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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를 놀라게 했던 김유신>


용삭(당고종 3번째 연호) 원년(1년)

태종 무열왕은

백제의 잔적(패망한 뒤 죽거나 잡히지 않고 남아 있는 적병) 이

아직 남아있으니 그대로 둘 수 없다고 하여

이찬(신라 2등벼슬) 품일 ,

소판(=잡찬 , 신라 3등벼슬) 문왕 ,

대아찬(신라 5등벼슬) 양도

등을 장군으로 삼아 백제로 가서 그들을 치게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따라 이찬 흠순


<김부식>흠춘으로도 쓴다


 , 진흠 , 천존과

소판(=잡찬 , 신라 3등벼슬) 죽지 등을 보내서

우리(신라) 군사를 구원하게 했습니다


고구려와 말갈은

신라의 정예병이 모두 백제에 출병하여

(신라)국내가 비었으므로 신라를 공략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들은 군사를 출동시켜 수로와 육로로 동시에 진격하여

북한산성(오늘날 한강유역)을 포위했습니다


고구려는 성의 서쪽에 진을 치고

말갈은 성의 동쪽에 주둔하여

10일 동안 공격을 계속하자

성 안은 공포와 두려움에 싸였습니다


그 때 갑자기 큰 별이 적의 진지에 떨어지고

또한 뇌우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비) 와 함께 벼락이 쳤습니다

그러자 적들은 당혹하고 놀라며

포위를 풀고 도주했습니다


처음에 김유신은 적이 성을 포위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말했습니다


<김유신>사람의 힘은 이미 다하였으나

하늘의 도움은 얻을 수 있다


그는 사찰(절)로 가서 제단을 쌓고 기도를 했는데

마침 천변 天變 (하늘에서 생기는 변동) 이 일어나자

모든 사람이 김유신의 지성 至誠 (지극한 정성) 에

감동된 결과라고 말했습니다


(김유신 장군에 대한 미화적 기록이라 할 수 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고구려 , 말갈 역시

오랜 중국과의 전쟁 등으로 피폐해져 있어서

신라 공격은 부담이었다 할 수 있고

또 신라 최북단인 한강유역은 아무리 신라가 백제 공격을 가느라

군사들을 많이 빼놨다 하더라도

한강유역은 신라 요충지이자 중국과 교류시 지나가야 할 통로이자

풍부한 곡창지대 였기에 신라는 기본적으로 한강유역에는

최정예 병사들을 배치해 놨다 할 수 있고

신라의 한강유역의 요새화 등등

이런 상황에

김유신 장군도 신라가 백제를 치는 사이

고구려 , 말갈이 아무리 한강유역을 치려 해도

좋은 결과를 낼 수 없을 것을 예견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김유신이 일찍이 추석 날 밤에

자제(남의 아들의 높임말) 들을 데리고

대문 밖에 서있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어떤 사람이 서쪽에서 왔습니다

김유신은 그가 고구려 첩자인 것을 알고

불러서 앞으로 오게 했습니다


김유신이 말했습니다


<김유신>너희 나라에 무슨 일이 있느냐 ?


고구려 첩자는 고개를 숙이고

감히 대답을 못했습니다


김유신이


<김유신>두려워하지 말고 사실대로 말하라


고 했으나 역시 대답이 없었습니다


김유신이


<김유신>우리나라(신라) 임금은

위로는 하늘의 뜻을 어기지 않고

아래로는 인심 人心 (사람, 백성의 마음) 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흔쾌히 각자의 생업을 즐기고 있다

이제 네가 이것을 보았으니

가서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이를 전하라 !


하고는 곧 그를 위로하여 돌려 보냈습니다


이에 고구려인들이 이 말을 듣고 말했습니다


<고구려인들>신라가 비록 작은 나라지만

김유신이 재상이 되었으니 경시할 수 없다


(新羅雖小國 신라수소국

庾信爲相 유신위상

不可輕也 불가경야 )


<고구려를 멸망시킨 태대각간 김유신>


6월

당의 고종 황제(당고종)가

장군 소정방(당나라 장수) 등을 보내서

고구려를 정벌하게 했습니다

당나라에 가서 숙위(황제를 모시는 일)하던

김인문(태종 무열왕의 둘째 아들) 이

(당고종의) 명을 받고 와서 출병 기일을 보고하는 동시에

신라에서도 군사를 출동시켜 함께 고구려를 치라는 황제의 뜻을 전했습니다


이에 따라 문무대왕(신라 30대왕 문무왕 김법민 , 김인문의 친형) 이

김유신 , 인문 , 문훈 등을 대동하고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로 가는 도중

남천주 南川州 (오늘날 경기도 이천시)에 이르렀습니다


진수 鎭守 (군대를 주둔하여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을 지킴) 하던

당나라 장수 유인원도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사비(옛 백제 수도)에서 배를 띄워

혜포 鞋浦 (백강, 오늘날 금강 지역 추정)에 내려서

역시 남천주 南川州 (오늘날 경기도 이천시) 에 진을 쳤습니다


이 때 유사 有司 (관리 , 벼슬아치) 가 (김유신에게) 와서 보고했습니다


<신라 벼슬아치>앞에

백제의 잔적(패망한 뒤 죽거나 잡히지 않고 남아 있는 적병) 이 있습니다

그들은 옹산성 瓮山城 (오늘날 대전광역시)에 주둔하면서

길을 차단하고 있으니

앞으로 전진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에 김유신이 군사를 동원해서

(옹산)성을 포위했습니다

(신라)사신이 (옹산)성 아래로 가까이 접근해서

(백제 부흥군) 적장에게 말했습니다


<신라 사신>네 나라가 공손치 않았기 때문에

대국의 토벌을 받게 된 것이다


명령에 따르는 자는 상을 받을 것이며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제 너희들이 홀로 고립된 성을 지켜서 무엇을 하겠느냐 ?

결국 비참하게 궤멸될 것이니

나와서 항복하는 것만 못하다


이리하면 목숨을 보존할 뿐 아니라

부귀도 기대할 수 있으리라


적(옹산성 백제 부흥군)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옹산성 백제 부흥군>비록 하찮은 작은 성이지만

병기와 식량이 충족하며

병사들이 의롭고 용감하니


차라리 목숨을 걸고 싸울지언정

맹세코 살아서 항복하지는 않겠다 !


김유신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김유신>궁지에 몰린 새나 곤경에 처한 짐승은

자신을 위하여 싸운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이로구나


김유신은 곧 깃발을 휘두르고 북을 울리며 공격했습니다


대왕(문무왕)이 높은 곳에 올라

(신라)전사(전사=군사)들을 보며 눈물어린 말로 격려하니

신라군사들이 모두 분격(분발하여 공격함) 돌진해서

창과 칼을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9월 27일

옹산성이 함락되자 적장을 처형하고

백성들은 놓아 주었습니다


공에 따라 장병들에게 상을 주었으며

(당나라 장수) 유인원도 역시 차등(차이나는 등급)을 두어 비단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리하여 군사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말을 배불리 먹인 다음

당군과 합세하고자 했습니다


대왕(문무왕)은 이보다 앞서

태감 太監 (내시 , 환관 ??) 문천을

소장군(당나라 소정방 장군)에게 파견해서 편지를 보냈었습니다

그 문천이 이 때 돌아와

복명(명령을 받고 일을 처리한 사람이 그 결과를 보고함) 하고

소정방의 말을 전했습니다


<문천이 전한 소정방의 말>내가 황제의 명을 받아

만리 밖에서 창해 滄海 (넓은 바다) 를 건너

적(고구려)을 토벌하러 와서 해안에 배를 정박한 지

이미 한 달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대왕(문무왕)의 군사가 오지 않고

군량의 수송이 계속되지 않아 심히 위태로우니

왕(문무왕)께서는 대책을 세워주소서


문무왕이 군신 羣臣 (신하 무리 , 신하들) 들에게

어찌하면 좋은가를 물었습니다

신하들은 모두 말했습니다


<신라 신하들>적(고구려)의 경내(지역 안)에 깊이 들어가

군량을 운반하는 것은 대세(형세)로 보아 불가능합니다


대왕(문무왕)이 이를 걱정하며 한탄하자

김유신이 앞으로 나아가 대답했습니다


<김유신>제가 과분한(분수에 넘친)

은총(높은 사람에게서 받는 은혜와 사랑)을 받아

외람스럽게(분수에 지나치게도)

중책(중대한 책임)을 지니고 있으니


나라의 일이라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사양할 수 없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늙은 몸이 충성을 다할 때이오니

제가 적국으로 들어가

소장군(소정방 장군)의 뜻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왕(문무왕)은 자리를 앞으로 당겨서

김유신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습니다


<문무왕>공 같은 어진 신하를 얻었으니

걱정할 일이 없소

만약 이번 일을 성공시킨다면

그대의 공덕을 잊을 날이 없을 것이오


김유신은 명령을 받은 후

현고잠 懸鼓岑 (봉우리 잠이니 산 이름같습니다)의

수사 岫寺 (산굴 수 , 절 사 로 산굴의 절 같습니다)에 갔습니다

그는 목욕재계 齊戒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행동을 삼가는것) 하고

영실 靈室 (영혼을 모시는 방, 사당 ??) 로 들어가서

문을 닫고 홀로 앉아서

향을 피운 지 며칠이 지나서야 나왔습니다

김유신은 혼자 기뻐하며 말했습니다


<김유신>이번 전투에서는 죽지 않는다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의 기도가 생각납니다

제갈량은 건강이 악화되자 수명을 연장하기위해 촛불을 키고

10일동안 하늘에 기도를 드렸는데

9일째 되는날 부하 위연이 촛불을 꺼버려서

수명 연장에 실패했고 촉나라가 멸망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반대로 김유신 장군은 이런 의식에 성공했다 할 수 있고

둘다 비과학적인 이야기긴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당시 김유신 장군도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고

또 직감적으로 신라의 국력이 고구려에 밀리지 않을 만큼

강성했음을 느꼈다고도 할 수 있어 보입니다)


김유신이 떠나려 할 때

문무왕이 직접 김유신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써주었습니다


<문무왕>(김유신은) 국경을 나선 뒤에는 상벌권을 행사할 수 있다

(국경밖 , 고구려 정벌일의 모든것을

김유신에게 맡기겠다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12월 10일

(김유신은) 부장군 副將軍 (대장군[김유신]을 보좌하는 장군) 인문 , 진복 , 양도 등

아홉 장군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양곡 (양식과 곡식 , 군량미 등)을 싣고 고구려 경계로 들어 갔습니다


임술

정월(1월) 23일에

칠중하 七重河 (오늘날 임진강)에 이르렀습니다

(신라)군사들은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먼저 (고구려로 가는 강을 건너는 배에) 승선하려는 자가

없었습니다


김유신이 말했습니다


<김유신>그대들이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왜 여기에 왔는가 ?


김유신이 마침내 스스로 먼저 배를 타고 건너가니

모든 장졸이 그 뒤를 따라 강을 건넜습니다

고구려 경내(지역 안)에 들어가서는

큰 길에서 고구려군에게 요격(공격) 당할 것을 염려한 나머지

험하고 좁은 길로 행군해서

산양 䔉壤 에 도착했습니다


김유신이 여러 장병들에게 말했습니다


<김유신>고구려 , 백제 두 나라가

우리 강토를 침노(남의 나라를 불법으로 쳐들어가거나 쳐들어옴) 하여

우리 백성을 해쳤도다


더러는 장정들을 포로로 데려가 죽이기도 하였으며

더러는 어린이들을 사로잡아 노비로 부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이 오래 계속되었으니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지금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어려운 일을 하려는 것은

대국(당나라)의 힘을 빌어 두 나라를 멸망시켜

나라의 원수를 갚으려는 것이다

마음에 맹세하고 하늘에 고하며

조국 영령(영혼 , 조국영령 = 호국영령 , 조국을 보호하고 지킨이들의 영혼)의

가호(보호)를 기대하는데

여러분의 심정이 어떠한가를 알 수 없기에 말하는 것이다


만약 적을 가벼이 여긴다면 필히 공을 이루고 돌아 갈 수 있을 것이나

적을 두려워하면 어찌 사로잡힘을 면할 수 있으랴 ?


마땅히 한 마음으로 협력하여

누구나 일당백 一當百 (한 사람이 백 사람을 당해냄) 의

용기를 갖기를 여러분에게 기대하는 바이다


모든 (신라)장졸들이 말했습니다


<신라 군사들>장군의 명령을 받들어

구차하게 살아갈 마음을 감히 갖지 않겠습니다


그들은 곧 북을 치고 행진해서 평양(고구려 수도)으로 향했습니다


도중에 적병(고구려 군)을 만나 역습하여 이기고

많은 갑옷과 무기를 노획(전쟁터에서 적의 물품을 획득하는 것)했습니다

험준한 장새 障塞 (요새와 보루[방어 구조물] )에 이르자

때마침 날씨가 몹시 춥고 사람과 말이 지쳐서

더러는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김유신은 어깨를 벗어 붙이고( '어깨, 두팔를 걷어 붙히고' 같습니다)

말에 채찍을 가하여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이를 보고 힘껏 달리며 땀을 흘리면서

감히 춥다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험한 곳을 지나 평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도착했습니다


김유신이 말했습니다


<김유신>당군(당나라군)이 식량 부족으로 궁색(매우 가난, 굶주림)하여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으니

먼저 소식을 알려야겠다


김유신은

보기감 步騎監 (신라 무관 벼슬로 사지[신라 13등벼슬] 에서

나마[신라 11등벼슬] 까지니 하급 무관같습니다) 열기를 불러 말했습니다


<김유신>나는 젊어서부터 그대와 교유(서로 사귀어 놀거나 왕래함)하여

그대의 지조와 절개를 알고 있다


(열기는 김유신이 청소년 군사집단이었던 화랑일때

김유신 소속 낭도[화랑] 였고

그역시 적지 않은 나이였을것인데

보기감 벼슬은 높은 벼슬이 아닌거 같고

이는 골품제의 한계성을 보여준다고도 보여집니다

물론 당대에는 신분의 높고 낮은이 모두 전쟁터에서 죽어가던 시기고

전공으로 승진이 가능해서 골품제의 문제점이 덜나타났다고 할 수 있겠지만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백제 , 고구려 유민들의 불만 + 평화기 당시 고착화된 신분제 등으로

여러 문제가 있었던 골품제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소장군(당나라 소정방 장군)에게 우리의 뜻을 전달하려 하나

사람을 구하기 어렵다

그대가 갈 수 있겠는가 ?


열기가 말했습니다


<열기>내가 비록 불초(못나고 어리석다)한데도

중군직 中軍職 (중앙군 일)에 있는 것이

외람(하는 짓이 분수에 지나치다)된 일인데

황차(하물며) 장군의 명령을 욕되게 하겠습니까 ?

내가 죽는 날이 바로 새롭게 태어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열기는 드디어

장사 壯士 (뛰어나게 힘이 센 사람) 구근 등

15명과 함께 평양으로 가서

소장군(당나라 장수 소정방)을 만나 말했습니다


<열기>유신(김유신)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군량을 운반하여 이미 가까운 곳에 도달하였소


소정방이 기뻐하여 편지를 주어 사례했습니다


김유신 등이 양오 楊隩 (현재의 평양 강동군 추정)에

이르렀을 때

한 노인을 만나 여러 가지 상황을 물었는데

노인은 적국(고구려)의 소식을 자세히 말해주었습니다


김유신은 노인에게

포백 布帛 (베와 비단 , 직물의 총칭)을 주었는데

사양하여 받지 않고 가버렸습니다


(고구려의 정보를 알려준 고구려 노인같은데

당대 고구려인들 역시 오랜 중국과의 전쟁 ,

연개소문의 공포정치 등으로 민심들이 이탈해갔던 것으로 보이며

이에 노인도 딱히 김유신 장군이 주는 선물을 받지 않고도

그냥 정보를 알려주고 떠난거 같고


또 다르게 본다면 중국의 통일에 자극받은

한국 삼국인들은 내부적으로 통일을 해야한다는 의식들이

퍼져나가고 있었기도 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통일 전의 중국과 통일 후 중국의 국력은 매우 차이가 났고

수, 당나라라는 통일 제국과의 전면전을 경험해본 고구려인들 역시

수 , 당을 막긴 막았음에도

그 어마어마한 국력차등에 국토가 피폐해졌고

막아도 막은게 아닌 상황이 되버려서

당대 고구려인들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 전체에게도

이런 통일 중국에 대한 위기감이 있어

김유신 같은 삼국통일을 꿈꾼 인물도 나왔다고 생각되고

점차 삼국통일은 시대적 과제화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김유신이 양오 楊隩 (현재의 평양 강동군 추정)에 진을 치고

중국어를 아는 인문 , 양도와 아들 군승 등을

당영(당나라 군영)으로 파견하여

문무왕의 뜻으로 군량을 주게 했습니다


소정방은 식량이 떨어지고 군사들이 피곤하여

힘껏 싸우지 못하다가 식량을 얻게되자 곧 당으로 돌아갔습니다


양도도 병력 8백 명을 거느리고 해로를 통해서

본국(신라)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때 고구려인들이 병사를 매복시켜서

우리(신라) 군사를 귀로 歸路 (돌아가는 길)에서 요격(공격)하려 했습니다


김유신은 북과 북채(북을 치는 조그만 방망이) 를

여러 마리의 소의 허리와 꼬리에 매달아서 후려치면 소리가 나게 하고

또한 풀과 뗄나무를 쌓아놓고 불을 질러서

연기와 불이 끊이지 않게 한 다음


밤에 몰래 행군하여 표하 瓢河 (오늘날 임진강)에 이르자

급히 강을 건너 군사들에게 휴식을 취하도록 했습니다

고구려인들이 이것을 알고 추격하자

김유신은 만노 萬弩 (만개의 쇠뇌,석궁) 를 일시에 쏘도록 했습니다


고구려군이 퇴각하자

여러 당 幢 (신라 군사 조직 단위) 의 장병들을 지휘하여

여러 길로 출동하여 그들과 대항해 싸워 승리하고

(고구려)장군 한 명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의 머리를 베었습니다


문무왕이 이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 위로했습니다

그들(신라군사들)이 돌아오자 문무왕은 공로를 세운 정도에 따라

봉읍(봉토, 땅)과 작위를 상으로 주었습니다


용삭 3년 계해에

백제의 여러 성에서 비밀리에 나라를 다시 세우고자 했습니다

(백제 부흥운동)


그 두목은 두솔성 豆率城 (주류성[추정 같습니다] ,

오늘날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에 웅거하면서

왜(일본)에게 병력의 원조를 요청했습니다


대왕(문무왕)이 직접

김유신 , 인문 , 천존 , 죽지 등 장군들을 거느리고

7월 17일에

토벌 길에 올랐습니다


그들은 웅진주 熊津州 (오늘날 충청남도 공주시) 에 가서

진수 鎭守 (군대를 주둔하여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을 지킴) 하던

(당나라 장수) 유인원의 군사와 합세하여

8월 13일

두솔성에 이르렀습니다


백제인들은 왜인과 함께 진을 쳤는데

우리(신라) 군사들이 힘껏 싸워 대파시키니

그들이 모두 항복했습니다


대왕(문무왕)이 왜인들에게 말했습니다


<문무왕>우리와 너희나라가

바다를 경계로 하여 일찍이 싸운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사실 그렇지는 않았고 신라는 건국 이래로

바다가까운 왜의 위협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신라 중대에 가며 신라 국력이 강해지며

왜가 이시기부터 점점 신라에 약탈을 중지한 것으로 보여지고

문무왕대에는 그런 점을 깜빡한 신라인들 같습니다)


우호 관계를 맺고 화친을 맺는 등 서로 예방하고 교유하여 왔는데

무슨 이유로 오늘날 백제와 악행을 함께 하여

우리나라를 치려 하는가 ?


이제 너희 군졸들의 생명이 나의 손 안에 있으나

차마 죽이지 않는 것이니

너희들은 돌아가서 너의 국왕에게 이 말을 고하라 !


그리고 문무왕은 그들 마음대로 돌아가게 한 후

군사를 나누어 여러 성을 공격하여 항복시켰습니다


다만 임존성 任存城 (오늘날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의 봉수산성) 만은

지리가 험준하고 성이 견고하며 더욱이 양식이 풍부했기 때문에

공격한 지 30일이 되어도 항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리하여 (신라)군사들이 피로해지자

싸우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근데 당대 신라인들도 삼국통일 전쟁은 큰 두려움이 많이 있었고

대신 그렇다고 국력이 약했던 것은 아니지만

인구가 적어 삼국통일전쟁 당시

항상 온 마을 병력을 쥐어짜는 총력전 형식의

신라였고 여러 역량이 있기는 있었지만

신라군사들 역시 두려움과 피로감이 크게 있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대왕(문무왕)은


<문무왕>지금 성 하나가 함락되지 않았으나

다른 여러 성과 보루(방어 구축물)가 모두 항복하였으니

공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무리하지 말자)


고 말하고

군사를 정비하여 돌아왔습니다


11월 20일 겨울

서울(=수도 , 서라벌)에 도착하여

(문무왕은) 김유신에게 밭 5백 결 結 을 하사하고

기타 장졸들에게는 공의 정도에 따라 상을 주었습니다


- 여기까지가 김유신 중 中 편의 끝입니다 -


인덕(당고종의 네번째 연호) 원년(1년) 갑자

3월

백제의 잔적(패망한 뒤 죽거나 잡히지 않고 남아 있는 적병 ,

여기서는 멸망한 백제의 백제 부흥운동군)이

다시 사비성(옛 백제 수도)에 모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웅주 熊州 (오늘날 충청남도 공주시) 도독이

자기 소관 所管 (관할) 의 병력으로 공격했으나

여러 날 안개가 끼어서

사람과 물건을 분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싸움을 할 수 없었습니다


백산(웅주도독의 부하 , 사람 이름)으로 하여금

그 사정을 보고하게 하니

김유신이 비밀 계책을 알려 주어서

이들을 격파하게 했습니다


인덕(당고종의 네번째 연호) 2년

당나라 고종이

사신 양동벽과 임지고 등을 보내와 빙문하고

동시에 김유신을 봉상정경 평양군 개국공에 책봉하고

식읍 2천 호를 주었습니다


건봉(당고종의 다섯번째 연호)

원년(1년)

황제(당고종)가 칙명(황제의 명령)으로

김유신의 장자(첫째아들) 대아찬(신라 5등벼슬) 김삼광을 불러서

좌무위익부 중랑장으로 삼고 궁전에서 숙위(황제를 모시는 일) 하게 했습니다


총장(당고종의 6번째 연호)

원년(1년) 무진에

당나라 고종 황제가

영국공 이적(이세적으로 유명한 당나라 장수)에게 군사를 주어서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고

마침내 우리(신라)에게도 군사를 징발케 했습니다


문무대왕(문무왕)이 군사를 출동시켜서 이에 호응하고자

흠순(김유신 장군의 동생)과 인문을 장군으로 임명했습니다


김흠순이 왕에게 말했습니다


<김흠순>만일 유신과 함께 가지 않는다면

아마도 후회할 일이 생길 것입니다


문무왕이 말했습니다


<문무왕>공들 세 신하(김유신 , 김흠순 , 김인문) 는 국가의 보배이니

만약 한꺼번에 적지로 갔다가 불의의 일이 있어 돌아오지 못한다면

나라 일을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하니 유신을 이곳에 남아있게 하면

은연중 나라의 장성 長城 (긴 성) 과 같아 종내(혹은 종래 , 처음부터 끝까지) 근심이 없으리라


흠순은 김유신의 동생이었으며

인문은 김유신의 생질(누이의 아들, 조카로 김유신의 여동생

문명왕후 김문희가 태종 무열왕과 결혼해서 문무왕 김법민과

김인문을 낳았습니다) 이었습니다


(이미 신라 정계는 김유신 세력이 자리잡고 있었고

당대 문무왕도 김유신 장군의 조카였으며

신라 왕실도 김유신 친척들로 채워졌던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유신을 높이 섬기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감히 문무왕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고

유신에게 말했습니다


<김흠순 , 김인문>자질이 부족한 우리가

지금 대왕의 뜻에 따라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땅(고구려)으로 갑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가르쳐 주기 바랍니다


(아무리 당대 김유신 장군이 늙은 노장이었어도

당대 신라인들은

항상 어려운 일이 있다면 모든지 해결해 줄거 같았던

그런 느낌으로 김유신 장군을 대했던거 같고

가히 그는 군사적으로만 뛰어난것이 아닌

신라인들이 깊게 믿고 의지하는

신라의 정신적 지주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유신이 대답했습니다


<김유신>무릇 장수란 나라의 간성 干城 (방패 간, 성 성 , 방패와 성 )과

임금의 손발이 되어 전쟁터에서 승부를 결정내는 것이다


반드시 위로는 천도 天道 (하느님의 뜻 , 천지와 자연의 도리)를 얻고

아래로는 지리 地理 (땅의 이치) 를 얻으며

중간으로는 민심(백성, 사람의 마음)을 얻은 뒤에야 성공할 수 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충신 忠信 (충성과 신의) 으로 인하여 존재하게 되었고

백제는 오만 (태도나 행동이 건방지거나 거만함 , 또는 그 태도나 행동) 

으로 인하여 멸망했으며

고구려는 교만 (잘난 체하며 뽐내고 건방짐) 으로 인하여 위태롭게 되었다


(백제 ,고구려의 특징을 잘 집어낸 비판 같습니다

화려한 문화의 그러나 위기의식이 부족했던 백제는 오만 ,

강대하고 자주성이 강하나 또한 독선적이기도 했던 고구려는 교만)


이제 우리의 올바름으로

저 편의 그릇됨을 친다면 뜻대로 될 것이다


하물며 큰 나라(당나라)의 현명하신 천자의 위엄에 힘입고 있으니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


가서 노력하여 너희들의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하라 !


이에 두 사람이 절을 하면서 말했습니다


<김흠순 , 김인문 >공의 뜻을 두루 받들어

감히 실패가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김유신 장군은 대세와 정략[정치상의 책략]상

이미 승기[이길 수 있는 기회]가 신라에게 있음을 판단하고

'걱정하지 말거라' 라고 조언을 해주게 된 거 같고

그 뜻을 알게된 김흠순 , 김인문도

다시 임전무퇴 臨戰無退 [싸움에 임하여 물러섬이 없음]

의 정신으로 원정에 나서게 된거 같습니다)


문무대왕(문무왕)이 영공 英公 (당나라 장수 이적의 봉호)과 함께

(고구려 수도) 평양을 격파하고 


-고구려 멸망 ,

(나당전쟁 완수 전 일단 형식적인) 신라의 삼국통일 완료-


남한주 南漢州 (황해도 , 경기도 , 충청도 지방을 아우르는 한주의 남쪽 ,

한강 이남 지역정도 같습니다)

에 돌아와서 여러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문무왕>옛날 백제의 명농왕 明穠王 (백제 26대왕 성왕의 이름 , 성왕의 이름은

부여명농) 이 고리산 古利山 (고리산성 古利山城 이라고도 하는

관산성으로 오늘날 충청북도 옥천군)에서

우리나라(신라)를 침략하려 했을 때 (관산성 전투)


김유신의 조부(할아버지) 무력(김무력) 각간(=이벌찬, 신라 1등벼슬) 이 장수가 되어

그들을 맞아 싸워 이겼으며

승세를 타고 그 왕(백제 성왕)과 재상 네 명(당대 백제 좌평[백제 1등벼슬] 4명)과

사졸들을 사로잡아 그들의 세력을 꺾었다


또한 유신의 부친(아버지) 서현(김서현)은

양주 良州 (오늘날 경상남도 양산시) 총관(주의 군대 통솔 벼슬) 이 되어

여러 차례 백제와 싸워서 예봉 (날카롭게 공격하는 기세 , 사기) 을 꺾음으로써

그들이 우리(신라) 변경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3대째 군인집안이었던 김유신 장군으로

사실 김무력 장군도 전설적인 장군인데

중간에 아버지 김서현은 조금 묻힌 감이 있더라도

신라의 전설적인 장군이 나온 집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옛날엔 장군, 신하로 이름을 떨치면

그 후손들도 대대로 그쪽으로 가능 경향이 있었던거 같고

대표적인 사례로는 이순신 장군이라는 전설적인 조상 덕분에 ??

조선시대에 무반 명문가로 자리잡으며

적성 무시한체 거의 강제로 대대로 무인이 됬던 이순신 장군의 후손

덕수 이씨들이 있습니다)


이로써 변경의 백성들은 편안히 농상 農桑 (농사와 누에치기) 에 종사하였고,

임금과 신하는 나라에 대한 근심이 없게 되었다


지금은 유신(김유신)이 조부(할아버지)와 부친(아버지)의

유업 (선대부터 이어온 사업) 을 계승하여

사직 社稷 (조정 ,나라) 을 맡는 신하가 되었다


그는 나가면 장수의 일을 하였고

들어오면 정승의 일을 하였으니

그 공적이 매우 크다


만일 (김유신)공의 한 가문에 의지하지 않았더라면

나라의 흥망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직위와 상을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


여러 신하들이 말했습니다


<신라 신하들>저희들의 생각이 실로 대왕의 뜻과 같습니다


이에 유신에게

태대 서발한 (서발한 = 각간 = 신라 1등벼슬 이벌찬인데

앞에 클 태 太 와 큰 대 大 자 가 붙어서

일반 1등벼슬 이벌찬 앞에 김유신을 위해 태대라는 것을 붙여줘서

오늘날 그는 발음상 가장 어감이 좋은 '태대각간 太大角干 ' 이라고 부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각간, 서불한, 태대각간 같은 신라 최고벼슬이름이

고려 최고벼슬 문하시중이나 조선 최고벼슬 영의정보다

어감도 좋고 자연적이기도 해서 고대 이름들이 멋있습니다

옛날 이름, 지명들이 더 멋있는 이유가

고대에는 고유어와 자연등에서 이름을 따왔고

고려, 조선시대로 갈수록 점점 유교화되서 유교, 중국식 이름들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태대각간은 결국

김유신의 , 김유신에 의한 , 김유신을 위한 특별관직이었다고 할 수 있고


비슷한 사례로는

고구려 연개소문을 위한 특별관직이었던 대막리지도 있는데

대막리지는 태대막리지라고도 하고 둘다 태대자가 붙었다는 것은

전설적인 관직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고

이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김유신 장군에게 관직 , 칭호 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정도고 단지 그의 이름 자체가

관직이나 칭호였다고 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 직위를 제수하고

식읍(공신등에게 세금을 거둘 수 있게 주는 땅, 권리)을 5백 호 戶 (집)로 했습니다

또한 수레와 지팡이를 하사하고

전상(궁전 위)에 오를 때도 빨리 오르지 않게 하였으며

그의 속관(속한 관원 ,부하장수)들에게도

각각 위계를 한 급씩 올려 주었습니다


<라봉봉>삼국사기 열전의 김유신 장군 기록은 매우매우 길어

상중하로 나뉘어 있을 정도니 너무 길어서

저도 길게 써봤습니다 ,,


긴거를 떠나가지고 김유신 장군 글을 보면

롤러코스터를 타는 느낌이라거나 울렁거리는 느낌을 받는거 같은데

김유신의 정신세계는 보통의 경지를 넘어서서

신라인들은 마치 그를 신을 대하는 것처럼

여기며 실제 그를 대할때에도 여러 어지러움증을 느끼듯이

그에게 빨려가듯이 했던게 아닐까 싶고


괜히 어렵게 비유하는 것이 아닌

쉽게 비유해보면,, 흔히 영웅적인 인물들을

한국에서는 한국의 대표동물이자

짐승들의 왕이라 할 수 있는 '호랑이' 에 비유하는데

호랑이의 눈빛을 보면 동물들이 압도당해 꼼짝도 못한다고 하듯이


우리가 실제로 그와 대면하고 있지 않더라도

책, 이야기를 통해 그를 간접적으로 대면해도

그가 보통의 인물이 아니었음을 느낄 수 있는거 같다고 생각되고


열전이라는 왕의 시각에서 글이 아닌 수많은 백성들의 이야기라는 것과

김유신이라는 비범한 인물등 으로 인해 여러 즐겁고 아찔한 어지러움같은게

느껴지는거 같습니다


삼국사기 본기, 왕이 주인공인 기록에서 보는 김유신과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이 주인공인 , 신하의 시각으로 보는 왕과

사람들의 이야기는 또 다른거 같고

옛날 느꼈던 어떠한 느낌들이 되살아 나는 기분입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김유신 장군은 정치가이자 장군으로서 삼국통일이라는

신라의 길을 제시했고

수백년이 이어진 큰나라들이 멸망하고 거대하게 맞물려가는 상황들 앞에

두려움에 떨던 신라인들에게 솔선수범의 자세로

그들을 이끌고 모범을 보였던 인물이라 할 수 있으며

신하로서는 더이상 오를 수 없는 영예의 자리이자

또 굳이 매우 강력한 권한을 갖고도 굳이 반란이나 그런것이 아닌

충절의 신하로 남았던 그였고 죽을때까지

견제나 질투는 커녕 신라인들의 존경과 사랑으로 최고의 대우를 받던 그였으니

성공한 장군이자 성공한 정치가이자 일인지하 만인지상 (한명[왕]아래이자

만인[왕제외 모든 사람]의 위) 의 자리에서

왕들을 모시며 삼국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루어냈던 인물이었고

비록 논란이 없지않아 있긴 한 인물임에도

그가 끝까지 지키려 했던 '의리' , '충절' 등은 그의 평생의 자산이 되었다고 할 수 있고

그는 그렇게 나이가 되서도 은퇴는 커녕

당대 신라에서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할 수 있기에

우리가 어떠한 방향으로 살아야 되는 지를 그의 삶을 보면서

어느정도는 생각해 볼 수가 있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또 다른 생각으로는,,

김유신 장군의 말, 일생은 상당히 철학적이라

장군이 아닌 사상쪽으로 갔어도 성공했을 인물 같고

(비슷한 사례로는 고구려 대무신왕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그가 좋게 생각되는 이유는

저는 비논리적, 감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감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본 거 같은데

김유신 장군은 상황을 논리적으로 판단하며

감정등에 휩쓸리지 않고 뚜벅뚜벅 자신의 길을 간 느낌이기도 해서

좋은거 같고

저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을 보면

갯벌속의 진주를 본 거 같이 매우 좋아하는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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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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