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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봉봉 어린이 한국역사> 고구려 광개토대왕 이야기입니다


<광개토대왕 어진(왕의 그림),표준영정>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19대왕으로 18대왕 고국양왕의 아들,

고구려의 왕자로 담덕이라는 이름으로 살았습니다

성은 고씨로 고담덕 입니다


담덕은 어렸을때부터 용맹하고 힘이 쎈 아이였습니다

담덕의 할아버지 16대 고국원왕은 백제군과의 전쟁에서

백제군에게 돌아가셨습니다,,(17대 소수림왕은 광개토대왕의 큰아버지로

 이후 소수림왕의 동생,광개토대왕의 아버지

고국양왕이 왕이 됩니다)


용감했던 담덕은 어렸을때부터 활쏘기,검술,무예,말타기등을 익혔고

고구려의 태자가 됩니다


<고국양왕>오늘부로 내아들 담덕을 태자에 봉하노라


<고구려 신하들>예 폐하


<고국양왕>이 자리에서 담덕은 약속하거라

더욱 무예에 힘쓰고 덕을 닦아서

백제와 싸우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고국원왕)의 원수를 갚고

이나라를 외적으로부터 지켜야 한다


<고구려 태자 담덕>네 아바마마!!


그렇게 태자 책봉식이 끝나고 궁궐에서는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담덕은 이에 아버지와 신하들에게 무언가 보일 생각을 하고

잔치가 있던 궁궐을 말을 타고 조용히 빠져나왔습니다,,


어두컴컴한 산, 당시 고구려,한국에는 들과 산에 여러 야생짐승들이 많았고

호랑이같은 맹수들도 살았고 오늘날 한국,남한에서는 멸종했으나

당시에는 들과 산에 호랑이들이 살았기에 밤에 산을 다니는거는

매우 위험했습니다,,


<담덕>아바마마에 대한 답례로 호랑이를 잡아야겠다


그때였습니다,, 산에서 집채만한 호랑이가 나타났습니다,,



<호랑이>어흥 어흥


용맹한 고구려 태자 담덕은 호랑이의 이마에 활을 쏘았고

화살은 정확히 호랑이의 이마에 꽂혔습니다

그러나 호랑이는 화살이 이마에 맞은 상태에서도 담덕에게 달려들었고

담덕은 칼을 뽑아서 달려오는 호랑이를 베었습니다,,

그렇게 호랑이는 죽었습니다,,


<담덕>호랑이야 네가 짐승의 왕이라면,

나는 사람의 왕이 될 고구려의 태자이다


그렇게 담덕은 호랑이를 말 등에 싣고 잔치가 있던 고구려 궁궐로 돌아와서

아버지,부왕과 신하들에게 죽은 호랑이를 보였습니다,,


<담덕>아버지, 보답으로 호랑이를 잡아왔습니다


<놀란 담덕의 아버지 고국양왕>정말 장하구나 태자,

너는 고구려인들을 위하여 하늘이 내려준 인물이 틀림없다


<고구려 신하들>담덕 태자님 만세!! 만세!!


고구려 왕과 신하,백성들은 담덕에 용맹에

덩실덩실 춤을추고 노래를 부르며 기뻐했습니다,,


이는 사실 광개토대왕 위인전 작가가 허구로 지어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담덕의 용맹함과 우리 선조 고구려인의

힘이 넘치는 씩씩한 기백을 보여주는 이야기라 할수있겠습니다,,


그렇게 담덕은 아버지 고국양왕의 사망이후 고구려의 왕이 됩니다

19대 고구려 왕, 당당하게 말을 타고 만주벌판을 달리던 우리 역사상

세종대왕 이외에 대왕이라 불리는 대왕,광개토대왕입니다,,


담덕,광개토대왕은 왕이 되자마자 백제에 대한 복수를 결심합니다,,

먼저 연호를 <영락>이라 했습니다 연호는 중국같은 대국에서 사용하는것으로

우리 고구려도 중국과 대등한 대국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보시면 되고

이에 광개토대왕은 영락대왕이라고도 불립니다


광개토대왕의 일생은 정복,또 정복이라 보시면 됩니다,,

부족 국가였던 고구려인들을 통합해서 영토를 매우 많이 넓혀가시고

비슷한 외국인으로는 인도 아소카왕,그리스 알렉산더 대왕,

몽골 징기스칸,청나라 누르하치 정도가 있고

이후에도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같은 경우도 나타나나 당시부터는 민주주의 사상이

도입되고 전쟁의 위험성을 인류가 본격적으로 인식하게된 시기라 할수있습니다,,

광개토 대왕에게 우리가 배워야 할점은 정복과 전쟁이 아닌

고구려인들을 지켰다는것과 나약해지거나 쉽게 겁먹지않는 용기,

당당한 태도라고 할수있습니다


우리 역사책 <삼국사기>와 우리나라 옛날 역사책들에서는

광개토대왕을

<생이웅위 유척당지지(生而雄偉 有倜儻之志)> 라고 표현했습니다

해석으로는 태어나면서부터 씩씩하고 뛰어나며 대범한 뜻이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중국 초한지에 나오는 초나라 항우의

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운은 세상을 덮을 만하다는 뜻의

역발산기개세(力拔山兮氣蓋世)라는 말이 생각나는거 같으나

항우는 보통 힘은 쌔나 미련한 캐릭터로 그려지고,,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인들을 통합하고 당당하게 말을 타고 만주벌판을

달리는 한국사 위인으로 우리에게 이야기 됩니다,,

물론 중국사에도 중국 영웅 위인들이 있고 항우를 비하하는거는 아니나

초기에 압도적이었던 힘과 인재들에 비해 인망이 없었던 항우였고

인망이 있던 시골 농민 유방에게 중국(중국인들은 이를

자국 중심 사관,중화주의로 천하라고 표현했습니다)을 내주게 됩니다


광개토대왕은 즉위 2달만에 4만 고구려군을 거느리고

직접 백제를 공격해서 백제의 성들을 함락시킵니다,,

이후 군사를 북방으로 돌려

직접 유목민족인 거란족을 공격하고 정벌합니다,,


다시 오랜 원수였던 백제를 공격했는데요,,

백제인들은 요새화된 성인 관미성에서 버티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일반 성에 비해 군대를 막기위해 험준한 지형에 자리잡거나

높게 성벽을 쌓거나 무장을 더해서 요새화 시킨 성들은 함락하기가

매우 까다로웠다고 할수있습니다,,

관미성은 주변은 바다로 되있는 천연요새화된 성이었고

해상강국 백제의 해상교통로이기도 했고

배를 만드는 조선소가 있던곳이었기에

백제로서는 반드시 지켜야할 매우 중요한 성이었습니다



광개토대왕은 거란을 정벌하고

다시 백제로 군대를 이끌고 관미성에 이릅니다,,

관미성은 사면이 가파른 높은 산위에 바닷물이 에워싸고 있던,

견고한 성벽이 있던 요새였습니다,,


<광개토대왕>듣던대로 천연의 요새화된 성이구나


<고구려 장군>함부로 공격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좋은 계책이 필요합니다,,


<광개토대왕>나에게 좋은 생각이 있소


광개토대왕 고구려군은 요새화된 성의 절벽을 기어올라 공격했으나

다시 물러나기를 반복했고 대규모 공격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후에도 고구려 군은 성을 포위한 상태였으나 백제 역시 해상강국에

요충지,요새였던 관미성은 쉽게 함락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군들을 철수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에 백제군들은 승리에 도취되어 방심하고 잔치를 벌이며 성문을 열었고

광개토대왕은 결국 열린 성문에 모든 고구려군을 7갈래로 나누어 총공격끝에

관미성을 공격 20일만에 함락시킵니다,,

관미성이 함락되고 관미성 전투에서 살아남은 백제군이 도망쳤습니다


<고구려 장군>폐하 패잔병들을 남겨두면 후환이 있을수 있습니다

끝까지 추격해서 죽여야 합니다


<광개토 대왕>저들은 패잔병이다 병사이기전에 백성이며

함부로 백성들의 목숨을 뺏어서는 안된다

우리 고구려 군사들에게 패잔병은 물론 관미성의 백제 백성들에게

조그만한 피해조차 입히지 말라는 군령을 내려보내라

특히 백성들의 재물을 빼았거나 여자를 희롱하는 자는 엄벌에 처할것이다


<고구려 장군>역시, 태왕 폐하이십니다


고구려의 장군들은 전투 와중에서도 평정심을 잃지않고

백성들의 안위를 생각하던 젊은 군주 광개토대왕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한국 고대역사에서 관미성 전투는 신라와 백제의 국가의 명운을 걸고 싸웠던

황산벌 전투와 같이 한국사에서는 중요한 전투라 할수있습니다

천연 요새였던 관미성이 광개토대왕에게 

밀리면서 백제는 멸망의 길로 가게되고 이후 개로왕때에는

고구려군에 수도 한성이 뺏기자 일본 역사서에 표현으로는

백제는 멸망했다는 표현이 있을정도입니다,,

이후 백제인들은 겨우겨우 부흥운동,중흥에 성공하나 황산벌 전투로 백제는

멸망합니다,,


백제의 요충지였던 관미성이 함락되자 백제인들은

국가 멸망위기가 됬고 옛날 광개토대왕의 할아버지,

고국원왕때에 평양성까지 올라가서 고국원왕을 죽인,,

백제의 군주 근초고왕과 용맹한 백제군은

더 이상 없었다고 할수있었습니다,,


백제 정치계에서는 여러 혼란이 있었고

관미성 함락 이후 백제 진사왕은 암살당합니다,,

이후 백제의 왕은 부여아신이 물려받아 아신왕이 되는데요

일본기록에는 아신,일본이름으로는 아화가

반란을 기획해서 진사왕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라의 요충지는 광개토대왕에게 뺐기고 내부에서는

왕이 암살당해 교체된 백제는 매우 혼란의 시기를 겪게됩니다,,

진사왕을 죽이고,, 백제왕이된 아신왕은 광개토대왕에 설욕으로

백제 진무 장군과 백제군에게 다시 관미성을 공격하라 합니다,,


<아신왕>관미성이란 곳은 우리 북쪽 변경의 요충지다

지금 고구려가 가진 바 되었으니, 이는 과인이 분하고 슬퍼하는 바로,

경(진무 장군)은 마땅히 마음을 써서 설욕하라! (삼국사기 아신왕 2년)


이에 진무 장군은 백제군 1만을 거느리고

몸소 병사들보다 앞장서서 고구려에게 뺏긴 관미성을 공격하나

고구려군의 반격과 식량 수송의 차질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이후에도 백제군의 공격에 광개토대왕은

직접 고구려 군을 이끌고 나서 백제군 8000명의 목을 벱니다,,

이후에도 친히 고구려 수군(해군)을 거느리고 백제의 58성을 빼았으나

아신왕이 계속 패배를 인정하지 않자 분노한 광개토대왕은

직접 아리수를 넘어서 아신왕과 백제인들을 항복,굴복시킵니다,,


이후 다시 서쪽,북쪽으로 간 광개토대왕의 군대는 후연,중국을 공격해

요동을 확보합니다 요동은 고조선대부터 이어온 우리 민족의

고유의 영토로서 고구려 언어,고구려식 표현으로는 다물,

옛땅을 되찾은 의미라 할수있습니다


<광개토대왕의 요하도하라는 민족기록화로

우리나라 우표로도 나왔습니다 요하를 건너서

다물,옛땅을 회복하려는 한국인들의 선조,고구려군입니다 오늘날에는

만주와 중국 동북부는 중국의 영토로 되있고 고구려땅이었던 북한도

현재는 남북이 분단된 상황입니다,, 중국인들도 이에 민감하나

우리의 역사이고 우리 한국인들의 땅이었던거는 진실입니다,,>


다시 이번에는 군대를 동쪽으로 돌립니다,,

동북쪽의 숙신족을 공격해 정복합니다 ,,


즉 광개토대왕은 즉위 후부터 동서남북 할거없이

직접 고구려군을 이끌고 출정을 나서고 모든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한번도 진적이 없다는 것에 한국의 임진왜란때 성웅이라 불리시는

이순신 장군이 생각나는거 같습니다,,

중국 병법의 고전,손자병법의 유명한 문구로는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있습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로

광개토대왕 스스로의 대범,담대한 리더쉽과 무예실력이 있었고

광개토대왕은 소수림왕때부터 시작된 중앙집권 정치와

강력한 고구려 철제무기를 바탕으로 고구려인들을 통합하고

동,서,남,북 할거없이 모든 장소에서 승리를 했다고 할수있습니다

물론 과거와 우리 인식,역사속 이야기이고

현실에서 전쟁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광개토대왕은 그렇게 동,서,남,북을 정벌,정복하며 영토를 넓히십니다

이후 고구려에 항복한 백제는 약속을 어기고

가야,왜(일본)와 연합해 신라를 공격했는데요,,

신라(신라 내물왕때)에서 구원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내자 광개토대왕은

남쪽에 5만 고구려군을 보내서 왜군을 물리쳐서

신라인들을 구원합니다,,

저는 이당시 왜 광개토대왕이 신라와 백제를 멸망시키지 않았나라는

생각을 한적도 있으나 오늘날 사람들의 의견으로는

당시에는 백제나 신라역시 만만한 나라가 아니었고

멸망보다는 차라리 주요 농산물이 나는 한강유역같은 유역을

점령하는게 실익이 나았다기도 하고 고구려는 남쪽에

백제,신라 이외에도 동,북쪽에는 유목민세력들,

서쪽에는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기에

함부로 공격하고 정복하기 까다로웠다는 이야기도 있는거 같습니다,,

실제로도 신라 역시 약체국가였으나 성인(박혁거세)의 나라라고도 하고

만만한 대상은 아니였습니다,,


대신에 고구려군들은 이후부터 신라의 내정을 간섭하게되고

그렇게 나타난 주요 유물로는 <호우명 그릇>이 있습니다

호우명 그릇은 신라 고분,무덤에서 나온 고구려 그릇으로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광개토대왕의 제사용 그릇으로

당시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영향력을 확인시켜줄수 있는 유명한 유물입니다,,


이후에도 왜는 고구려를 공격하나 광개토대왕에게 궤멸당합니다,,


이후 중국,후연에서 고구려 요동을 공격해옵니다

요동성은 후연군에 함락당할 위기까지 갔으나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끝내 성을 지켜내고 이일 이후 후연의 왕은 백성들의 신임을 잃고

살해되어 후연은 멸망합니다,,


이후 왕자 거련(장수왕)을 태자로 삼고 동쪽의 동부여를 정벌합니다,,


<광개토대왕의 정복로로 동서남북을 정복하십니다,,>


광개토대왕은 그렇게 동서남북 정벌에 내치도 훌륭히 하셨으나

동부여 정벌을 마지막으로

과도한 정복전쟁과 과로등으로 39세의 젊은나이에 사망하십니다,,

광개토대왕의 아들,태자 거련,장수왕이

세운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이렇게 기록되있습니다


<광개토대왕릉비(비석)>


二九登祚、號爲永樂。太王恩澤洽于皇天、威武桭被四海。掃除不□、庶寧其業、國富民殷、五穀豊熟。

昊天不弔、卅有九、宴駕棄國、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遷就山陵。

18세에 등극하여, 호를 영락(永樂)이라 하였다 태왕의 은택(恩澤)은 황천(皇天)에 미치고, 위무(威武)는 사

해(四海)에 떨쳤다. …지 아니한 것을 쓸어버리자, 사람들이 그 업에 편안히 하게 되었으니,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은 은성하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하늘이 돌보지 않아 39세에 나라를 버리고 편안히

떠나시니, 갑인년 9월 29일 을유에 산릉으로 옮겨 모셨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천제의 아들이라는 동명성왕 이야기도 있고

이는 광개토대왕 역시 하늘의 후손이라는거를 강조하려는 뜻이라고 합니다

광개토대왕 당시 고구려인들의 국력과 자신감은 최고조에 달했고

명실상부 동아시아의 강대국이었다고 할수있습니다

전통적이고 문화대국에 워낙 자원과 영토,인구가 많은 중국도 있었으나

우리 역사에서 가장 강했던 시기라 하면 보통 광개토대왕,고려 문종,세종대왕때 정도라

할수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통계적 지표로만 보면 될게아니라 중국은

옛날부터 꾸준한 문화 선진국이었기에 군사력이 낮아도 주변 이민족에게

돈을 뜯기는 와중에도 형노릇은 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너무 젊어서부터 계속된 전쟁과 과로등으로

광개토대왕도 알렉산더 대왕같이 젊은 나이에 사망하십니다,,


광개토대왕이 살아생전 한 유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죽은 뒤에 내 묘지기는 내 친히 돌아다니며 잡아온

한(韓)인과 예(穢)인들에게만 맡겨서

무덤을 지키고 소제(청소,무덤 관리)하게 하라


알렉산더 대왕의 유언은 천하의 알렉산더도 빈손으로 간다라는 이런 유언으로

허탈함이 있는 유언이 있는데요,, 돌아가시면서도 두분다 성격은 다르시나

정복과 관련된 유언을 남기신거 같습니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이렇게도 써있습니다,,


묘를 지키는 이는 이제부터 서로 팔아 넘겨서는 안 되고,

부유한 이라 할지라도 또한 함부로 사들여서는 안 된다.

만약 이 법령을 위반한 자가 있으면, 판 자는 형벌을 받을 것이고,

산 자는 자신이 묘를 지키도록 하라


고구려 19대왕 광개토대왕의 연호는 영락永樂 입니다

영원한 즐거움이라는 뜻으로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이 나타나있습니다

광개토대왕의 당당함과

중국과도 대등한 관계였다는것을 보여주는 연호입니다

중국은 황제를 천자天子라고도 해서 하늘의 아들이라는 뜻과

중국 중심사관이 있었고

고구려도 주몽의 천제의 자손,천손의식이 있었던 나라입니다

또 광개토대왕의 정식명칭은 사실 광개토 대왕이아닌

큰대자가 아닌 클태자를 써서 광개토 태왕입니다

이는 광개토대왕릉비에도 태왕이라나오고

호우명 그릇,중원 고구려비에도 태왕이라고 나오고 당시에는 태왕이라 불렀고

이는 광개토대왕,광개토태왕의 자신감을 보여주는 명칭이라 할수있습니다,,


광개토대왕은 살아서는 영원한 즐거움 영락,죽어서는 땅을 넓게 넓혔다는 의미로

광개토대왕으로 불리는 한국사의 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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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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