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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덕여왕대 김유신 장군의 활약 , 김춘추를 왕위에 옹립한 김유신>


진덕여왕 원년(1년)

10월 겨울

백제 군사가 침입해서 무산 , 감물 , 동잠 등의 세 성을 포위했습니다

진덕여왕은 김유신에게 보병과 기병 1만을 주어 이를 방어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김유신은

고전 (전쟁이나 운동 경기 따위에서 몹시 힘들고 어렵게 싸우다) 을 면치 못하였고

마침내 기력이 없어지자 비녕자(사람 이름)에게 말했습니다


<김유신>오늘의 사태가 위급하다

그대가 아니면 누가 군사들의 마음을 격려할 수 있으랴 !


비녕자가 절을 하고 말했습니다


<비녕자>어찌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


비녕자는 드디어 적진(백제군 진영)으로 달려갔습니다

그의 아들 거진과

종(노비) 합절이 그를 따라 적의 칼과 창 속으로 돌진하여

전력을 다해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이후 비녕자 이야기에서 더 자세히 쓰겠고

신라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자살돌격, 일가족 몰살입니다,,)


(신라)군사들이 이를 보고 감격하여

서로 앞을 다투어 진격하여 적병을 대파(크게 부수다)하고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습니다


진덕여왕 대화 원년 무신에

김춘추는 고구려에 원조를 요청하였다가 실패했습니다

이에 따라 마침내 당에 가서 군사를 요청했습니다 (나당동맹)


당태종 황제 (고구려를 공격한 당태종 이세민으로 유명한 인물) 가


<당태종 이세민>나는 너희 나라의 김유신에 대한 명성을 들었다

그의 위인 爲人 (인물됨) 이 어떠한가 ?


라고 물었습니다


김춘추가 대답하기를


<김춘추>김유신이 비록 재능과 지혜가 조금 있다고 하나

황제의 위력을 빌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쉽사리 주변국의 우환을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 ?


라고 했습니다

황제는


<당태종 이세민>(겸손하구나) 참으로 군자의 나라로다


하며 조서를 내려 김춘추의 요청을 허락하고

장군 소정방에게 군사 20만을 주어 백제를 치도록 했습니다


이 때 김유신은

압량주 押梁州 (오늘날 경상북도 경산시)

군주 軍主 (신라 각 주의 으뜸 벼슬 , 주 장관)로 있었습니다


그(김유신)는 군무(군사에 관한 일) 에는

아무런 뜻도 없는 것처럼 술을 마시고

풍악을 울리며 수개월을 지냈습니다


<술에 취한 김유신>풍악을 울리라 이기야 ~

세월아 네월아 ~


(압량주)고을 사람들은 김유신을

용렬한(사람이 변변하지 못하고 졸렬하다) 장수라고 여기면서


<압량주 백성들>백성들이 편하게 생활한 지가 오래 되었으므로

힘의 여유가 있어 한바탕 싸울 만한데

장군이 저렇게 나태하니 이 일을 어찌할까 ?


라고 비방했습니다


(민심을 살피기 위해 사실 연기를 하고 있었던) 김유신은

이 말을 듣고 백성들의 자질이 훌륭함을 알았습니다


그는 대왕(진덕여왕)에게 말했습니다


<김유신>민심을 살펴보니 이제 일을 할 만 합니다

청컨대 백제를 쳐서 대량주 싸움(=대야성 전투 , 김춘추의 딸

김고타소가 사망해서 삼국통일의 도화선이 된 전투) 의 원수를 갚으십시오.


진덕여왕이 말했습니다


<진덕여왕>작은 힘(신라)으로 큰 세력(백제)을 건드리면

그 위태로움을 어찌 할 것인가 ?


(당대 신라는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삼국중에서도 역량이 가장 강했다고 할 수 있기에

의문스러울 수도 있는 기록이라 할 수 있지만

백제는 당대 한강유역이 뺏기고 충청, 전라도 지방에 있었다 하더라도

오늘날 일본인 왜 지역에도 세를 펼치고 있었고

충청, 전라도는 비옥한 곡창지대라 백제의 인구는

땅이 좁았음에도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에서 가장 많았고

거기다 해상영역, 왜지역까지 합치면 인구가 매우매우 많았다고 할 수 있고

인구수는 보통 백제>고구려>신라 순이라고 하고

[그 넓은 고구려도 산악지대가 많아서

좁았어도 풍요로운 평야, 곡창지대였던 백제에 인구가 밀린다는 사실,,]


신라인들이 5만 군사를 온 전국 마을 주민들을 쥐어짜서 만들어낼때

백제는 대충 4만명을 여유병력에서만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고

대신 백제는 신라와 달리 귀족들이 서로 따로 놀고 왕권도 약해서

결집이 잘안됬고

당대 신라는 똘똘 뭉쳐서 결집이 매우 잘됬다 할 수 있습니다


이에 진덕여왕이 백제를 공격한다는 김유신 장군의 말에

두려움을 느꼈다 할 수 있고

당대 신라에서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유신이 대답했습니다


<김유신>전쟁의 승부는 세력의 대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민심에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紂 에게는 억조의 백성이 있었으나

인심이 떠나고 덕이 떠나버려

주 周 의 열 명의 신하가 한 마음 한 뜻을 가진 것만 못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한 뜻이 되어 생사를 같이할 수 있으니

저 백제쯤은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진덕여왕>음,, 김장군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분명 그럴 이유가 있을 것이오

그렇다면 그리 하도록 하시오 >_< !!


진덕여왕이 이에 허락했습니다


(사실 허락이라기 보다

선덕여왕 말기 일어났던 비담의 난 진압 이후부터

사실상 조정은 김춘추, 김유신 세력에 좌우되고 있었고

진덕여왕은 김춘추의 왕위 계승을 위해

김춘추 , 김유신 세력에 추대된 임시적, 과도기적 왕이었다고도

할 수 있어서 진덕여왕 스스로도 자신의 처지를 알고

철저하게 김춘추 , 김유신 세력의 의도대로

움직인 여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유신은 드디어 각 주의 병사를 선발 훈련하여 적진(백제군 진영)으로 갔습니다


대량성 大梁城 (=대야성 , 오늘날 경상남도 합천군) 밖에 이르니

백제가 역습으로 대항했습니다


그(김유신)는 일부러 이기지 못하는 척하고

일부러 패주하여 옥문곡 玉門谷 (오늘날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구원리라고

여겨집니다) 에 이르렀습니다


백제는 그(김유신)를 얕잡아 보고 군사를 크게 동원하여 왔습니다

그 때 복병(숨은 병사)이 일어나 백제군의 앞뒤를 공격하여 대파하고


(참고로 옥문곡의 옥문은 여성의 생식기를 의미하는데

내부적으로 발달한 여성의 생식기같이 생긴 골짜기 같고

이에 매복하기 쉬운지형이었을 거 같습니다)


백제 장수 8명을 사로잡았으며

1천 명의 목을 베었습니다


김유신은 사람을 시켜 백제의 장군에게 말했습니다


<김유신>우리 군주(주 장관) 품석(백제군에게 죽은 대야성 성주 김품석)과

그 아내 김씨(김품석의 아내이자 김춘추의 딸 김고타소) 의 뼈가

너희 나라 옥중 獄中 (감옥 안) 에 묻혀 있다


이제 너희들의 비장(참모, 부하장수) 8명이

우리(신라)에게 잡혀서

꿇어 엎드려 살려주기를 간청하고 있다


나는 여우와 표범이 죽을 때

머리를 제 고향으로 두는 뜻을 생각하여

그들을 차마 죽이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너희는

죽은 두 사람(김품석, 김고타소 부부) 의 유골을

여덟 명의 산 사람과 바꾸는 것이 어떠한가 ?


백제의 중상 仲常 (사람 이름)


<김부식>충상 忠常 이라고도 한다


좌평(백제 1등벼슬 , 여기서는 '좌평 충상이' )이

(백제)왕에게


<중상>신라인의 해골(죽은 사람의 뼈)을 남겨 두어 유익할 것이 없으니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일 신라인이 신의를 버리고 우리 여덟 사람을 돌려 보내지 않는다면

저들이 잘못한 것이요

우리가 옳은 것이니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 ?


라고 말하고

곧 품석 부처(부부)의 유골을 파서

관에 넣어 보냈습니다


김유신은


<김유신>잎사귀 하나가 떨어진다고 하여

무성한 숲이 상하지 않으며

티끌 하나가 더 쌓인다고 하여

큰 산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하고

(백제 장수) 여덟 사람의 귀환을 허락했습니다


(이렇게 품석부부 유골과 백제 여덟 장수를

교환해도 별 일은 아닌 거라는 의미 같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승세를 타고

백제 경내(경계 안) 에 들어가

악성 嶽城 등 12성을 함락시키고

2만여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9천 명을 사로잡았습니다


진덕여왕은 공을 논해서

김유신에게 이찬(신라 2등벼슬)의 작위를 주고

상주 上州 (오늘날 경상북도 서북부) 행군 대총관 (상주행군대총관, 상주 지방

군단 軍團 의 최고 책임자)으로 삼았습니다


김유신은 다시 적(백제)의 경내(경계 안)에 들어가서

진례 進禮 (오늘날 충청남도 금산군) 등의 아홉 성을 공격하여

9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6백 명을 사로 잡았습니다


김춘추가 당으로 들어가 병력 20만을 얻기로 하고

돌아와 김유신을 만나 말했습니다


<김춘추>죽고 사는 것이 천명(하늘의 뜻)이 달려서인지

내가 살아와 다시 공과 만나게 되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


김유신이 대답하기를


<김유신>제가 나라의 힘에 의지하고

영령 (영혼) 의 위세를 빌어

다시 백제와 크게 싸워서 20개의 성을 빼앗고

3만여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또한 품석공과 부인(김춘추의 딸 김고타소)의 유골을

향리 鄕里 (고향) 로 돌아올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천행 天幸 (하늘이 준 많은 행운) 으로 이루어진 것이지

내가 무슨 힘이 있었겠습니까 ?


라고 했습니다


- 여기까지가 삼국사기 김유신 상 上 편의 끝입니다 -


진덕여왕 2년 (김유신 열전이 아닌 진덕여왕 본기 기록에서는

진덕여왕 3년이라고 나옵니다)

8월 가을

백제 장군 은상이 쳐들어와서

석토 石吐 (충청북도 단양군 혹은 진천군 ??) 등의 일곱 성을 공격했습니다


진덕여왕은 김유신과

죽지 , 진춘 , 천존 등의 장군들에게 명령하여

이를 방어하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삼군 三軍 (전체 군대)을

오도 五道 (다섯 갈래 길)로 나누어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신라와 백제군은) 승패를 서로 주고받아

10일이 지나도록 전투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쓰러진 시체는 들에 가득 하고

방패가 (피에) 뜰 정도로 피가 흐르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그들은 도살성 아래 주둔하면서

말을 쉬게 하고 군사들을 배불리 먹여서 다시 공격하기로 했습니다


이 때 물새 水鳥 (물 수 , 새 조) 한 마리가 동쪽으로 날아가다가

김유신의 군막(군대에서 쓰는 장막, 텐트) 을 지나치자

장병들은 이를 보고 흉조(불길한 징조)라고 여겼습니다


김유신이 말하기를


<김유신>이것을 괴이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왠만해서는 불길한 징조등에 멘탈[정신]이 털리지 않는

김유신 장군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능이 높을 수록 비논리, 비과학에

덜 빠진다고 할 수 있겠고

이는 곧 지능이 높음을 의미합니다)


라 하고 여러 사람들에게


<김유신>오늘 반드시 정탐(=탐정 , 드러나지 않은 사정을 몰래 살펴 알아냄)

을 하려는 백제의 첩자가 올 것이다

너희들은 모르는 체하며 누구냐고 묻지도 말라 !


(일단 백제의 첩자가 마음껏 우리[신라] 진영을 보고 갈 수 있게

냅둬라)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김유신)는 큰소리로 각 진영에 명령을 내렸습니다


<김유신>성벽을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말라

내일 원군이 도착한 다음 결전을 하리라 !!!!!


(백제)첩자는 이 말을 듣고 돌아가

(백제 장군) 은상에게 보고했습니다


은상 등은 신라의 병력이 증가된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백제군의 사기를 떨어트리려 했던 김유신 장군의 계책으로

일부로 거짓정보를 흘린 김유신 장군입니다)


이 때 김유신 등이 일시에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들은 장군 달솔(백제 2등벼슬) 정중과

군사 1백 명을 사로잡았으며


좌평(백제 1등벼슬) 은상과

달솔(백제 2등벼슬) 자견 등 10명과

(백제)군사 8천9백8십 명의 목을 베었고

말 1만 필과 갑옷 1천8백 벌을 노획(싸워서 적의 물품을 빼앗음) 했습니다

이 이외에 노획한 각종 기구(도구 혹은 무기) 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그들(신라군)이 돌아올 때

길에서 백제의 좌평 정복이

군사 1천 명을 데리고 항복해 왔습니다

김유신은 이들을 모두 풀어 주어 마음대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맞서는 자에게는 냉혹한 , 항복한 자에게는 관대한 모습을 보이며

삼국의 질서를 잡아가려 했던 김유신 장군 같습니다)


(그렇게 승리한 김유신 장군과 신라군이) 경성 京城 (=서울=수도 , 서라벌) 에 이르니

대왕(진덕여왕)이 문까지 나와서 그들을 맞이하여 위로하고 후대(후하게 대접) 했습니다.


영휘 5년에

진덕대왕이 사망하였으나 후사가 없었습니다


김유신은 재상인 이찬(신라 2등벼슬) 알천과 상의하여

이찬 김춘추를 즉위하게 했습니다

이(김춘추)가 곧 태종대왕(신라 29대왕 태종 무열왕 김춘추)입니다


<김유신>춘추공 !

신 臣 김유신 이제부터는 폐하라 부르겠습니다 !


<태종 무열왕 김춘추>드디어 때가 왔소 !


<라봉봉>장대하고 장엄한 김유신 장군의 일대기입니다

이야기 틈틈히 설명을 썼고


그렇게 백제인들에게 딸 김고타소가 죽어

백제에 복수할 마음을 품고 있었던 김춘추가 왕위에 앉게 되었고


어린 시절부터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을

병합(하나로 만듬)할 뜻을 품고 있었던 김유신 역시

어린 시절부터, 평생의 친구인 김춘추가 신라 29대 왕으로 즉위하자


드디어 두 신라의 거인들의 삼한일통(삼국통일) 계획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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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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