 직접 주사를 놓는 격이랄까

 

즉 법적으론 문제는 없는데

법무사들은 어마어마하게 공부해야하는

변호사들에 비해 약자일 수 밖에 없기에

부산 일진 변호사인 노무현이 자기들 밥줄까지 뺏어버리자

상도덕 무시하는 노무현이 미울 수 밖에 없었고

 

애초에 게임이 안됬던 노무현식 장사

 

(임요환이 동네 피시왕 대회와서

어린이 잼민이 유저들 다 제압하고 상금 털어가는격)

 

다재다능한 노무현 변호사는

일반적 엘리트 명문고등학교 나온 변호사들과 달리

하필 실업계 상업고등학교 출신이라

세법도 잘 알고 있었고 (ㅋㅋ)

 

싱싱한 노무현이 왔습니다 조세전문~

 

세법은 회계에 대한 지식을 요구하기에

일반 변호사들이 파고들기도 힘든 분야였는데

가뜩이나 변호사도 없던 시절에

노무현이 다 해먹을 수밖에 없었고

변호사 노무현이 주도하던 질서의 부산이었습니다

 

당시 노무현 변호사도 워낙 가난에 한이 맺혀있었고

공부도 시골에서 땅굴파놓고 마누라랑 고생하며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해서

다시 고생한것에 대해 뽕뽑자는 보상심리가 엄청났기에

돈버는데 상도덕 무시 , 수단 방법 가리지 않았던 것이고

 

조세 , 회계 사건과 등기업무등을 통해 돈을 제법 벌었고

돈잘버는 변호사답게

청년회의소나 라이온스클럽등 부자들 집단에 껴서 어울렸고

비싼 술집도 다니며 응딩이도 흔들어재꼈고

일반 서민들은 구경도 하기 힘든

요트도 즐기며 부르주아 생활을 하게 됩니다

 

실제로 경륜이 있었던 노래방 노무현 짤방

 

부자되서 신난 노무현 , 사람사는세상

 

[교제]

근데 노무현 변호사가 활동하던

군사정권 당시는 한국에 민주주의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던 시기라 공무원 , 법조계에 나쁜 관행도 많이 존재하였고

 

코리안 매직박스 사과박스속 뇌물들 , 1996년 61억든 사과박스 압수된 전두환ㅋㅋ

 

당시 변호사들은 '교제' 라는 명분으로

판사와 검사에게 술을 사는 관행이 있었고

법정에서도 검사와 판사에게 무조건 기어야 했다 합니다

 

영화 내부자들 속 접대씬

 

그렇게 뇌물을 접대하고 나면

그 대가로 법원 , 교도관 , 경찰관들은 변호사들에게

구속된 피의자를 알선해주고 뽀찌(돈) 을 챙겨갔고

 

브로커들이 커미션 액수를 가지고 여러 변호사들을 만나 

흥정하기도 했고

기업변호할때도 법무팀 직원에 리베이트(뇌물) 을 주어야 했습니다

 

반항아이자 정의의 기질이 있었던 노무현은

이러한 것이 상당히 불합리하다 느껴졌고

법조인으로서도 자존심도 크게 상했지만

적당히 타협도 했고 그러다 점차 이러한 '교제' 를 그만두게 됩니다

 

다 짜고치는 법무판이었지만

노무현 번호사가 갑자기

'교제' 를 중단해버리자

법정에도 노무현 변호사에게 압박을 했고

점차 노무현 변호사는 법정에서는

피고인을 윽박지르는 검사와 맞고함을 지르며 싸웠고

판사가 소송절차를 어기면 곧바로 반박하고 싸우는등

점차 파이터가 되가고 있었고

부산 법조계에서는 노무현 변호사를 이단아 취급하게 됩니다

 

정치인 시절에도 호통치는 패기의 노무현

 

[변호사는 본래 그렇게 해서 먹고 삽니까 ?]

그럼에도 노무현은 한국에 얼마안되는 초엘리트였기에

아쉬울거나 꿀릴거 없기에 막 지르고 다닌 것이었고

큰 틀에서 보면 적당히 돈밝히고 인생을 즐기는 세속적 인물이었는데

 

한번은 노무현 개업한지 얼마 안됬을때

한 아주머니가 합의만 하면 변론도 필요없는 사건을 가지고

의뢰를 하였고

노무현은 마침 사무실에 돈떨어지고 궁한시기라

합의를 종용하지 않고 60만원을 받고 사건을 맡았고

 

(돈벌레 변호사 노무현의 덫에 걸린 아주머니 불쌍 ㅠ)

 

근데 다음날 아주머니는 합의를 보아서

수임계약을 해지하겠다 했고

근데 노무현 변호사는 변호사 수임약정서를 보여주며

수임료 반환청구를 할 수 없다했고

실랑이 끝에 아주머니가 발길을 돌리며 한마디 했습니다

 

<아주머니>변호사는 본래 그렇게 해서 먹고 삽니까 ?

 

이 말은 화살이 되어 노무현 가슴에 박혀

오랫동안 고통을 주었고

노무현은 그분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었지만

기회를 갖지 못했다고 합니다

 

만화 노공이산 중에서

 

노무현은

힘이 생기면 본인처럼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도와주겠다고

다짐했지만

막상 판사가 되고 변호사가 되어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게 되니

세상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우선 ,

돈걱정을 크게 하지 않아도 되었고

알아보고 먼저 굽실거리는 사람도 많았고

살맛이 났었고

 

노무현은 가끔씩 변호사라는 직업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노무현>가난하고 배운 사람들에게 변호사는 있으나 마나 존재였다.

오히려 해로운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돈이 없으면 변호사를 선임할 없다.

그래서 변호사는 대체로 있는 사람 편이 되어 없는 사람 괴롭히는 일을 한다...

자기 직업에 충실하기만 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 사회에 올바르게 이바지하는

아니겠느냐는 논리를 방패 삼아 ,

오로지 자신을 위한 삶을 즐겼다.

그러니 사회에 관심이 있을 없었다.

 

당시 노무현은 약자를 돕는것보다는

고생한거 뽕뽑는게 우선이었고

일단 고생한 부모형제를 돌보고

노후대책으로 부동산도 좀 사두고 시골에 농장이나 별장도

하나 장만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양심을 앞서있었고

 

한때 하류층이었지만

이미 상류층에 진입해 사람들을

위에서 내려다보기 시작한 노무현은

완전히 올챙이 시절 생각못하는 개구리가 되버린 상황이었고

해마다 입시에 무슨 수석합격자가 언론에 나와서

장차 법관이 되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헌신하겠다는 포부를 말할때마다

혼자 쓴웃음을 짓기도 했습니다

 

 

(노무현 나쁜남자였네 ??)

 

그러다 점차 광폭으로 달려가던

박정희의 유신독재도 막을 내려가고 있었고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독재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 ,

부마항쟁이 일어나버리자

경찰이 시민과 학생들을 폭행하고 때리고 끌고가도

당시 노무현은 아랑곳 없이

그저 그런가보다 했을 뿐이었습니다

 

부마항쟁 당시 부산에서 시위하는 시민들 , 시빅뉴스

 

또 부산에서 활동하던 동료 변호사들이

험한 고초를 겪었다는 소문이 들려도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의외의 기록들 ;;)

 

노무현은 조세전문변호사로 나름 잘나가고 있었고

유능하고 , 사건많고 , 승률높고 , 수입도 많은

다재다능한 성공한 변호사였고

 

부조리한 사회에 분노하고 울분갖던 가난한 청소년 노무현은

어느새 감미로운 와인에 취해서

숫자세기에 열중인 '어른' 이 되어버린 것이었고

 

민주화고 뭐고간에 내 재산이 먼저지~

 

사람이 가진게 많아지면 보수적 , 무심해지는 성향도 강해지기에

자기 자신에게 큰 이익이나 손해가 되지 않는다면

조용히 침묵하기도 하기도 하고

한창 가난한시절 못했던거 하면서 놀기에 바쁘기 때문에

점차 그런 기득권의 마인드에 합류해가는 노무현이었습니다

 

[부림 사건]

시국이나 정국이 어떻게 되던 별 관심없고

그렇게 평범하고 성공한 생활을 즐기던

노무현 변호사는 갑자기 뜻하지 않는 일이 일어납니다

 

박정희가 급사한 후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이전 박정희 정권보다 정통성이나 국민적 인지도가 더 떨어졌기에

집권초에 광폭한 정국을 운영했고

 

5.18 광주학살

 

고문당하는 민주화 운동가들 , 영화 남영동 1985

 

이전 밀실에서 교묘히 장기간의 공포정치하던 박정희와 달리

드러내놓고 광폭적이고 폭압한 정치를 해서

상류층 , 지식인들의 큰 반발을 받아갔고

 

지식인들이나 정치인들은 이전 박정희 정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싸우다 무너져갔지만

평범한 사람이었던 노무현을 비롯한 

대부분 사람들이 박정희 유신시대까지만해도

잘 모르고 정부에 순응하다가

전두환때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광폭한 탄압에 본격적으로 각성하는 경우가 늘어났고

 

노무현 변호사역시

1981년 9월 전두환정권이

 

'부림사건'

 

을 발표하자

사건에 휘말려들어가게 됩니다

 

노무현과 부림사건을 다룬 영화 '변호인'

 

1981년 9월 부산에서 사회과학독서모임을 하던

학생과 교사 , 회사원 등 22명은

당시 이적표현을 학습했다는 이유로

허가없이 체포 , 구속되어

 

대공분실(이적행위 , 국가안보에 위해가 된 행위를 한 사람을 체포하여

조사하고 방첩목적으로

대한민국 경찰청 보안수사대가 설치한 기관)

 

에서 짧게는 20일 , 길게는 63일동안 몽둥이 등에 의한 구타와

물고문 , 통닭구이 고문 등

살인적 고문을 통해 공산주의자로 조작되었고

 

군사정권시절의 아우슈비츠나 서대문형무소 격이었던 '대공분실'

 

통닭구이 고문

 

독서모임이 반국가단체 찬양활동으로 조작되었고

술집에서 만나거나 친구 개업식에 선물들고 찾아간 것도

모두 사회불안을 야기시킬 우려가 있는 집회로 규정되

처벌된 것이었습니다

 

영화 변호인 속 독서모임하는 학생들 , 사회과학이 아무래도 이념과 정치와 사회문제를 다루는 학문이다보니 군사정권시절 감시와 불온서적 명령등이 많았습니다

 

같은해 7월 서울지역 운동권 학생들이

학림다방에서 첫 모임을 가진후 무더기로 구속된

용공조작사건인 학림사건에 이어

부산에서도 이런 독서회 구속사건이 터져버리자

이를

 

'부산의 학림사건'

 

이라는 뜻에서

부림사건이라 이름붙게 되었고

 

당시 학생들 변호에 나서려했던 김광일 변호사는

검사의 협박에 변호를 맡을 수 없었고

김광일 변호사의 요청으로

아무것도 모르던 노무현 변호사가 변호를 맡게 되버렸고

 

어쩌다 사건을 맡게 된 노무현 변호사는 

57일간 경찰에 구금돼 고문을 당한 학생을 접견한 뒤

큰 충격을 받습니다

 

<노무현>얼마나 고문을 당하고 충격을 받았는지

처음엔 변호사인 나조차 믿으려 하질 않았다.

공포에 질린 눈으로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는 모습을 보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얼마나 고문을 받았는지

초췌한 몰골을 한 청년은 노무현 변호사를

정보기관의 끄나풀이 아닌지 의심하는 기색이었고

온몸이 시퍼렇게 멍이들고 발톱이 새까맣게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영화 변호인에서 고문받은 학생을 보고 충격받는 노무현

 

62일동안 불법구금된 한 젊은이도 있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아들 시신이라도 찾겠다고

영도다리 아래부터 동래산성 풀밭까지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헤매고 다녔습니다

 

기득권에 순응 , 타협하며 재미나게 꿀빨던 노무현 변호사는

점차 기득권 권력에 가려진 충격적이고 참혹한 진실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고

 

사실과 법리를 떠나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피가 거꾸로 솟는것 같았습니다

 

변호를 맡게 된 노무현은 법정에서 냉정한 자세를 유지하기 어려웠고

불법구금과 고문으로 당사자와 가족이 겪은 처참한 고통을 거론하며

공안기관의 불법행위를 폭로하고 비판했습니다

 

영화 변호인 명장면

 

방청석은 울음바다가 되었고

검사뿐만 아니라 판사도 표정이 일그러졌습니다

 

다음날 검사는 노무현 변호사를 만나며

노무현 변호사에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지는지 모르냐고 협박하면서

 

<검사>부산에서 변호사 한두명 죽었다고

그게 뭐 대단한 일이 될 줄 아시오 ?

 

하며 겁박하였고

어떠한 겁박에도 굴하지 않던 노무현은

또다시 법정에서 검사와 삿대질을 하며 싸웠고

그 검사는 훗날 보수당의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노무현 변호사가 변호한 청년들은

다들 학교 성적이 우수하고 부모님에게 효성 지극한 청년들이었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재판장은 피고인 전원에게

징역 3년 , 5년 , 7년씩 마구잡이 유죄선고를 내렸고

한명은 무죄선고를 받았지만 항소심에서 유죄를 받았는데

 

한번 무죄판결을 내린 서석구 판사는 그일로 좌천되었다

사표를 내야했기에

 

사법부의 독자적 권력 , 삼권분립이 완전히

독재자 전두환에 의해 무력화되있던 시기였고

판검사들도 전두환 대통령이 까라면 까야하던 시기였고

 

하여튼 ,

이 청년들을 변호하며

노무현은 인생에서 큰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그 청년들은 학교성적도 우수하고

좋은 대학 , 좋은 자리가 보장된 엘리트 청년들이었음에도

부모님의 간절한 소망마저 내팽겨치고

자기 앞날을 망치는 어리석은 일을 하는지

노무현은 처음엔 잘 이해하지 못했고

 

그들과 여러차례 대화를 나누며

노무현은 오히려 그들을 존경하게 됩니다

 

부림사건 인연으로 부림사건 피해자 장상훈씨의 주례를 본 노무현

 

그전까진 자기자신과 가족 , 부모형제를 먼저 챙기며

성실하게 일열심히 하면 사회와 국가에 기여할 수 있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다는 노무현이었지만

 

점차 이웃의 고통과 권력의 부정부패 , 사회적 불의를 

내문제가 아니라 모른체하면

내 삶이 부끄러워질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매슬로우 욕구이론에서 그런거처럼 생리와 안전 욕구를 해결한 뒤 점차 상위욕구개념으로 간 노무현

 

변호사 노무현은 이때부터

무언가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세속적 성공한 변호사에서 인권변호사로 전향했고

대학생과 노동자들이 관련된 사건들에

무료변론을 더 많이 하게 됩니다

 

이전 노무현은 사법고시 합격할때의 기쁨을

자신이 마치 벌레에서 사람이 되었다고 비유했는데

이때를 기점으로 노무현은 또다시

수전노 돈벌레에서 사람이 된 것이었고

 

멀었던 눈이 한번 떠지자

비로소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당하는 핍박과 설움이 뚜렷이 보였고

그들의 아픔이 변호사 노무현에게 그대로 전해졌습니다

인권변호사 노무현이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 노무현 , 티비조선 강적들

 

노무현은 이 부림사건을 계기로 학생들과 교류하게 되고

운동권들에게 당대의 필독서로 여겨진

 

'전환시대의 논리' ,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등 그시절 젊은층 , 운동권에서 널리 읽히던

이념서적들도 탐독하게 되었습니다

 

그시절을 강타한 서적들 , 집에 역사란 무엇인가랑 난쏘공이 있어서 읽어봤는데 역사란 무엇인가는 역사책이라기보다 역사학에 대한 생각이 쓰인 책이라 지루해서 도중에 덮었던거 같고 난쏘공은 슬프고 감동적이었읍니다

 

하루는 노무현은 노동운동에 뛰어든 어느 여학생과

사회주의에 대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는데

그 여학생은 사회주의가 옳다며 노무현을 설득하려 했고

노무현은 사회주의가 잘 안될것이라 얘기했습니다

 

<노무현>한참 (그 여학생과) 논쟁중에

문득 어린시절 내가 반친구의 가방을 찢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남이 좋은걸 가지고 있으면 샘을 내는 마음이 인간의 본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 여학생에겐 어린시절의 그 얘기를 꺼내진 않았지만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사회주의는 인간의 이성에 의해 건설되었는데

인간의 본성에 자리잡은 그런 욕심들이

과연 이성으로 다스려질 수 있을 것인가 하고

 

 

[민중의 삶]

하여튼 노무현은 인권변호사가 되었지만 ,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고

무료변론은 돈좀 덜벌면 그만이지만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는 것은

언제 무슨 죄목을 뒤집어쓰고 쇠고랑을 찰지 모르는 위험한 일이었고

 

노무현 부부는 조그만한 농장과 별장 ,

자식들 외국유학보내서 공부를 다 못한 우리 부부의 한을 풀어보자했던

꿈을 접어야 했고

양심과 욕망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차근차근 주변을 정리했고

 

우선 요정과 룸살롱같은 고급술집에는 발길을 끊었고

열성이었던 요트도 그만두었습니다

 

노무현은

타던 승용차를 두고 버스로 출퇴근 하였고

고급 일식집대신 시장통 국밥을 먹었습니다

 

지금은 정치인들 필수코스가 된 '국밥'

 

돈을 아끼기 위해서였기도 했지만

민주화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민중의 고통에 동참하는 삶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서민으로 돌아간 노무현

 

당시 노무현 변호사의 동료였던

문재인 변호사(지금 대통령) 는

그시절의 노무현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문재인>당시만 해도 가난 끝에 부유한 생활을 살 수 있었던 노무현입니다.

가족들은 돈 잘 버는 변호사 덕에 아파트도 새로 마련하고 ,

노무현 스스로도 아쉬운 것 없이 사는 날이 온 것입니다.

 

그러던 1981년 어느 날 ,

우연히 맡게 된 '부림사건' 을 통해서

억울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부림사건은 '군사정권'이 사건을 조작해서

빨갱이 사건으로 몰았었던 사건입니다.

 

후에 새누리당(현 국민의 힘) 국회의원을 지낸

검사의 지휘 아래에 진행되었으며 ,

대공분실에서 불법감금과 살인에 가까운 고문을 통해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으로 바뀌었습니다

 

당시 민주화 운동계에서

김대중이 뭔가 계속 가시밭길을 걸어가던 예수같은 느낌이었다면

노무현은 뭔가 모세같은 느낌이라 생각되는데

 

모세는 나일강가에 버려졌으나

파라오의 딸에게 구출되어 왕궁에서 양육되었고

이집트 왕궁에서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다가

 

40세때 동포가 몹시 학대받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이집트옷을 벗고

가난한 히브리인 동족의 옷을 입게 되어

이집트 제국으로부터 노예가 된 히브리민족을 해방시키려 싸운 인물이었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변화한 모세

 

요즘식으로 비유하면

부르주아 변호사 출신의 민주화운동가 노무현은

강남좌파 , 패션좌파기도 하지만

 

변호사가 되어 부유한 생활을 즐기다가

일부로 사치품들을 정리하고

예전 자신이 막노동하던시절 원래 그랬던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음식과 의복으로 다시 갈아입고 민중의 고통에 합류했다는 것은

무슨 만화주인공 같다거나 경건한 성직자의 느낌도 났고

 

실제로 노무현도 똘끼도 강했지만

정신은 순진하고 순수한 인물이었고

괜히 민중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대통령까지 되어

오늘날까지 기억되는 인물이 된게 아닙니다

 

당시 어려운 사람들을 돕던 송기인 신부 역시

노무현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송기인 신부>변호사를 즐기는 생활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너무 가난했다가 수입도 좋아지고 하니까

그러다가 이제 더 큰 가치가 무엇이냐에 눈을 뜨게 된 거죠

 

송기인 신부(왼쪽)와 노무현+문재인

 

당시 비장한 뜻을 품었던 노무현은

부인에게도 잘 알리지 않고 일을 시작하였고

당시 부인 권양숙 역시

 

'요즘 건호아빠(노무현 아들이 노건호임)가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는데

막 집에 형사들도 찾아오고 정보계통에서도 찾아오는데

도대체 뭐하는지 모르겠다'

 

하며 걱정했고 노무현이 인권변호사하던 초기엔

권양숙도 잘나가던 남편이 왜저럴까 하며 이해도 안됬고

부부가 부부싸움도 많이했습니다

 

[인권변호사]

인권변호사의 길을 가게 된 노무현은

1982년 5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변호인단에 들어갔는데

 

그전까지 대한민국 청년들은 좌파던 우파던

다들 어린시절에 미국 군인들이 나눠주는

초콜릿과 사탕 소세지 , 햄을 먹고 자랐고

한국전쟁때 피흘리며 도와주고 원조경제도 오랜기간 해주었기에

은혜국가 미국에 대한 고마움도 강해

좌우할거 없이 반미감정이 없다싶이했는데

 

1980년 광주학살을 묵인한 미국정부로 인해

1980년대는 대한민국 청년들의 반미감정이 들끓던 시기였고

반미감정에 전국 각지 미국 문화원에 점거농성 , 불지르기 등이 일어났는데

 

80년대 동네북이었던 미국문화원

 

부산 몇몇 대학생들도 미국의 책임문제를 제기할 목적으로

문화원에 불을 질렀고

여기서 노무현 변호사는 변호사 역할을 하며

다른 지역의 인권변호사도 알게 되었고

일찍 세상을 떠난 대한민국 인권변호사의 거두

조영래 변호사와도 교류하게 됩니다

 

인권변호사 조영래

 

이것이 인연이 되어 

정의실현 법조인회(정법회) 를 만드는 일에 참여했는데

정법회는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 ,

'민변' 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민변 변호사들

 

1983년 전두환은 '대화합조치' 를 발표해

일부 양심수 석방과 제적학생의 복학을 허용했고

부림사건으로 감옥에 갔던 청년들도 출소해 돌아오며

노무현 변호사 주변에 사람이 모이기 시작했고

 

부림사건 피해자 고호석씨는

돈벌레 , 수전노로 유명하던 노무현 변호사가 뜻밖에

변화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회고했습니다

 

<고호석>다른 재소자들한테 듣기로

조세전문 변호사이고 승률이 아주 높아서

갈고리로 돈을 긁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

저희들 사건에 대해서 그렇게 정성을 다해서

정말 밤잠을 안자면서

저희들이 읽었다고 공소장에 나와 있는 책들을 열심히 읽고 ,

저희들하고 많은 대화를 하고 그러면서

아주 진지하게 저희들 사건을 대해주셨고...

과정에서 본인 자신이 조금씩 조금씩 변해가는

저희들이 느낄 있을 만큼...

 

부림사건 피해자들은 뜻밖의 일로 변화하는 노무현을 보았고

노무현 역시 이런 사건들로 인해

돈보다 더 큰 가치를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1984년 청년들이 부산공해문제연구소를 만든다 했을때

노무현 변호사는 자신의 변호사 사무실에 칸막이를 쳐

절반을 내주고 형편되는 대로 돈도 마련해주고

이후 노동상담실도 차렸습니다

 

이렇게 되자

부산시경 대공과 형사들이 사무실 앞에 차를 세워두고

교대로 감시했고

 

노무현은 이시기 여러 청년들을 지켜보며

당시 초등학교를 다니던 아들을 보며

 

'과연 내아들에게 이 청년과 같은 길을 가라 할 수 있을까 ?'

 

하고 생각해보았고

결국 고민끝에 내린 결론은

 

'세상을 바로 잡아야 한다'

 

는 것이었고

그것이 아이들이 장차 받을지 모르는 고통을 예방하는 길이었습니다

 

노무현 일가

 

[문재인 변호사]

노무현 변호사는 문재인 변호사와도 손을 잡았고

문재인 변호사는 유신반대 시위로 구속되어

경찰서 유치장에서 사법고시 합격소식을 들은

원조 운동권 출신 변호사였고

 

문재인 변호사(현재 대통령)

 

(놀다가 뒤늦게 합류한 노무현보다

민주화운동에서는 문재인이 먼저였음)

 

문재인은 사법연수원을 우수한 성적(사법연수원 1등인데 시위전력으로 2등졸업)으로 졸업했음에도

시위전력으로 판사가 되지 못하고 변호사가 된 인물이었고

 

반대로 노무현 변호사는 돈은 잘버나 악랄한 구석이 있었는데

문재인 변호사와 동업을 시작하며 나쁜짓을 모두 다 정리했습니다

 

그시절 문재인과 노무현

 

법무법인 부산에서 한솥밥먹던 시절 문재인과 제주도 놀러간 노무현 (이땐 둘다 핏 맞춰 입었는데 왜 대통령되고 다들 인민복처럼 입고다니지 ?)

 

그러나 그렇게 되자

사무실 경영에 곧바로 타격이 왔고

리베이트(뇌물) 을 주지 않으니 결국 은행과 기업의 고문 일도

거의 다 끊겨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때가 노무현 인생의 가장 뜨거운 시기였고

노무현은 문재인의 영향을 받은 뒤로부터

막 학생운동에 뛰어든 청년처럼 민주화투쟁에 돌입했고

시민단체에 참여하고 재정을 돕고 무료변론을 해주는 것을 넘어

직접 길바닥으로 나섰고

 

 

경찰이 집회를 원천봉쇄하면

몸으로 부딪히며 항의했고 길바닥에 드러눕기도 했고

그런 와중에도 변론할 사건이 엄청나게 밀려왔고

노무현은 어느것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문재인도 역시 이일을 같이했고

노무현 변호사가 돈버는 일을 그만두었음에도

문재인 변호사가 사무실 일을 도맡아하며

매월 생활비를 주었고

문재인은 노무현이 부산에서 선거를 치룰때마다

있는 힘을 다했고

대통령선거때에도 부산본부장을 맡았습니다

 

항상 노무현 뒤를 지켰던 문재인 , 고이즈미 총리시절 뒤에 젊은 아베 사진도 유명하고 대통령들 뒤에 가방들어주는 사람들이 훗날 한자리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그냥 노무현 비서출신이 아니라

전두환-노태우의 관계처럼

실제로 노무현을 만든 1등공신이었고

문재인도 청년시절에 

실제로 스카이캐슬 애들이나 수능만점자 ,

의사 , 판사들

썰고 다닐 수준으로

청년시절 공부머리가

대한민국 전체수석할 수준으로 ㅆㅅㅌㅊ였기에

게임으로 치면 숨겨진 피통이 ㅈㄴ게 큰 인물이고

대통령이나 정치인들의 대외적 이미지랑 현실을 구분해 봐야함)

 

<노무현>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

 

실제로 민주화운동가들이 민주화 이후 정권잡고

부정부패에 연루 , 타락하며 욕을 많이 먹지만

민주화 운동 당시는 군사독재라는 거악에 맞서

한마음 한뜻으로 모두가 순수하고 멋있었던 시기고

 

노무현과 문재인은 인권변호사 시기

시국사건뿐만 아니라 노사분규나 산업재해 관련 소송도 맡아

노동변호사로서 억울한 노동자의 벗이기도 했습니다

 

노무현·문재인 노동법률사무소 전단지

 

문재인 변호사는 이후 대통령이 되어

현재 대한민국 19대 대통령으로 재직중입니다

 

훠훠훠

 

[6월 항쟁]

노무현 변호사는

1986년 9월 사건 수임을 모두 중단하고

오직 민주화운동에 전념했고

1987년 2월 7일 부산에서 열린

서울대생 고 박종철 군 추모대회에서

경찰에 연행되어 문재인 , 김광일 변호사와 함께

범일동 대공분실에 구금됬고

법리를 알았던 변호사들이기에 이들은

형사소송법이 정한 48시간이 다 지나도 풀어주지 않자

격렬하게 항의했고

 

김광일 , 문재인 변호사는 풀려났지만

노무현 변호사는 사흘만에 풀려났습니다

 

이 일로 노무현 변호사는 부산에서

'노변' 으로 통하며

언론에 크게 알려지며 점차 네임드화 되기 시작했고

노무현은 이후에도 부산 6.10 대회를 주도하다

경찰에 끌려가는 등 점차 잡히고 풀려나는데 이골이 생겼습니다

 

1987년 6월 10일 부산충무동 시위선봉에 선 노무현과 이후 구속되어 수의입은 노무현

 

1987년 대한민국 마지막 민주화운동이었던

6월항쟁이 일어났고

6월 18일 부산지역 시위가 절정을 이루었고

성난 부산시민들이 서면로터리 경찰 저지선을 무너뜨리고

범내골까지 진출합니다

 

이날밤 그 규모와 격렬함에 최루탄이 다 떨어져

경찰이 시위를 더 진압할 수 없는 지경이 되자

전두환은 계엄령을 선포했고

그럼에도 부산시민들은 아무도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어머니라는 노래를 부르자

청년들은 같이 부르며 걸어갔고

노무현은 그들이 자랑스러워

왈칵 눈물을 쏟았습니다

 

부산 시민들의 질서있는 격렬한 시위에

전두환 대통령은 항복했고

1987년 전국적으로 일어난 뜨거웠던 6월 항쟁은

시민들의 승리로 끝났고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는 대통령직선제 개헌 수용과

양심수 석방을 담은 6.29 선언을 발표합니다

 

6.29 선언을 발표하는 노태우

 

6.29 선언으로 제5공화국 군사독재 정부는 끝나게 되었고

민주화가 시작됩니다

 

[변호사 업무정지]

정치적 민주화가 되자

노동각계에서도 노동민주화 요구들이 봇물터지듯이 쏟아져 나왔고

1987년 7~8월 사이 전국에 노동자투쟁이 일어났고

 

변호사 노무현에게 노조설립방법을 문의하는 전화가 쇄도했고

노무현 변호사는 수많은 노동현장의 도움의 손길을 거절할 수 없어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노무현은 노동자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숨진 노동자를 변호하다

검찰이 노동자를 선동한다며 구속했고

이에 부산 변호사들이 대거 참여해 힘쓴 덕분에

구속 23일만에 풀려나는데

노무현 변호사는 

 

<노무현>오래 감옥살이를 한 분들이 숱하게 많고

목숨을 잃은 분들도 계신데

23일 구속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며 오히려 미안해 했습니다

 

그러나 1987년 11월

노무현 변호사는 변호사 업무정지 명령을 받았고

이듬해 1988년 2월 22일 벌금 1백만원 선고 ,

노무현 변호사는 불복해 항소하지만 기각당합니다

 

중앙일보 1987년 11월 6일 기사

 

<라봉봉>노무현이 변호사초기 되게 악질에 수전노였는데

사실 웃긴게 보수계는 독재 , 나쁜놈들 이미지이지만 읽어보면

의외로 착하고 정의를 꿈꿨다는 등 이야기가 있다거나

민주계는 정의 , 선한 이미지지만 읽어보면

무서울정도의 이야기 등

의외의 기록이 많고

 

기본적으로 정치인들은 각국에서 가장 지능이 높은 인물들이며

서민 코스프레 , 쇼도 자주하고

여론조작도 있기에 함부로 여론에 휩쓸려서도 안되고

언론이나 인터넷에 나오는 이미지랑 현실을 항상 구분해서 봐야한다 생각됩니다

 

근데 국민들이 ㅂㅅ가 아니고 역사란게 엄연히 있기에

정치인들도 본인들 실제 잘난 이력임에도 국민들이 계속 조롱한다면

자신의 행실을 되짚어 봐야 한다 생각되고

 

하여튼 , 노무현이 초기에

너무 사악하게 굴었던 이유는

너무 없이 자라서 그 보상심리가 너무 강해서이고

 

제가 좋아하는 우리속담이

 

'곳간에서 인심난다'

 

인데

굳이 여유없고 돈없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정의구현이라거나

무슨 민주운동등을 강요해선 안된다 생각하고

저도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 생업에 충실하는게

그게 곧 독립운동이고 민주화운동이라 생각합니다

 

노무현 역시 이런거에 충실해 열심히 자금도 모으고

못다했던 가난의 한을 풀고 있었던 것이고

 

(근데도 그런거랑 별개로 룸살롱 다니던 인물이 대통령 된거도 참 놀랍고)

 

슬슬 노는것도 지루해질때가 반드시 오는데

그 틈에 점차 노무현도 부림사건 등을 겪으며 사회정의에 눈을 뜬 것이고

 

실제로 전쟁이나 산업현장 , 민주화운동가들중

 

'죽는 사람들'

 

은 대부분 저학력 , 가난한 사람들이고

그들을 뒤에서 지휘하는 수뇌부쪽은

진보던 보수던간에 먹물먹거나 재산이 넉넉히 있는 사람들이기에

괜히 그런 사람들에게 민중들이 휩쓸리며 대의라는 명목하에 희생해서는 안된다 생각하고

노무현식 민주운동이 방법론적으로 맞았다 생각합니다

 

법조인들이 보수적 집단이고

군사정권에 순응 , 타협한 인물들이 많았고

노무현 , 문재인같이 민주화운동을 했던 법조인은 소수였기에

그시절 대한민국 민주화에 큰 힘이 된 인물들이었고

 

제가 보니 노무현이 똑똑한데 특히 순진한 성격이었고

초기엔 거의 '일베' 같은 성격이었는데

 

(괜히 일베에서 노무현을 제일 좋아하고 조롱하는게 아님)

 

점차 진보적인 학생들과 문재인을 만나 '민주화' 되었다 생각됩니다

 

(훠훠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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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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