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태대각간 太大角干 김유신 金庾信 장군의 죽음>


(*태대각간 太大角干 (신라 1등벼슬 이벌찬=각간 보다

높은 김유신 장군을 위해 만들어진 특수관직)


총장(당고종의 6번째 연호)

원년(1년) 에

당나라 황제(당고종)가

영공 英公 (당나라 장군 이적[이세적])의 전공을 책명(말)하고

바로 사자를 보내 그를 위로하는 동시에

군사를 보내 싸움을 돕게 했습니다

그리고 황금과 비단을 상으로 주었습니다


황제(당고종)는 김유신에게도 조서를 내려

그의 전공을 표창하고

또한 입조(당나라에 와서 당나라 조정 조회에 참석)를

하라고 유시(타이름)했습니다


<김부식>그러나 이를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이 (당고종의) 조서는 그(김유신)의 집안에 전하여 오다가

5세 손 때 잃어버렸다


(당대 한국 전체를 지배하려 했던

당나라의 야욕이 있었는데

김유신 장군이 퍽이나 당나라 조정에 갈리가 있었겠는지도 의문이고

당과의 전쟁을 했던 김유신 집안에서도 일단 당황제가 줬으니

받긴 받았는데 딱히 귀중히 여기기도 뭐하다 해서 방치하다

잃어버리게 된 거 같습니다)


함녕 咸寧 (당고종의 7번째 연호 함형의 오기 같습니다) 4년 계유는

곧 문무대왕(문무왕) 13년입니다 (당시 당나라 연호는 함형)

그 해 봄에

요성 妖星 (재앙의 징조로 나타난다고 하는 별) 이 나타나고

지진이 발생하자

대왕(문무왕)이 이를 걱정했습니다

(이에) 김유신이 나아가 말했습니다


<김유신>오늘의 변괴는 그 죄가 노신에게 있는 것이지

국가의 재앙이 아닙니다

왕께서는 걱정 마시기 바랍니다


대왕(문무왕)이 말했습니다


<문무왕>그렇다면 이는 과인에게 큰 걱정거리요


문무왕은 기도를 해서 재액(재앙으로 인한 불운) 을 물리치도록

유사 有司 (벼슬아치)에게 명령했습니다


6월 여름

난데없이 융복 戎服 (군복)을 입고

병기를 든 (귀신) 수십 명이

김유신의 집으로부터 나와 울며 가다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을 본 사람이 간혹 있었습니다


<군복 입은 귀신들>흑흑흑흑


(러시아 대문호 니콜라이 고골의 '외투' 에 나오는

귀신들의 출현이 생각납니다)


김유신은 이 말을 듣고 말했습니다


<김유신>이는 필시 나를 보호하던

음병 陰兵 (그늘 음 , 병사 병자로 신령한 비밀군대,

수호신 정도라 생각해보면 되겠습니다) 이

나의 복이 다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가는 것이니

나는 곧 죽을 것이다


그 후 십여 일 지나서

김유신이 병들어 눕게되자

문무왕이 직접 행차해서 그를 위문했습니다


김유신이 말했습니다


<김유신>신 臣 이 모든 힘을 다하여

원수 元首 (으뜸 원 , 머리 수자로 국가 최고 통치권을 가진 사람) 를

모시려 하였으나

소신의 몸에 병이 들어 이렇게 되었으니

오늘 이후로 다시는

용안 龍顔 (임금의 얼굴을 높여 부르는 말)을 뵈옵지 못하겠습니다


대왕(문무왕)은 울면서 말했습니다


<문무왕>과인에게 경이 있음은

마치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았오

만일 피치 못할 일이 생긴다면

백성들을 어떻게 하며 사직을 어떻게 하리오 ?


김유신이 대답했습니다


<김유신>신은 우둔하고 못났으니

어찌 국가에 도움이 되었겠습니까

오직 다행스럽게도 현명하신 임금께서

의심없이 등용하였고

의심없이 임무를 맡겼기에

대왕의 밝은 덕에 힘입어 약간의 공로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지금 삼한 三韓 (고구려, 백제 , 신라)이 한 집안이 되고

(三韓爲一家 삼한위일가)


(이는 당대에도 고구려 , 백제 , 신라가

한 韓 , 삼한 三韓 이라 불리며 같은 민족의식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의미하고

무슨 신라는 단지 살기위해서

중국 당나라랑 동맹을 맺고

단지 외국이었던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켜 영토를 넓혔고

신라로서는 합리적 , 최선의 판단이었다는

이런 식의 발언들이 있는거 같은데

당대 기록만 봐도 그것이 거짓임을 알 수 있고


이에 신라는 당나라라는 외세를 끌여들여 불완전한 통일을 하고

고구려 영토였던 요동 등 한국 고유의 북방영토를 상실했던 신라였기에

태종 무열왕 김춘추, 김유신 장군 역시

불완전한 통일을 했다는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운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백성들이 두 마음을 가지지 아니하니

비록 태평무사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저 편안하게 되었다고는 할 수 있습니다


신이 보건대 예로부터 대통을 잇는 임금들이

처음에는 잘못하는 일이 없지만

유종의 미(어떤 일 따위의 끝을 잘 마무리하는 성과) 

를 거두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대의 공적이 하루 아침에 무너져 없어지니

심히 통탄할 일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공을 이루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아시며

수성 守成 (조상들이 이루어 놓은 일을 지켜 나아감) 하는 것 또한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시고

소인배를 멀리하며 군자를 가까이 하시어

위로는 조정이 화목하고

아래로는 백성과 만물이 편안하여 화란이 일어나지 않고

나라의 기틀이 무궁 無窮 (공간이나 시간 따위의 끝이 없음) 하게 된다면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문무왕이 울면서 그 말을 받아 들였습니다


7월 1일 가을

김유신이 자기 집의 침실에서 죽으니

향년 79세였습니다


대왕(문무왕)이 부음(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알리는 말이나 글)을 듣고

매우 애통하게 생각해서

채색 彩帛 (=채단 , 온갖 비단) 비단 1천 필과

벼 2천 석을 부의(부조)로 보내 상사(상갓집 일)에 쓰게 하고

군악의 고취수 (군악 고취 軍樂 鼓吹 = 군악대) 1백 명을 보내 주었습니다


금산원 金山原 (오늘날 경상북도 경주시 송화산 기슭으로 추정)에 장사하고

유사 有司 (벼슬아치) 에게 명하여

비를 세워서 그의 공명 功名 (공적과 명예)을 기록하게 하였으며

또한 민호 民戶 (일반 백성들의 집) 를 지정해서

(김유신 장군의) 무덤을 지키게 했습니다


<김유신 장군의 후손들>


(김유신 장군의) 아내 지소부인은

태종대왕(신라 29대왕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셋째 딸입니다

아들 다섯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김삼광 이찬(신라 2등벼슬) 이요

다음(둘째아들)은 김원술 소판(=잡찬 , 신라 3등벼슬) 이요

다음은 김원정 해간 海干 (=파진찬 , 신라 4등벼슬) 이요

다음은 김장이 金長耳 대아찬(신라 5등벼슬)이요

다음은 김원망 대아찬(신라 5등벼슬) 입니다


딸이 넷이었으며

또한 서자(첩에게서 얻은 자식)로서 아찬(신라 6등벼슬) 김군승이 있는데

그 어머니의 성씨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후일

(김유신 장군 사망 이후 김유신 장군의 아내였던) 지소부인은

머리를 깎고 베옷을 입고

비구니(여자 스님)가 되었습니다


이 때 대왕(신라 33대왕 성덕왕)이 (지소)부인에게 이르기를


(성덕왕 11년 김유신 장군의 아내[지소부인]를 봉해서

부인 夫人 으로 봉했다고 합니다)


<성덕왕>지금 나라 안팎이 편안하고

임금과 신하가 베개를 높이 베고 근심이 없는 것은 바로

태대각간 太大角干 이 우리에게 내려준 것이오

이는 부인이 집안을 잘 다스려

태대각간 太大角干 (신라 1등벼슬 각간 위의 벼슬로

김유신 장군을 위한 특별관직 , 김유신 장군을 의미)을

성심으로 도와 준 숨은 공로가 컸던 결과였소


과인은 이러한 덕에 보답하려는 생각을 하루도 잊어본 적이 없다오

그런즉 남성 南城 (오늘날 한강유역 ??) 에서 받는 조를

매년 1천 석씩을 줄 것이오


라고 했습니다


그 뒤에 흥덕대왕(신라 42대왕 흥덕왕)이

(김유신)공을 흥무대왕 興武大王 (흥할 흥 , 무예 무 , 큰 대 , 임금 왕)에 봉했습니다


(김유신 장군은 가야계 김씨였는데 삼국통일이라는 업적이나

신라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커서

이후 예외적으로 왕으로 추존되었고

후대 신라에서도 계속 우대받았던 김유신 장군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법민왕 (신라 30대왕 문무왕 김법민) 이

고구려 반군(고구려 부흥운동 세력)의 무리를 받아 들이고

또한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여 소유했습니다


당 고종은 크게 노하여 군사를 파견하여 그들을 치게 했습니다

(한국땅 전체를 지배할 야욕을 가지고 있었던

당고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군이 말갈과 함께 석문 들판에 진을 치자

문무왕은 장군 의복, 장춘 등을 보내 이를 방어하게 해서

대방 들판에 진을 쳤습니다

이 때 장창당 長槍幢 (신라 군대 이름으로 장창병같습니다) 만은

별도로 진을 치고 있다가

당병 3천여 명과 싸워 그들을 잡아서

대장군의 진영으로 보냈습니다

이에 여러 당 幢 (신라 군사 조직의 기본 단위) 들이 함께 말하기를


<신라 당들>장창영 長槍營 (장창병 진영)은

홀로 있다가 공을 세웠으니 반드시 큰 상을 받을 것이다

우리도 한데 모여서 헛되이 수고만 할 필요가 없다


라고 하면서

마침내 각자 군대를 나누어 분산 分散 (따로따로 흩어짐) 했습니다


당병(당나라군)이 말갈과 함께

우리 군사(신라군)가 아직 진을 치지 못한 틈을 타서 공격해오자

우리 군사(신라군)가 대패해서

장군 효천, 의문 등이 여기서 죽었습니다


(나당전쟁기 당시

신라 + 고구려 부흥운동군 vs 당나라 + 말갈군 구도로 이어졌던

'석문전투' 로 방심한 신라군의 패배였고

이로인해 신라는 수비적 태세로 전략을 변환시킵니다)


김유신의 (둘째)아들 김원술이

비장 裨將 (참모 장수) 으로서 역시 나아가 전사하려고 하니

그의 보좌관 담릉이 만류하여 말하기를


<담릉>대장부는 죽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죽을 경우를 택하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죽어서 성과를 얻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살아서 뒷날의 공적을 도모하느니만 못합니다


하니

김원술이 대답했습니다


<김원술>남아 男兒 (남자다운 남자)는 구차하게 살지 않는 법이거늘

장차 무슨 면목으로 우리 아버지(김유신 장군) 를 뵙겠는가 ?


김원술은 곧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가려 하였으나

담릉이 말고삐를 붙잡고 놓지 않는 바람에 마침내 죽지 못하고

상장군을 따라 무이령 蕪荑嶺 으로 나왔습니다

그러자 당병(당나라 군)이 뒤를 추격하여 왔습니다


거열주 居烈州  (오늘날 경상남도 거창군)

대감 大監 (신라 시위부 侍衛府 [임금, 왕궁 호위부] 무관)

아진함 일길간(=일길찬 , 신라 7등벼슬)이 상장군에게 말했습니다


<아진함>공들은 힘을 다하여 빨리 가라 !

내 나이 벌써 70이니 앞으로 얼마나 더 살겠는가 ?

오늘이 내가 죽을 날이다


그가 창을 비껴들고 진중(군대나 부대의 안) 으로 달려들어 전사하자

그의 아들도 따라서 죽었습니다


대장군 등이 다른 사람들 모르게

서울(=수도 , 서라벌) 로 들어 왔습니다


대왕(문무왕)이 이 소식을 듣고

김유신에게 물었습니다


<문무왕>군사가 이렇게 패하였으니 어찌합니까 ?


김유신이 대답했습니다


<김유신>당인 唐人 (당나라인) 들의 모략을 예측할 수 없사오니

장졸들로 하여금 제각기 요충지대를 지키게 해야합니다


다만 원술은 왕명을 욕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훈 家訓 (집안 교훈) 까지도 저버렸으니

목을 베어야 합니다


(자신의 아들이었던 김원술을 목베야 한다고 문무왕에게

말했던 김유신 장군이었고

이는 가족에게도 똑같이 엄격한 김유신 장군이라 볼 수 도 있으나

당대 김유신 장군의 지휘아래

수많은 병사들 , 신라 최고위층 귀족 자제들이 돌격하다 사망했고

신라는 삼국통일전쟁 당시 극도로 상무적 기풍이 있었는데

이런 상황속에서 자기 자식이라고 특혜를 주기 어려웠던

김유신 장군이었고 이에 전쟁에서 도망친 아들

김원술을 목베라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왕(문무왕)이 말했습니다


<문무왕>원술 비장(참모 장수)에게만 유독 중형을 줄 수 없소


그리고 (문무왕은) 김원술의 죄를 용서했습니다


(사실 문무왕의 이같은 대답은

김유신 장군이 참으로 듣고 싶어한 대답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죽기 원하는 부모는 없고

그렇다고 남의 자식은 돌격시키면서 자기 자식이라고

봐주기는 곤란했던 김유신 장군이었기 때문에

어찌 할 수 없었다 할 수 있고

이런 김유신 장군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문무왕은 김원술을 용서한다고 했겠으나

대신 김유신 장군도 이후 집안에서 김원술을 내쫒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원술이 부끄럽고 두려워서

감히 아버지(김유신 장군)를 만나지 못하고

전원 田園 (시골) 에 은둔(숨어 생활)하다가

아버지가 죽은 뒤에야 어머니를 만나려 했습니다

(김원술의) 어머니(지소부인)는


<지소부인>부인에게는 삼종 三從 (삼종지의 三從之義 , 여자가 따라야 할

세 가지 도리) 의 의리가 있다


이제 내가 과부(남편잃은 여인)가 되었으니

응당 아들을 좇아야 하겠으나

원술과 같은 자는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아들 노릇을 못하였으니

내가 어찌 그의 어미가 될 수 있겠느냐 ?


라 말하고 만나보지 않았습니다


김원술이 통곡하며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면서 떠나지 못하였으나

지소부인은 끝내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김원술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김원술>담릉 때문에 그르친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분하다는 의미로 한 말일 수도 있겠으나

일단 석문전투는 신라군의 방심으로 패배한 전투였기에

당시 김원술이 나서봤자 뻔히 죽음을 당해서

피하는게 상책인 상황이었고

[굳이 개죽음이 뻔한데 싸우는 것도 용렬한 짓이고

오히려 군사학에서는 '도망'도 중요한 전술로 여깁니다]


오히려 담릉과 김원술을 살리기위해

죽었던 70세 노장 아진함과 노진함의 아들의 희생 덕분에 살았던 김원술인데

이런 사람들을 고맙게 여기지는 못할 망정

어머니가 안만나준다고 담릉 탓까지 했으니

이런 성격으로 봐서는 약간 우둔한 면도 있었던 인물 같고

집안에서도 단순히 사회적 시선 이외에도 이런 성격들 때문에

꺼린것도 있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하고 곧 태백산 太伯山 (=太白山 강원도 태백시와

경상북도 봉화군 석포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을해년에

당병(당나라군)이 와서 매소천성 買蘇川城 (=매소성 , 오늘날 경기도 양주시)을 치니

김원술이 이 소문을 듣고 이 기회에 죽음으로써 전일의 치욕을 씻고자

드디어 힘껏 싸워서 공을 세우고 상을 받았으나


(나당전쟁 신라의 대승 ' 매소성 전투 ' )


부모에게 용납(용서)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서

벼슬을 하지 않고 일생을 마쳤습니다


(그래도 김유신 장군의 아들답게

부끄러움을 느끼고 속죄하려고 끝내 당나라군에 맞서 용감히 싸워

죄책감을 덜려 했던 김원술 같습니다)


김유신의 적손 嫡孫 (적자의 정실이 낳은 아들)

김윤중(김유신의 첫째아들 김삼광의 아들)은

성덕대왕(신라 33대왕 성덕왕) 때 벼슬이 대아찬(신라 5등벼슬)에 이르고

여러 차례 왕의 은총(높은 사람에게서 받는 특별한 은혜와 사랑)을 입게되자

성덕왕의 친족들이 그를 몹시 시기했습니다


때는 8월 보름날이었는데

성덕왕이 월성 꼭대기에 올라 경치를 바라보며

시종관 侍從官 (임금을 수행하던 신하를 가리킴)들과 함께

주연(술자리)을 베풀고 즐기면서 김윤중을 불러오라 하니

어떤 자가 간언했습니다


<어떤 자>지금 종실 宗室 (종친 , 왕족) 과

척리 戚里 (임금의 내척과 외척)들 중에 좋은 사람이 없지 않은데

어찌하여 유독 먼 신하를 부르십니까

이것이 어찌 소위 가까운 사람을 친하게 여겨야 한다는

도리에 맞는 것이겠습니까 ?


성덕왕이 말했습니다


<성덕왕>지금 과인이 경들과 함께 평안무사하게 지내는 것은

윤중의 조부(할아버지 , 김유신 장군) 의 덕이다


만일 공의 말대로 그를 잊어 버린다면

선한 이를 선하게 대우하여

그의 자손에게도 덕이 미쳐야 한다는 도리에 어긋난다


성덕왕은 마침내 김윤중에게 가까운 자리를 주어 앉게 하고

그 조부(할아버지 , 김유신)의 평생 平生 (일생) 에 대하여

담론(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논의함) 했습니다


날이 저물어 김윤중이 물러가기를 고하니

(성덕왕은 김윤중에게) 절영산 絶影山 (오늘날 부산광역시 영도 ,

절영도는 말을 먹이는 섬이었고 절영마는 명마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말 한 필을

하사했습니다


이 때 여러 신하들은 서운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왕실쪽 사람들을 우대하려 했던 신하들의 모습은

신라 후기 골품제 , 혈연적[특히 왕실쪽] 인사를 중요시 했다는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으며

신라의 전설적 공신이었던 김유신 가문을 우대하려 했던

성덕왕이었지만 이러한 혈연적 경향에 점차 밀려가는

김유신 장군 집안이었고 그렇다고

무조건적으로 조상덕만 보려 할 수 는 없는 일이고

조상이 훌륭해도 별일없이 지내기만 하면

점점 가문이 몰락한다 할 수 있습니다)


개원(당 헌종의 연호) 21년에

대당(당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권유하기를


<당나라 사신>말갈과 발해가 겉으로는 번신이라 일컬으면서도

속으로는 교활한 음모를 품고 있으므로

이제 군사를 출동시켜 문죄하려 하니

경(성덕왕)도 군사를 출동시켜

앞뒤에서 서로 견제하도록 하라 !


듣건대 옛 장수 김유신의 손자 김윤중이 있다고 하니

반드시 이 사람을 차출하여 장수로 삼으라 !


(김유신의 명성이 당나라까지 알려졌던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동시에 김윤중에게 약간의 황금과 비단을 주었습니다

이에 대왕(성덕왕)이 김윤중과 그의 아우 윤문 등 네 장군에게 군사를 주어

당병(당나라군)과 합세하여 발해를 공격하게 했습니다


(당대 발해로 북진하던 신라군은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도중에 돌아옵니다)


김윤중의 서손 庶孫 (서자의 아들 , 혹은 적자의 소실[첩] 이 낳은 아들)인

김암은 천성이 총민하고 방술 方術 (방법과 기술) 익히기를 좋아했습니다

젊었을 때 이찬(신라 2등벼슬)이 되어 당에 들어가 숙위(황제를 모시는 일)하면서

이따금 스승을 찾아 가서

음양가 陰陽家 (천문 , 역수 曆數 [천체의 운행과 기후의 변화가

철을 따라서 돌아가는 순서] , 풍수지리 따위를 연구하여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사람) 의 술법을 배웠는데

한 가지를 배우면 세 가지를 이해했습니다


(김암은) 스스로 둔갑입성지법 遁甲立成之法 (둔갑술 , 몸을 감추는 방법 같습니다) 을 지어서

스승에게 바치니

스승이 깜짝 놀라서 말하기를


<김암의 스승>그대의 명석하고 통달함이

여기에까지 이른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다


고 하면서 이로부터는 감히 제자로 대하지 못했습니다


(김암은) 대력(당 대종의 4번째 연호) 연간(시기)에

본국(신라)으로 돌아와

사천대박사 司天大博士 (사천박사, 천문박사 중에서 한단계 높은 직위) 가 되었고

양주 良州 (오늘날 경상남도 양산시) ,

강주 康州 (오늘날 경상남도 진주시) ,

한주 漢州 (=한산주, 오늘날 황해, 경기, 충청도 일부지역)

세 주의 태수를 역임하고

다시 집사 시랑 執事 侍郎 (집사부 수장직인 시중이

오늘날 국무총리였고 시랑은 차관급 벼슬이니

행정부 차관급 ??)

, 패강진 浿江鎭 (대동강 지역 군진 軍鎭 ) 두상 頭上 (지방관 , 패강진 장관) 이 되었습니다


그(김암)는 이르는 곳마다 진심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돌봐주며

봄, 여름, 가을 세 계절의 농사 때는 여가(남는 시간)를 이용하여


육진병법 六陣兵法 (문무왕대 아찬[신라 6등벼슬] 설수진이 개발했다는

방어형 군사 병진 으로 '육화진법'이라고도 불리며

군사들이 6개의 꽃잎 모양같이 사열하여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방어했던 수비형 전략이라 하고

'육진병법' 은 원모양의 상당히 방어적인 형태의 한국의 수비형 병법이고

반대로 한국의 공격형 병법은 망치와 모루전술[요즘식 표현으로는 쌈싸먹기] 로

유명한 포위 섬멸 공격법인 조선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 이 유명합니다)


을 가르치니 사람마다 이를 편하게 배웠습니다


<패강진 신라인 1>똑똑하신 김암공이 알려주시니 어려운 병법도

정말 쉽고 편하게 배울 수 있겠는데 ?


<패강진 신라인 2>김유신 장군의 후손이어서 그래 !!


(패강진은 신라의 최북방 영토다 보니 이렇게 군사적 훈련이 있었고

김암이 똑똑해서 사람들이 쉽게 배울 수 있었었던거 같고

당대에도 그에 대한 칭찬을 했다면

'역시 김유신 장군의 후손답다'

라는 칭찬이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일찍이 메뚜기 떼가 발생해서

서쪽으로부터 패강 지역으로 만연(전염병이나 나쁜 현상이 널리 퍼지다) 되어

모든 평야를 뒤덮자 백성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이 때 김암이 산정 山頂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향을 피우고

하늘에 기도하니

갑자기 풍우 風雨 (바람과 비)가 크게 일어서

메뚜기 떼가 모두 죽었습니다


(김유신 장군도 위기때마다 기도를 했다 할 수 있는데

조상을 닮은 김암입니다)


대력 (당 대종의 4번째 연호) 14년 기미에

그(김암)는 왕명을 받고 일본국에 사신으로 갔는데

일본 국왕이 김암의 현명함을 알고 억류(억지로 머무르게 함) 하려 했습니다

그 때 마침 대당(당나라) 사신 고학림이 와서 서로 만나 매우 기뻐하니

왜인들이 이를 보고 김암이 대국(당나라)에까지 알려진 인물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는 감히 억류하지 못하고 돌려 보냈습니다


4월 여름

회오리바람이 뭉쳐 일어나서

김유신의 무덤에서

시조대왕 始祖大王 (신라 최초의 김씨왕인 신라 13대왕 미추 이사금 김미추)

의 능(무덤)에 이르렀는데 먼지와 안개가 자욱하여

사람과 물건을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능지기(묘지기 , 묘를 지키는 사람) 가 들으니

그 속에서 울면서 슬피 탄식하는 소리가 나는 듯 했습니다


혜공대왕(신라 36대왕 혜공왕)이 이 말을 듣고 두려워서

대신을 보내 제사를 드려 사과하고(혜공왕은 김유신 후손

김융이 반란을 일으키자 베어 죽였고 이에 분노한 김유신 장군이

무덤에서 일어났다는 전설이 있고 이에 두려워했던 혜공왕이 사과했던 것입니다)

이어서 추선사 鷲仙寺 (오늘날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었던

신라시대의 절) 에 밭 30결을 주어 명복을 비는 자산으로 삼게 했습니다

추선사는 김유신이 고구려, 백제 두 나라를 평정한 뒤에 세운 절입니다


<김부식>김유신의 현손 玄孫 (손자의 손자 , 고손자) 으로서

신라의 집사랑 執事郞 (집사 시랑이 아닐까 싶습니다

, 집사시랑 執事侍郎 [집사부 수장직인 시중이

오늘날 국무총리였고 시랑은 차관급 벼슬이니

행정부 차관급 ??] )

인 김장청이

행록 行錄 (사람의 말이나 행실을 적은 글로 김유신 장군의 일대기 같습니다)

10권을 지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는 날조해 넣은 말이 아주 많기 때문에

(아무래도 자신의 조상을 높이기 위하여 좀 뻥을 쳐놓은거 같습니다,,)

이를 간추려 쓸 만한 것만을 취하여

전 傳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列傳 을 뜻하는 거 같습니다) 으로 삼는다


<김부식>논평한다

당의 이강이 헌종에게 말했다


<이강>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를 멀리하고

충성스럽고 정직한 자를 등용하며

대신과 대화할 때는 공경스럽고 믿음직하게 하여

소인이 끼어들지 못하게 하며

어진 사람과 어울리는 경우에는 친하게 지내되

예절을 갖추어 불초(못나고 어리석다)한 자가 끼어들지 못하게 하소서


성실하도다 이 말이여 !

이는 실로 임금이 갖추어야 할 요긴한 도리이다

그러므로 '상서' 에서 말했다


<상서>어진 이에게 일을 맡길 때는 의심하지 말며

간사한 자를 버릴 때도 의심하지 말라


신라가 김유신을 대우한 것을 보면

친근히 하여 간격을 두지 않았고

임무를 맡길 때도 의심하지 않았으니

그의 계책은 실행되고

그의 말은 채용되어

그로 하여금 자신의 계책이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원망을 품지 않게 하였다


그러므로 가히 육오동몽의 길함 (육오동몽지길 六五童蒙之吉

무지한 이가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겸손한 태도로 유능한 이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을 어린아이같이 하기 때문에 길하다는 것)


을 얻었다고 할 만하다


그러므로 김유신은 자신의 뜻한 바를 행할 수 있어

중국과 협력하여

삼국(고구려 , 백제 , 신라) 을 합쳐서 한 나라로 만들었고

능히 공명 功名 (공적과 명예) 으로써 일생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고구려)을지문덕의 지략과 (통일신라 해상왕)장보고의

의용 義勇 (정의와 용기)이 있었어도

중국의 서적(책)이 없었다면

그들에 대한 사적(기록)이 없어져서 후세에 알려지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김유신 같은 사람은

온 나라 사람들의 칭송이

지금까지도(김부식님 시대 당시는 고려시대) 계속되고 있다


(김유신은 신라의 정신적 지주였고

삼국은 신라(+발해)로 신라(+발해)는

고려 , 조선 , 대한민국 으로 이어졌고

신라는 그렇게 한국의 원형적 모습을 만들었고

그런 한국에서 오늘날에도

삼국을 하나로 만든 김유신 장군의 영향력은

정말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대부 士大夫 (관료, 선비)가 그(김유신)를 아는 것은

그럴 수 있는 일이거니와

꼴(말이나 소에게 먹이는 풀) 베는 아이나

소 먹이는 아이에 이르기까지도 능히 그(김유신)를 알고 있으니

그 위인이 틀림없이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이 있었을 것이다


- 여기까지가 김유신 하 下 편의 끝입니다 -


<김유신 장군 영정>


<라봉봉>길고긴 김유신 장군 이야기는 그렇게 끝났고,,

그의 삼국통일이라는 전설적인 업적 이외에도

한국사 모범신하이자 말년운까지 좋았던 인물로서

유례가 적을정도로 한국사에서 최고 수준의 대우를 받은 신하였다고 할 수 있고

(대신 유능한 것과 별개로 정감가는 인물같기 보다는

비호감적인 기록들이 꽤있어서 한국사에서는 전설적인 업적과 달리

오늘날 인기는 적은편 같습니다,,)


삼국사기 개인, 일반 사람들의 이야기인 삼국사기 열전 첫 스타트를 끊은 인물인데

열전이라는게 비록 왕이 아닌 일반 사람들의 이야기라

당시의 국제정세나 전체적인 한국사 흐름보다는

개인들의 이야기 , 영웅담 , 여러 이야기들이 주류가 되지만


대신 왕의 기록인 삼국사기 본기는

폭군이던 성군이던 일단 핏줄, 혈연으로 왕을 잇기에

능력과 상관없이 일단 기록된다는 것과 달리

개인, 일반 사람 이야기인 삼국사기 열전은

일단 왕이 아닌 귀족이나 혹은 일반인이 기록에 남겨질 정도면

뛰어난 업적이나 의미있는 이야기등을 남겨야 되기 때문에

이야기의 수준이 높고 흥미진진한, 인간적인 이야기들이 많아

본기보다 열전이 더 인기가 있고 사랑받는다는 이야기가 있다하는거 같기도 하고

하여튼 열전은 국가급 규모의 본기와 달리

올망졸망한느낌도 있어서 뭔가 어지럽거나 보기 어려운 느낌도 있지만

기록 수준들이 기본적으로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렇게 김유신 장군은 신라의 전설적인 인물이자 한국사 위인이고

또 인터넷의 도입등 요즘에는 더 표현들이 직설적이고 재평가가 활발해서

요즘식 표현으로는 '매우 나쁜 남자' 나 여러 욕들도 분명 존재하고

(빛과 그림자가 뚜렷하기도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비판으로는 역시

외세인 당나라를 끌여들여서 고구려 영역을 제외한 불완전한 통일을

했다는 것이고

대신 오늘날 시각이 아닌

'당시 신라'로서는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기도 했다 할 수 있기에

여러 이야기가 있고 또 한국인들은 신라 삼국통일 이후에도

끊임없이 북방으로 진출하려 했고

신라 다음국가인 고려때에는 신라보다 발해의 유민들을 받아들이고

멸망 직전 공민왕때 (아직 조선을 건국하기 전 고려 장수시절의) 이성계는

요동을 잠깐 수복하기도 했고 이후 조선시대에도

세종대왕대 4군 6진 개척이나 대한제국 당시 간도 진출등

여러 북방고토들을 찾기 위한 노력을 했고


그외에 부수적인 비판으로는 죄없는 말의 목을 베고 그것을

지조로 묘사한다거나 ,,(말목자른 김유신) , 근친혼을 했다거나 ,,

장군으로서는 솔선수범을 하기도 했지만 부하들에 대한 잔혹한 모습 등

그냥 나쁜남자도 아니고

매우 나쁜남자(이거도 사실 유화적 표현입니다) ,쓰레기 뭐 이런식의 비판이

있는게 그의 전술 스타일도 잔혹한 모습등이

꽤 있고 단 이런 비판들은 수많은 논란을 예외로 하더라도

일단 삼국에서 '이긴 자' 가 김유신이었기에

'역사는 승자의 기록' 이라는 말 같이

상당히 많은 기록을 남긴 그였고 다소 이기기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인물이라는 느낌도 있지만

그 업적이 한국사의 큰 흐름을 바꾼 너무나도 큰 업적이고

당시 왕실 , 관료 , 백성들에게도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던 그였고

한국사의 전설적인 인물이기에 그는 한국사에서도

비판이 금기시되는 성역적인 위치에 있는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알고있는 어린이 위인전의 위인들도

탈탈 털어보면,, 여러 더러운 이야기들이 꽤 나오는 편입니다,,)


이번에는 다시 기록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면,,

김부식님은 김유신 장군의 이야기를 쓰면서

특히나 신라 왕실이 그를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의심하지 않았음을

인상적으로 쓰셨는데

그 역시 사실 김유신 장군의 어린 시절부터 계략으로

왕실인물 김춘추가 김유신 장군의 여동생과 결혼하게 되어

이미 왕실역시 김유신계가 장악했다 할 수 있기도 하지만

문무왕 역시 현명한 인물이라 아낌없이 김유신을 밀어주었다 할 수 있고

이는 인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것인데

세종대왕이 말씀하신

'인재를 얻어 맡겼으면 의심하지 말고,

의심이 있으면 맡기지 말아야 한다'

라는 말이 떠오르고

지도부의 올바른 신뢰는 구성원들이 더 깊게 파고들며

최상의 성과를 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되며

당대 고려 최고 지식인이었던 김부식님 역시 이런 인사의 중요성을

깊게 느끼고 계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김유신 장군에 대한 못한 이야기들도 있고

기록이 너무 길고 주술스러운 이야기들이 많아서

김유신 장군의 후손이 쓴 그의 일대기 ?? 에도


'여기에는 날조해 넣은 말이 아주 많기 때문에'


라고 김부식님이 말하신 것처럼

그곳에서도 간추려 쓴것이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기록이었을 것임에도

그럼에도 허황된 이야기들도 꽤 있고

뭐랄까 영웅적인 인물에 대한 비난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기록들이 조금 더 짧을 지언정 알차게 알맹이를 꼭꼭 남기면 더

아름다운 기록이 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드는거 같고 ,,

하여튼 한국사의 전설적인 인물이자 여러 논란도 또 존재하고

또 너무 옛날 사람이어서인지 한국사 위인 인기투표에서는

아무래도 이순신 장군보다 밀리는 느낌이라 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아무래도 충직하게 바다에서 나라를 지키셨던 이순신 장군과는 달리

중앙정치계를 장악하고 요즘말로 '정치질'에 매우 능했던 김유신 장군이어서인지

조금 비호감적 이미지도 생긴거 같습니다,,


그러나 전무후무(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음) 한 신라중대의 명장이자

삼국통일의 주역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한국사에서 그의 이름은 매우 중요한 이름으로 남겨지게 되었고


그의 행적과 백성들이 그에게 보내온 신뢰는

삼국지의 제갈량, 제갈공명이 떠오르고

실제로 제갈량같이 군수물자 보급 담당(보급은 쌀배달이라고도 비하되는 이미지가 있으나

군대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이라 할 수 있기에

가장 유능하고 청렴한 인물이 보통 보급을 담당했다고 보여집니다) , 재상직을 지냈다는 점 ,

머리가 매우 똑똑했다는 점 , 왕과 신하와 백성들이 깊게 믿고 의지했다는 점 등

요즘말로 '사기캐' 급의 능력치의 인물이라는 점 때문에

당대 사람들과 오늘날에도 수많은 전설과 이야기를 남긴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응형
Posted by 라봉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