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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대 헌안왕은 아들이 없고 딸이 둘있었는데요

왕족 김응렴이라는 사람이 지혜로운것을 알자

두딸중 한명을 결혼시키겠다 했습니다

이에 김응렴은 집에가서 부모님에게 묻자

큰딸은 못생겼으니 작은딸이 낫다하고

김응렴은 계속 망설이다

스님에게도 묻자

언니와 결혼하면 3가지 이익이 동생과 결혼하면 3가지 손해가

있을거라 했다는데요

김응렴은 작은딸,둘째딸과 결혼하는거를 원했던거 같습니다,,

김응렴을 결정을 못하고 왕에게 말하자

왕은 큰딸과 결혼시켰다합니다 김응렴은 48대 신라 국왕 경문왕이 되는데요

경문왕은 왕이되고 3년에 여동생도 두번째 왕비로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님을 다시 만나서 3가지 이로움이 뭐냐 묻자

스님은 첫번째는 왕과 왕비가 뜻대로 된 것(첫째딸을 결혼시킨것??)이

기뻐서 당신에 대한 사랑이 깊어지는게 첫번째 이로움이고

이로 인하여 왕위를 잇게되었으니 두번째 이로움이고

그리고 마침내 처음부터 원하던 둘째딸과 결혼했으니 이것이

세번째 이로움입니다 라고 했다는데요

이에 경문왕은 크게 웃었다고 합니다,,


신라 48대왕은 경문왕 김응렴 입니다

14년 재위하면서 후기신라에서 꽤 무난한 정치를 했다고 합니다

경문왕은 궁예의 아버지라는 설도 있습니다

경문왕은 떠돌아다니다가 어염집(평민) 아낙네를 왕궁에 데려가

궁예를 낳았는데 불길해서 높은곳에서 떨어트려 죽이려다가 유모가 궁예를 받다가

한쪽눈이 실명됬다고 합니다 궁예 아버지 왕은 48대 경문왕이거나 47대 헌완왕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궁예 이야기>


이당시에는 설화가 많은거 같습니다

뱀이 왕궁에왔는데 경문왕은 뱀이 없으면 잠을 못잔다면서 뱀을 물리치지 말라했고

뱀들은 경문왕 가슴을 덮어주었다거나

임금님귀는 당나귀귀 설화도 있습니다

서양에도 있고 원본은

중세 페르시아에 있던 이야기라는데요 신라와 이슬람 상인들의 교역과

관련이 있을까요??

임금님 귀는 당나귀귀 설화는

경문왕이 왕이되고나서 갑자기 귀가 당나귀같이 길어졌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를 모르고 두건만드는 장인만 이를 알고있었다는데요

두건장인은 이를 평생 말하지않았다가 죽기전에

대나무숲에 임금님 귀는 당나귀귀 같이 생겼다! 했다는데요

그후에도 계속 대나무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귀 같이 생겼다라는 소리가나자

경문왕은 이소리를 싫어해 대나무를 베고 산수유를 심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바람이 불면 다만 우리 임금님 귀는 길다!소리가 났다고 합니다,,


신라인들과 교역한 이슬람상인들이 가져가 중세 페르시아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이야기가 전해진것일까요??

실제로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는 고려와 교류한 로마 선교사들에

고려 금속활자가 전해져서 생겼다는 이야기가 있는거 같습니다


49대 신라의 왕은 헌강왕 김정입니다

경문왕의 장자,첫째 아들입니다

경문왕의 첫째 아들,둘째 아들,딸 모두 49대,50대,51대 왕이 됩니다

또 궁예가 경문왕의 아들이라면 경문왕은 4명의 왕 남매를 낳은 왕입니다,,

헌강왕은 혼란한 후기신라의 그래도

왕다운 왕이었던거 같습니다,,(고려의 마지막 왕은 공양왕이나

그래도 정치를 하고 그랬던 왕다운 왕은 공민왕이라는 이야기가 있는거 같습니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이당시 헌강왕 시기에

 “도성 안에 기와집만 있고 초가집은 한 채도 없으며, 노래와 음악 소리가 길에 가득하여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또 숯으로 밥을 짓고 땔나무를 쓰지 않았다.”

이런 기록이 있는거 같습니다


<헌강왕때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서 말한 내용과 같은거 같습니다,,>


이당시 신라 도성,수도에는 그래도 태평성대가 있었던거 같습니다

그러나 신라 후기로 갈수록 지역에서 백성들이 도적이나 지역에서는

성주를 내세웠던거같고 골품제의 모순이 있었던거 같습니다

그래도 헌강왕때 신라 도성내에는 깨끗하고 기와집에 노랫소리가 있는 그런 도성이

생각되는거 같습니다

당나라에서 유학해서 돌아온 최치원이 헌강왕에게 계원필경이라는

한시 문집을 바쳤다는데요 계원필경은 최치원이 저술한것으로

여기에 당나라 황소의 난때 글로 황소를 떨게했다는,,

토 황소 격문이 있고 오늘날에도 계원필경 책은 전해집니다


그리고 고려를 건국하는 태조왕건이 이때 태어납니다

신라가 거의 끝나가는거 같습니다,,


처용가가 헌강왕때 쓰여집니다

<헌강왕 때의 처용가>

동경명기월량東京明期月良 서라벌 밝은 달 아래
야입이유행여가夜入伊遊行如可 밤늦게까지 놀다가
입량사침의견곤入良沙寢矣見昆 집에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각오이사시량라脚烏伊四是良羅 다리가 넷이어라
이힐은오하어질고二肹隱吾下於叱古 둘은 내 아내 것인데
이힐은수지하언고二肹隱誰支下焉古 둘은 누구 것인고?
본의오하시여마어은本矣吾下是如馬於隱 본래 내 것이었는데
탈질량을하여위리고奪叱良乙何如爲理古 빼앗아 간 것을 어찌하리오


헌강왕이 개운포를 지나다 깜깜해지자 이곳에

절,망해사를 지어주는데 이에 용왕이 고맙다며 아들 처용을 바쳐서

서라벌(경주,신라)에서 살게되었다고 합니다

처용이라는 사람은 헌강왕을

보좌하는 벼슬직에 있었고 집에돌아오는데 역신이

아내와 자고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모습을 본 처용은 춤과 노래를 췄다는데요 이것이

처용가입니다,,

그러자 역신이 무릎을 꿇고 아내를 범했는데 노하지 않으셔서

감격해서 아름답게 여긴다고,,

맹세코 공의 모습을 그린 그림만 보아도 그집에 들어가지 않겠다 했다고 합니다

이에 나라 사람들은 처용 그림을 대문에 붙여놓아 사귀(사악한 귀신)를 막는다 합니다,,

아내를 범했는데 범한 역신에게 노하지 않고 춤과 노래로 감복시켰다는게,,

이런게 이후 평화적 사상으로 일제강점기때 평화적 운동 3.1운동으로 간거같습니다,,

3.1운동은 일제의 유혈진압이후 평화에서 폭력으로 갔다는데요,,

3.1운동은 인도 비폭력운동을 하는 간디에 영향을 주었다는 말도 있는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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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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