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철종이 사망하고 안동김씨는 왕위에 앉힐 이씨를 찾아나섭니다

조선 25대 왕은 철종 26대왕은 고종입니다 고종의 아버지는 흥선대원군인데요

야사,사람들에게 떠도는 이야기에 의하면 흥선대원군은 상갓집 개라고 불리며

안동김씨 잔치같은데 가서 안동김씨에게 저자세로 나가면서 안동김씨의 눈치를 보며

기회를 노렸다??이런 거라 본거같습니다

90년대 역사책들을 보면 오늘날과 20년정도밖에 차이 안나는거같은데요

해석도 다르고 사실도 여러 다른게 있는거같습니다

옛날 책들은 약간 오늘날보다 더 사실이 부족하고 그런게 있는거같습니다 오늘날은 정보가 발달했고

아 이것은 허구였고 이게 진실같다 이런게 더 활발하게 이야기 되는거같습니다

저가 옛날에 본거로는 흥선대원군이 안동김씨에게 상갓집개라는 멸시를 받으며

기회를 노린 야심가 이미지였던거같은데요

사실은 왕실 사람으로 왕실에서 세자나 이런 사람이아니라 다른 왕자의 후손들을

종친이라고 하는데요 다른 종친들보다 별 문제를 일으키지않고 모범적인 생활을한

종친이었다고하는거 같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원래 흥선군인데요 둘째아들 이명복,고종이 왕이되자

대원군이라는 왕의 아버지 칭호를 받습니다

이런 사례를 방계에서 왕이 되었다고합니다 왕의 아들,세자가아니라

왕실의 다른 후손이 된것인데요 이런 사례가 조선 중기 선조도 있습니다

선조는 명종의 아들이아니라 종친의 아들이었는데요 왕이되자

아버지가 덕흥군에서 덕흥대원군이 됩니다

그러나 덕흥군은 하성군 이균,선조가 왕이될때 사망한 상태였는데요

흥선군은 둘째아들 이명복,고종이 왕이될때 살아있는 상태로 대원군이됩니다

본인은 왕이 아닌데 아들이 왕인거같습니다 고종은 어린상태였고

흥선대원군은 아버지로 조선에서 정치를 하기시작합니다,,

초기에는 여러 개혁으로 인기가 있었던거같습니다

흥선대원군이 궁궐생활이 아니라 궁궐 밖에서 여러 서민,백성들과 만나며

생활해서인지 조선후기 백성들의 고통들을 어느정도 알고있었던거같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서원을 철폐합니다 불교에서 절이 있다면 유교,성리학에서는

서원이 있는거같습니다 고려 후기 절들에서 고리대금업과 스님들이 여인들을

임신시키고 다녔던거같습니다,, 조선후기에는 선비,양반들이 서원에서 세금을 안냈는데요

이에 다른 양반들도 서원에 땅을 맡기는 편법으로 세금을 내지않은거같습니다

또 제사를 지낼때 제사비용을 농민들에게 물리고 폐단이 있었던거같습니다

또 서원을 반대하면 서원에 끌고가 사사로히 처벌했다고합니다,,

이를 말리던 지방관리도 서원에 끌려가 곤장을 맞았다고합니다,,

안동김씨들도 서원의 폐단을 안거같고

서원 사람들도 정부에서 서원을 없애는거를 눈치채는거같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이렇게 말합니다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자라면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옛 성현을 모신다는 곳이 지금 도적의 소굴이 된 지 오래 되었다. 어찌 철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유림들은 흥선대원군 조상 인평대군을 서원에 모시는 방법으로 순간을 모면하려했는데

흥선대원군은 그 묘도 철거시키고 일부 서원을 냅두고 서원들을 철폐시키는거같습니다

이는 서원들에게 향세를 내야하고 그랬던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었고

대원군이 인기가 있던 이유같습니다

그러나 대원군은 왕실 권위를 높이려고,,경복궁을 중건하는거같습니다

원래 경복궁은 임진왜란때 불타없어지고 왕들은 창덕궁에서 산거같습니다

경복궁 중건도 처음에는 무리없이 지어지는거같은데요 문제는

건설 도중에 불에 타버려서 다시지을때 돈을 백성들에게 무보수로

돈을 주지않고 강제 노동을 시킨거같습니다 또

당백전이라는 돈을 발행하는데요,,돈이 부족해지자

국가에서 돈을 찍어냅니다,, 당연히 돈의 가치는 떨어지고 인플레이션이 생깁니다

인플레이션이란 화폐가치가 떨어져 물가가 오르는 현상을 말하는데요

쌀값이 6배 올랐다고합니다 이에 수령,관리들도 세금은

상평통보나 현물로 걷고 정부에는 당백전으로 세금을 냈다고합니다,,

태조 이성계때 지은 경복궁보다 더큰 궁같고 경복궁은 중국 자금성보다

약간 작은정도로 지어지는 무리한 궁궐공사였던거같습니다

조선의 나무들은 경복궁 공사로 베어지는거같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종교탄압을 합니다

이당시 천주교가 조선으로 들어오는 상태였던거같습니다

천주교는 서양종교라 서학이라고도 불린거같습니다

그당시 조상에 제사를 지내는 유교,성리학에서 제사를 거부하는 천주교를

조상에 제사를 지내는 성리학 유림,양반들이 천주교를 반대한거같습니다

이에 서학에 대립되는 동학이라는 종교를 최제우가 만드는데요

흥선대원군때 최제우도 혹세무민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는 죄로 죽입니다,,

흥선대원군 초기에는 천주교 프랑스인 신부들을 이용해서,,

프랑스를 불러서 러시아를 견제하려다 신부들이 거절하자

천주교 신자들과 프랑스인 신부들을 죽이는데요,,

8000여명의 신자와 9명의 프랑스인 신부가 죽습니다,,

이를 1866년 병인년에 일어난 박해라고 병인박해라고합니다,,

이전에도 헌종때도 한국,조선 최초의 신부 김대건 신부가

조선 정부에 사형되는데요 김대건 신부는 중국어,라틴어,프랑스어를 할수있었다고합니다

이에 조선 관리들도 능력이 너무나도 아깝다고 천주교만 버리면 관직도 주고

보상도 주겠다했으나 김대건 신부는 거절하고 사형당합니다,,

사실 그당시 신부나 1950년대 유학생,군인들은 오늘날 기준으로 볼게아니라

그당시 기준에는 조선에 외국어를 할수있는사람이 거의 없었고

매우 중요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던거같습니다 또 새로운 문물을

가져오는 사람들이라 할수 있었던거같습니다,,

군대도 박정희 정부시절까지만해도 나라에 주요 자원,외국 문화들이

있는 곳이었다고 본거같습니다 오늘날에는 해외로 가는거도 자유같으나

그당시에는 국가 법적으로 소수 사람들만 가던 시대였던거같습니다,,

이런시대에 신부들이나 천주교인을 죽이고 그런거는 조선의 근대화를

더 늦게하는 또 조선이 멸망하는 그런 이유였을거같습니다,,

프랑스인 신부들에게도 프랑스를 러시아를 견제하려 끌어들이게 하는게아니라

프랑스와 평화적 교역을 하려 프랑스어와 조선어를 할수있는 그런 신부들과 같이 했다면

조선은 일본에 멸망하지 않았을수도 있었을까요??,,

김대건 신부글을 보니 안타까운거같습니다,,신라 법흥왕때 이차돈이라는 분도

불교를 나라에 공인하려고 스스로의 목을 치게했다는데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순교가아니라 먼저 살아서 종교적 가치를 알려야하지않았을까요,,


1866년 병인년 신부들과 천주교 신자들이 죽고나서 살아서 중국 베이징으로 도망친

프랑스인 신부 이사실을 알리고 이에 같은해 11월

프랑스군대가 조선을 공격합니다 강화도에서 조선군대는

서양의 신기술,총과 대포를 보게되는거같습니다,,

사실 이렇게 병인양요이전에도 이렇게 서구 열강들과 싸우지 않을 기회들이

있었던거같습니다 그러나 조선정부에서 이렇게 신부들이나 천주교인들을 죽이면서

기회를 떠나서 이렇게 서양 강대국을 자극하게 된거같습니다,,

동남아시아의 태국은 이런 서양 강대국들 사이에서도 여러 줄타기 외교를 하면서

주변국가들이 모두 식민지화 되는데도

끝까지 식민지배를 당하지않고 독립국 지위를 유지할수있었던거같습니다

또 일본은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역시 독립국으로 갔고요

그러나 중국은 너무 오랬동안 대국이라는 자만감에 빠져있었던거같고 이를 중화사상이라고합니다,,

한국도 그런 중국에 조공하며 사대외교를 하며 소중화라 했던거같습니다

작은 중화라는 뜻으로 우리도 중국 못지않은 문명국이다 이런 뜻같은데요,,

안타깝게도 그당시 한국 외교도 중국같이 타국,서양 국가를 너무 낮잡아 보지않았나싶습니다,,

기회는 분명 여러번 있었던거같습니다 아쉬운거같습니다,,


병인양요때 강화도에서 프랑스군은 외규장각에서 책들을 배에 가져갑니다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오래된 금속활자본이라는 직지심체요절도 이때 프랑스군대가

가져가는데요 섬에 들어와서 프랑스 군대는 조선 군대를 너무 만만히 본거같고

숨어있던 양헌수장군의 조선군대에게 쫒겨서 섬에서 물러간거같습니다,,

프랑스는 그당시 조선보다는 베트남같은 동남아시아쪽에 신경쓰는 입장이어서

별로 적극적으로 조선을 정복하거나 그러려하지는 않았던거같습니다

직지심체요절같은 문화재를 가져가고 물러난거같습니다


병인양요 이후에도 1868년 오페르트라는 독일,프러시아 상인이 대원군 아버지

남연군 묘를 파해치려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이후부터 계속 서양인들이 조선으로 오게됩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조선,,

기술이 발달하고 그러면서 더이상

조선도 서양 문명들을 피해갈수 없게되었습니다,,

반응형

'근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  (0) 2017.08.16
지옥의섬 하시마섬,군함도와 강제징용  (0) 2017.08.01
조선후기3 흥선대원군2끝  (0) 2017.07.30
조선후기2  (0) 2017.07.29
한국의 근현대사 이양선,조선후기1  (0) 2017.07.28
Posted by 라봉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