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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역사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 이야기입니다,,

민족주의자이자 일제강점기 우리 역사를 연구하신 역사학자셨던

단재 신채호 선생님은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을 조선역사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 표현하셨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라는 의미인데요,, 신채호 선생님께서는 일제강점기때 일제의 식민사관에

우리나라 역사를 연구하신 사학자 분이시고 민족주의자셔서 이당시

묘청의 북벌,서경(평양)천도파와 김부식(삼국사기 쓰신분 입니다)의 유교적 합리주의,사대주의 사관과

서경천도 반대에 신채호 선생님께서는 자주적,진취적인 묘청을 의의있다고 보신거 같습니다,,

그러면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 이야기를 쓰겠습니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의 배경>

서경은 오늘날 평양입니다 고려시대에 서경이라 불린 이유는 고려 1대왕 태조왕건때부터

고구려를 계승하자는 의미의 나라이름을 고려라 했고

국가적 정책은 북진정책으로 옛 고구려 영토를 찾는것이었습니다,,

이에 평양을 서경 나라의 수도급으로 높여서 북진정책의 기지 역활을 하게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거란,요나라가 고려를 공격해왔을때 고려의 외교관 서희가 소손녕과

담판을 할때에도 서희는 요나라 소손녕에게 우리는 고려를 계승해서 나라 이름도

고려이고 이에 수도도 평양이다(수도격이었던 평양,서경이었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렇게 고려의 평양은 서경이라 불리기도 했고 동경이라는 경주와

3경이라 불릴정도로 중요시 됩니다 (이후 동경,경주는 빠지고,,남경,오늘날 서울이

중요시되는 개경,서울,평양 3경이 됩니다) 고려 3대왕 정종때에도

실제로 수도를 진지하게 평양으로 옮길 계획도 있었는데요

이를 천도라고 합니다 도읍을 옮긴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고려 초기에도 평양,서경으로 도읍을 옮기려는 시도가 있었고요

이후 묘청이라는 서경,평양출신 스님은 고려 17대왕 인종을 부추겨서

수도를 옮기자고 합니다 고려 초부터 이런 이야기가 있었던 이유는요,,

먼저 고려의 정책중 하나인 북방정책은 고구려를 계승하고 옛 고토,만주나

고구려 영토를 되찾자는 그런 정책이 있어왔습니다

평양은 고구려의 수도였고 이에 고려에서도 중요시됬습니다

또 하나는 삼국시대 고구려 왕조에서는요 귀족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고

수도를 옮기는 방식을 했습니다,,이는 백제도 마찬가지이고요,,

귀족들은 보통 수도에 자리를 잡고 권세를 이어가려했고 수도를 옮겨버리면

그런 기반에 영향을 주고 왕권강화가 목적이었다고 합니다,,

또 고려 조정은 서경천도 운동이 일어나는 이당시 동아시아 세계는

북방에서는 여진족이 금나라라는 나라를 세우고 거란족의 요나라를

몰아내고 송나라도 강남으로 몰아내던 시기입니다,,

이에 여진족에 맞서서 북방 정책의 기지라 할수있는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고 금나라에 자주적으로 맞서자 이런 의미라 보시면 될거 같습니다,,

실제로 고려조정은 당시에 금나라에 사대를 하자는 입장과

맞서 싸우고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자는,, 입장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보통 묘청이나 시인이자 문인이었던 정지상같은 서경 출신 사람들은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고 맞서야 된다고 주장했고

이자겸이라는 사람은 금에 사대를 하자했으나 이후 이자겸의 난으로 몰락하게되고,,

이자겸의 난 이후 정치적으로 급부상한 삼국사기를 쓰신 김부식같은 관료들은

이를 반대합니다 이렇게 고려 조정은 수도를 옮기자는 서경파와

반대하는 개경파로 나뉘어있었습니다

그럴때 묘청은 수도를 옮기자며 당시 왕이었던 인종을 설득하려다 왕을 속이려는??,,

기괴한 방식까지 사용하게 되고 그러다 서경,평양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를 묘청의 난,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이 되게 되는것입니다,,


일제강점기 우리 역사를 연구하신 단재 신채호 선생님은 이를

단순히 정부에서 반란을 막은게 아니라 이를 불교,낭가(민족 고유 사상)와(묘청)

유교(김부식)의 싸움이며,, 국풍파와 대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과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전자의 대표,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로

묘청이 패해서 이후 고려가 사대,보수,속박적 사상인 유교에 완전 정복되고 말았다고 하십니다,,

만약에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이 이겼다면 조선사가 독립,진취적으로 갔을것이니

어찌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이라 하지 아니하라,, 그대로 옮기지는 않았으나 이런식으로

말하십니다,, 실제로 신채호 선생님은 일제강점기때 무장독립 투쟁을 비판적으로 봤으나

긍정적으로 보셨다고도 한거 같은데요,,

실제로 사회주의나 아나키즘(무정부주의,탈권위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으신분 같습니다,,

당시에 한국 사회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독립운동을 하자는 의견은 당연히

모두 맞았으나 그 과정,방식에서는 자유주의적 방식이나 그당시 소련에

영향을 받은 사회주의적 독립운동 방식이 있었습니다 이에

신채호 선생님은 김부식을 비판적으로 보신거 같으나 개인적으로

한국 고대사를 쓰면서 김부식이라는 분도 그래도 성실하게 우리 옛날 고대역사를

기록하는 과정을 해내신분이고 사대주의자라기보다는 '보수'적인 사람이었던거 같습니다,,

물론 김부식이라는 분의 인생도 서경천도 운동때 친구라 할수있는??,, 정지상을 죽이고

비판받으셨으나 삼국사기를 읽어보면 기존 왕들 이야기를 할때 개인적인

사론에서도 유교적 사관으로 사람 걱정도 하시고 그런거도 있으셨던거 같습니다

또 사실상 고대 한국사라는게 김부식 삼국사기 독점이라 할수있을정도로

다른 기록은 삼국유사 이외에 크게 찾기가 어렵습니다,,

분명 한국 역사에서 큰인물이라고는 하실수 있으나 진보적 사관에서는

여러 아쉬운 면이 있으실거 같습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님 사진입니다

단재의 뜻은 일편단심할때의 단자로 정몽주의 일편단심가를 인상적으로

보시고 단생,단재라 짧게 줄여 하다 단재(정성스러울 단,정진할 재 자입니다)가 됬다고 합니다

독립운동가이시고 민족주의적 사관으로 역사를 연구하신 분 입니다>


그렇게 고려 조정에서는 개경파와 서경파로 나뉘어져있었고

서경파에 맞서려 개경 관료들은 김부식을 밀어주게 된거 같습니다

이는 고려 초기 문벌 귀족 사회적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거 같습니다,,

이후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은 무인 정중부 수염을 불로 태우며 농락하다가,,

무신정권이 들어서고요,,

사실 서경파 내에서도 긴가민가 하다가 묘청이라는 사람이

폭주하듯이,,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개경내에 있던 서경파 관료들도

묘청과 거리를 두려는 행보를 보인거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2에서 써야될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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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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