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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 장군의 여수장우중문시 ,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


고구려 명장 을지문덕


을지문덕은 가문의 내력이 자세히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는 자질(타고난 성품이나 소질) 이 침착하고 용맹스러우며

지모(슬기로운 꾀) 가 있었고 동시에 글도 지을 줄 알았습니다


수나라 개황 연간에

수양제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공격하자

(수나라 장수) 좌익위 대장군 우문술은

부여도 扶餘道 (북만주 일대 ??) 로 나오고

(수나라 장수) 우익위 대장군 우중문은 낙랑도 樂浪道 로 나와서

9군과 함께 (고구려) 압록강에 이르렀습니다


문덕(을지문덕)이 왕(고구려 26대왕 영양왕)의 명을 받들고

적진으로 가서 항복하는 체하였으나

이는 사실 그들의 허실(허함과 실함 , 강점과 약점)을 보려는 것이었습니다


(수나라 장수) 우문술과 우중문은

이보다 앞서 황제(수양제)의 비밀 교지를 받았었습니다

이에는 고구려의 왕(영양왕)이나 문덕(을지문덕)을 만나거든

체포하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우중문 등은

( [거짓으로] 항복하러 온) 을지문덕을 억류(강제로 잡아둠)하려 했는데

위무사로 있던 상서 우승 유사룡이

굳이 말리는 바람에 결국 을지문덕이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그 뒤에 (우중문은) 이를 깊이 후회하여 사람을 보내 을지문덕을 속여서 말하기를


<우중문>재차 의논할 일이 있으니 다시 오라


고 하였으나

을지문덕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압록강을 건너왔습니다


우문술과 우중문은 을지문덕을 놓친 뒤에

마음 속으로 불안하게 생각했습니다


우문술은 군량이 떨어졌다 해서 돌아가려 하는데

우중문은 정예부대로 을지문덕을 추격하면 공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문술이 이를 말렸습니다


우중문이 화를 내어 말했습니다


<우중문>장군이 10만의 병력을 가지고 와서

조그마한 적을 격파하지 못하고 무슨 낯으로 황제를 뵈옵겠는가 ?


우문술 등은 마지못해서

그 말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서 을지문덕을 추격했습니다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에게 굶주린 기색이 있음을 보고

그들을 피로하게 하기 위하여

싸울 때마다 매번 패배한 척하며 도주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문술은 하룻 동안에 일곱 번을 싸워 모두 승리했습니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승리에

뱃심(염치나 두려움이 없이 제 고집대로 버티는 힘 , 자만감)이 생기기도 하고

또한 중의 衆議 (일치된 의견 , 여론) 에 몰리기도 해서

마침내 동쪽으로 나아가 살수(오늘날 청천강)를 건너서

평양성 30리 밖에서 산을 등지고 진을 쳤습니다


을지문덕이 우중문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보냈습니다


<을지문덕의 시 , '여수장우중문시 與隋將于仲文詩 ' 로 유명>

신기한 계책은 천문에 통달했고

묘한 계략은 땅의 이치를 알았도다

전투마다 이겨 공이 이미 높았으니

만족한 줄 알았으면 돌아가는 것이 어떠하리


神策究天文 신책구천문

妙算窮地理 묘산궁지리

戰勝功旣高 전승공기고

知足願云止 지족원운지


(수나라군은 이미 무리한 고구려 원정등으로

계획등에 실패해있었고 헐벗고 굶주린 상태로

을지문덕의 유인에 끌려서 고구려 수도까지 깊게 들어온 상태였고

반어법의 수나라군 조롱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약해보면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 이제 너넨 끝'


이라고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우중문이 답서를 보내 효유(깨달아 알아듣도록 타이름) 했습니다

을지문덕이 또한 사자를 보내 항복을 가장하고 술에게 요청하였다.


<을지문덕>만일 군사를 철수한다면

틀림없이 왕을 모시고 행재소 行在所 (임금이 거동할 때

임시로 거주하는 임시 별궁) 로 가서 직접 뵙겠다


우문술은 군사들이 피곤하고 기운이 쇠진하여

더 이상 싸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평양성은 험하고 견고하여

갑자기 함락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하여

거짓 항복이라도 받은 상태에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방어진을 만들며 행군했습니다


을지문덕이 군사를 출동시켜 사면으로 공격하니

우문술 등이 한편으로 싸우며 한편으로는 쫓겨 갔습니다


수나라군들이 살수(청천강)에 이르러 군사가 절반쯤 강을 건너 갔을 때


<을지문덕>전군 공격하라 ! 우리의 국토를 유린한 자들을

한 놈도 살려보내서는 안된다 !!


을지문덕이 군사를 몰아 그들의 후군을 맹공해서

우둔위장군 신세웅을 죽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모든 적군이 한꺼번에 허물어져 걷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살수대첩 민족기록화>


(한국사 전설의 전투

고수전쟁의 '살수대첩' 입니다


손자병법에는 '적군이 강을 건널때 공격하면 필승!' 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강을 건널때는 외부의 공격 , 노출에

취약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나라 아홉부대의 모든 장졸이 달려서 패주(패해서 도망)했는데

하루낮 하루밤 사이에 압록강에 이르니

그들은 (하루만에 달려서) 4백 50리 (약 177km ,

서울 ~ 부산 절반거리를 하루만에 달려서 간거니

살기위해 전력질주로 도망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를 간 셈입니다


처음 요수(요하)를 건너 올 때

수나라군들은 9군 30만 5천 명이었는데

(살수대첩에서 패해서) 요동성에 돌아갔을 때는

다만 2천7백 명뿐이었습니다


<김부식>논한다

수양제가 요동(고구려) 전쟁에 보낸 병력은

출동 병력이 전례가 없을 만큼 거대하였다


('전투병만' 113만 군대였고

수송하는 자는 그 배였다고 합니다

이는 세계 1차대전 전까지 세계 최대 규모였으며

당대 동아시아 패권을 놓고 한국과 중국이 겨룬

대전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가 한 모퉁이에 있는

조그마한 나라로서 (중국에 비해서는 작았지만

실제로 결코 작은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능히 이를 방어하고 스스로를 보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군사를 거의 섬멸해버릴 수 있었던 것은

을지문덕 한 사람의 힘이었다


경전(춘추좌전)에 이르기를


'군자가 없으면 어찌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리오 ? '


라고 하였는데

참으로 옳은 말이다


<을지문덕 장군 영정>


<라봉봉>한국사 명장인

고구려를 구한 인물 을지문덕 장군의 이야기입니다


이전 고구려 이야기를 쓸 때 썼고

안타깝게도 기록이 부족해서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는 인물이 아니지만

당대 고구려의 패기와 기상,

초강대국 중국에도 절대 굽히지 않고 맞서 싸웠던

기개를 보여준다고 할 수있고

대신 국력차 등으로 점차 밀려 쇠퇴한 고구려는

이후 한국 신라와 중국통일왕조 당에게 멸망하게 되나

당대 을지문덕장군이 막아낸 수나라군은

유례가 없는 대군이었고

고구려인들은 이에 굴종하지 않고

맞서기를 선택하여 민족적 자부심을 지켜내려 했고

또 이에 남쪽 한국왕조인 백제와 신라가 중국 세력의 영향에서

보호 받을 수 있었으며 이에 한국사에서는 고구려를

민족의 방파제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은 기록은 적으나

한국인들에게 항상 사랑받은 명장이었고

조선시대 중국 명나라 사신 축생이

조선 대신 조준에게 중국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이자

(혹은 오만방자하게 굴자)

조준이 옛날 물고기밥 된 중국 젊은이들 시를 읊으며

비아냥 댔다 하고,,

이 시는 '안주회고' 라는 이름으로 오늘날 전해져 옵니다


<안주회고 安州懷古>


살수 강물 파도치며 허공에 출렁이니

薩水湯湯漾碧虛 살수상상양벽허


수나라 백만군사 고기밥이 되었것다

隋兵百萬化爲魚 수병백만화위어


지금까지 어초(어부)들의 얘깃거리로 남아

至今留得漁樵話 지금류득어초화


지나가는 나그네의 한바탕 웃음거리 되고도 남네

不滿征夫一笑餘 불만정부일소여


또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를 사셨던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 선생과

도산 안창호 선생은

그러한 암울한 상황속에서

나라를 구했던 구국의 인물인 을지문덕을

독립운동과 연관시키시며 높게 평가하셨고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는 오늘날에도

대한민국은 분단국가로서 국토가 반으로 나뉘어 있는 것도 있고

또 옛날 고구려의 담대한 패기와 기상등이

거세되다 싶이 한 느낌이고

옛 고구려 이야기를 읽으면

좁은 땅이 아닌 말을타고 넓은 벌판을

자유로히 마음껏 달리셨던

그 어떤 느낌이 생각나기도 하고


성인이 되기 전에

중국과 미국을 다녀온 적이 있었던 저로서

각 나라의 분위기등을 느끼기에는

중국과 미국은 물론 그나라만의 문제도 있기는 하지만

넓고넓은 땅과 자원등으로

별 걱정없는 그 어떤 쿨한 느낌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있는데

한국은 좁은곳에서 닭장속 닭같이 서로 분노를 참고 있는 느낌이고

무언가 거세된 느낌이 있습니다

당장 38선 등이나 휴전으로 인한 전쟁의 위협 등

여러 상황도 관련이 있는 일이고

이는 당장 북방을 자유롭게(혹은 몰래) 넘어다녔던

조선시대만도 못한 억압된 느낌의 분위기라 생각됩니다


특히나 고구려 이야기를 읽을 때면

무언가의 걱정없이 해방된 느낌의 뻥뚤리는 느낌의 자유로운 느낌이 저는 좋고

이에 비록 삼국의 최종승자는 신라였을 지언정

저나 수많은 한국인들이 삼국에서

고구려를 가장 좋아하는 이유가 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실제로 한국인들의 인식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삼국시대 나라는

전통적으로도 고구려였던거 같고

이에 고려시대에는 국호를 고구려의 장수왕대부터 정식 국호였던 고려를

그대로 사용해서 고구려를 계승했고

고려의 이슬람 상인들과의 교역으로 고려라는 말이 서양에 퍼져서

오늘날에는 이 고려라는 말이

한국 영어국호 코리아 korea 가 되었고


이런저런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써봤는데

오랫동안 신라이야기를 쓰다가

갑자기 고구려 이야기를 쓰면서

굴종과 사대의 느낌이 아닌

자유와 패기로운 느낌을 받아서

그런 이야기를 써봤고,,

또 이전에도 을지문덕 장군 이야기를 써봤기에 써본 이야기였고,,

고구려를 지켜내셨던 구국의 인물이자 한국의 호국영령

을지문덕 장군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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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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