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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백제군을 막은 김유신>


김유신 장군은 압량주 押梁州 (오늘날 경상북도 경산시)

군주 軍主 (지방 장관) 로 있다가

선덕여왕 13년에 소판(=잡찬 , 신라 3등벼슬) 이 되었습니다


9월 가을

선덕여왕은 그를 상장군 上將軍 으로 임명하고

군사를 주어서

백제의 가혜성 , 성열성 , 동화성 등의 일곱 성을 공격하게 했습니다

김유신은 크게 승리했습니다


<선덕여왕>김장군만 있으면 아주 든든하오 ~ ♪


<김유신>충성을 다하겠습니다 !!


이 승리로 인하여

가혜 加兮 (오늘날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  ) 에

나루 (津 , 나루터 , 배가 다니는 일정한 곳) 를 개설했습니다


(전투에서 승리한) 김유신은 을사 정월(1월) 에

(신라 수도 서라벌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아직) 미처 선덕여왕을 만나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백제의 대군이 와서

우리(신라)의 매리포성 買利浦城 (오늘날 경상남도 거창군) 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봉인 封人 (변경을 지키는 벼슬아치) 이 급히 알려왔습니다


<봉인(변경을 지키는 벼슬아치)>폐하 큰일났사옵니다

또다시 백제가 !!!


선덕여왕은 다시 김유신에게

상주장군 上州將軍 (상주는 경상북도 서북부)을 제수하고

이를 방어하게 했습니다


<선덕여왕>김유신은 짐을 알현하기보다 먼저

말발굽을 돌려 백제를 쳐라 !!!


김유신은 왕명을 받자

처자(부인과 자식)도 만나지 않고

즉시 말을 몰아 백제군을 역습하여 패주시키고

2천 명의 머리를 베었습니다


김유신이 3월에 돌아와

왕궁에 복명 復命 (명령을 받고 일을 처리한 사람이

그 결과를 보고함) 하고

아직 집으로 돌아가기도 전이었습니다


<다시 선덕여왕을 알현한 김유신>충성을 다하겠습니다 !


<선덕여왕>수고했네 김장군 !


(그런데 또다시) 백제병이 다시 출동해서 국경에 주둔하며

장차 군사를 크게 동원하여 신라를 침략하려 한다는

급보가 왔습니다

선덕여왕은 다시 김유신에게 말했습니다


<선덕여왕>(김유신)공은 수고를 마다하지 말고

빨리 가서 적들이 도착하기 전에 대비하기 바란다


김유신은 또 다시 집에 들르지도 않고

군사를 훈련하고 병기를 수선해서 서쪽으로 떠났습니다


그 때 김유신의 가족들은 모두 문 밖에서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출정한) 김유신은 (병사들과 행군할때 자신의 집)문을 지나면서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집을 지나친 김유신 장군은)

집에서 50보 가량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

김유신 장군은 말을 멈추고 자기 집의 물을 떠오게 했습니다


그(김유신)는 그 물을 마시면서 말했습니다


<김유신>우리 집의 물맛이 아직도 옛 맛 그대로구나


그 때 신라 군사들이 모두


<신라 군사들>대장군(김유신)도 이러한데

우리가 어찌 가족과 헤어지는 것을 유감(섭섭)스럽게 여길 것인가


라고 했습니다


(신라군이) 국경에 이르르자

백제인들이 우리(신라) 군사의 진영을 보고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물러갔습니다


선덕여왕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그에게 상과 벼슬을 주었습니다


<비담의 난을 진압한 김유신>


선덕여왕 16년

정미는 선덕여왕 말년(마지막 년)이며

진덕여왕 원년(1년)이었습니다


(선덕왕 말년에) 대신 비담과 염종 등은

선덕여왕이 정치를 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군사를 동원해서 폐위시키려 했습니다


(비담의 난)


선덕여왕은 궁안에서 이들을 방어했습니다

비담 등은 명활성에 주둔하고

선덕여왕의 군사는 월성에 진을 친 채

10일 동안 공방전이 계속되었으나 싸움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옛날 삼국시대 고구려 , 백제 , 신라는 모두

평시수도와 전시수도가 있었는데

신라는 평시에는 월성에 왕이 머물렀고

전시에는 산성이었던 명활성에 가서 전시체제를 운영했는데

비담은 신라 귀족 수장직인 상대등이라는 신라 최고위 관직이었으면서

전시 수도에서 난을 일으켰으니 그 규모가 상당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김춘추, 김유신 파의 성장에 위기를 느낀

구 귀족세력으로서 비담이 일어난 것으로도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한밤중에 큰 별이 월성(선덕여왕 진영)에 떨어졌습니다


비담 등은 사졸(병사)들에게


<비담>별이 떨어진 자리에는

반드시 피가 흐른다는 말이 있으니

이는 여왕이 패전할 징조이리라.

으하하하하하


라고 말했습니다


이를 들은 (비담군)병졸들의 함성이 천지를 흔들었습니다


대왕(선덕여왕)은 이 말을 듣고 몹시 두려워 했습니다


김유신이 선덕여왕을 뵙고 말했습니다


<김유신>길흉(운이 좋고 나쁨)에는 일정한 법칙이 없으니

오직 사람이 하기에 달렸습니다


그러므로 붉은 새가 모여 들어 주가 멸망하였고

기린을 잡았기 때문에 노나라가 쇠퇴했으며

꿩의 울음으로 인하여 고종이 흥기했고

용의 싸움으로 인하여 정공이 창성해졌습니다


이로써 덕은 요사한 것을 이긴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별의 변괴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왕께서는 근심하지 마소서

(요약해보면,, 미신이니까 겁먹지 마시옵소서 폐하 !)


김유신은 말을 마치고 허수아비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불을 붙여서

연에 실어서 띄워 보냈습니다

이는 마치 별이 하늘로 올라 가는 것 같았습니다

다음날 그(김유신)는


'어제 밤에 별이 떨어졌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 갔다'


라는 소문을 내게 해서

적(비담군)들로 하여금 이것이 사실이라고 믿게 했습니다


김유신은 또한 백마(하얀 말) 를 잡아서

별이 떨어진 자리에 제사를 지내면서

다음과 같이 기원했습니다


<김유신>천도(하늘의 도)에는 양이 강하고 음이 부드러우며

인도(사람의 도)에는 임금이 높고 신하가 낮습니다

만일 이 순서를 바꾸면 큰 변란이 일어납니다


지금 비담의 도당(불순한 사람의 무리)이

신하로서 임금을 모해하며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범하니


이는 이른바

난신적자 亂臣賊子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와

어버이를 해치는 자식) 로서

사람과 신령(신)이 함께 미워할 일이요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못할 일입니다


지금 하늘이 이에 무심하여

도리어 별의 변괴를 왕성(왕의 성, 여기서는 월성)에 보인 것이라면

이는 신 臣 (신하 신) 이 믿을 수 없는 일이니

사실을 알 수 없습니다


하늘의 위엄으로서 인간이 소망하는대로

선을 선으로 여기고 악을 악으로 여기게 하여

신령을 탓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그리고 나서 그는 장졸들을 독려해서

분연(떨쳐 일어서는 기운이 세차고 꿋꿋한 모양) 돌격했습니다

비담 등은 패해서 도망했습니다

김유신은 그들을 추격하여 목을 베고

구족 九族 (9대에 걸친 친족)을 멸했습니다


<라봉봉>이전에도 선덕여왕 기록을 쓸 당시에

쓴 이야기들인데 열전편에서 기록은

이번에는 선덕여왕이 아닌

김유신 장군쪽의 시각으로 보는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향수 鄕愁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나 시름)

는 군대에서 항상 있어왔던 것으로

전쟁에서는 일부로 적병의 향수를 자극하기도 해서

사기를 떨어트리기도 했고

지휘관들도 이런 것들에 대한 여러 노력들을 하기도 하며

상당히 예민한 문제였다 할 수 있지만

나라와 백성을 지키기 위해 불철주야(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고를 마다 않았던

김유신 장군과 신라군이었다 할 수 있고


군대던 사회던 집단,사회,조직에서는 지휘관, 리더의

모범이 상당히 중요한 것인데

김유신 장군 스스로도 본인 뿐만아니라

신라군 전체가 집에도 못가고 계속해서 연이은

출정이 있었긱에

자신의 집을 지나가면서도 군 기강을 위해

자신만 생각하지 않으려 그냥 지나치게 된 거 같고

신라 김유신 장군의 조선 이순신 장군과 비슷한

선공후사 先公後私 (사 私 [사사로운 일] 보다

공公 [단체, 공공의 일] 을 앞세움) 정신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전쟁이 참으로 무섭고

또 아쉽기도 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장군으로서 유명한 인물들에 대한

승리의 기록들을 이야기하는거 같으나

그들도 사람이었고 내면에는 항상 두려움과

고통이 있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군사학에서도 전쟁은 최후의 수단이라 했고

아무리 김유신 장군이라는 든든한 소방수같은 충신이자 명장을

신하로 두고있던 선덕여왕이었어도

선덕여왕도 본인 스스로 위기를 자초했다는

비판등은 피할 수가 없는 인물이고

삼국사기 본기인 선덕여왕기록에서 보는 왕의 시각으로 보는

충신이자 장군 김유신과

삼국사기 열전인 개인, 일반인의 시각으로 보는

장군이자 인간 김유신은

또다른 느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평화기의 명장과

전쟁기,혼란의 명장이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김유신이라는 전설적인 이름 뒤의

인간 김유신은 전쟁,혼란기의 명장이었습니다


그렇게 김유신 장군은 김춘추공과 함께 선덕여왕을 섬기며

당대 선덕여왕이 위기때마다 출동하며

차근차근 입지를 넓혀갔다 할 수 있고

선덕여왕 역시 김춘추, 김유신이 성장하는데 큰 도움을 줘서

수많은 논란에도 나름 좋은 평을 받기도 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당시에는 신라 국력이 강했을 때긴 해서

위기상황에도 그와 신라 병사들은 용맹하게

나설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담의 난은

상대등(신라 귀족 수장직) 비담으로 대표되는

'구 귀족세력' 과

김춘추와 김유신 장군으로 대표되는

'신 귀족세력' 의 알력다툼이 있었다고도 할 수 있고

또 한국사 최초의 여성왕이었던 그리고

최초의 여성왕이라는 수식어 뒤에도 딱히 정치를 잘했다는

평을 받지는 못하는 선덕여왕에 대한 반발심 등에

비담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할 수 있고


비담의 난 결과는 김유신의 비담의 난 진압 도중에

선덕여왕이 김유신의 비담군 진압 9일을 남겨두고

충격이나 병으로 인해 선덕여왕이 사망해버렸고

결국 선덕여왕은 난 종결을 보지 못하고

그 다음왕대인 진덕여왕대에 비담의 난이 진압됬다고 할 수 있고

비담의 난 진압 이후

신라 정계는 김춘추, 김유신 세력으로 물갈이가 됬다고 할 수 있고

선덕여왕의 '충실한 장수'에서

'실권자' 김유신으로 변했던 계기가 된 사건이

바로 '비담의 난'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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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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