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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최저임금이 오르고나서 알바하는곳에서

오히려 부당한 대우를 받게되서

잠시 매우 화가 나있었던거 같습니다

어저께~오늘 사장님과 노사타협이 원활히 되어서

저는 올해부터 더 많은 월급과 근로계약서,보험가입 등을 받게되었고

야간 편의점이긴 해도 현재 블로그도 하며 이중으로 돈을 벌고있고

뭔가 9급공무원 안부럽게 사는거 같습니다,,

저가 지어낸 말이나 편무원이나 편물주 이런 말이 떠오르는거 같습니다

편의점 점주님의 후려치기를 무사히 방어해냈고

노사타협이 잘되서 다시 지옥에서 천국으로 가게된 기분입니다~~,,

사실 법적으로 안주면 신고하면 끝나는 일이나

(신고는 함부로 하면 안되고 최후의 수단이 되야되는거 같습니다)

몇십년 전에는 그런거도 없었고 노동자는

어찌보면 기계만도 못한,, 거의 부속품 취급을 받고 일을했다고 할수있습니다

저는 민주화 운동당시 폐해도 있었기에

민주화 운동가분들의 모든게 ㄱㅊ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는데요,,

오늘날 저같은 20대 알바생도 적합한 대우를 받게해주셨고

직접 피부로 느낌으로서

노동법이 시행될수 있게한 민주화 운동가분들이

감사하게 느껴지는 오늘 같습니다


오늘은 대한민국 노동자들의 영원한 친구,

노동운동가 전태일 열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몇개월전에 동대문 옷시장을 간적이 있습니다

밤에 갔는데 불야성이라는 말이 있는거같이

밤에도 정말 수많은 가게와 사람들이 옷을 사고 팔고있었습니다

전국,외국에 팔려나갈 옷 모음 가방들이 도로에 차례로 줄서있었고요

그러다 평화시장 간판을 보고 전태일 열사가 생각났습니다

(열사라는 호칭이 약간 북한에서 쓰는거도 같으나

사실 저 어렸을때 책에도 유관순 열사부터 독립운동가분들도

열사,의사라는 호칭이 많습니다)

전태일 열사는 박정희 정부때 평화시장에서 의류 노동자로 일했으며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외치시며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라이터로 불을 붙여 분신자살을 하시는 분입니다,,

저는 자살 반대자이고

솔직히 꼭 이렇게 까지 해야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로인해 한국사회에서

노동문제를 중요하게 인식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이로인해 한국 노동운동은 시작하게된다고 할수있습니다

오늘날 알바몬,알바천국 같은 사이트에서 알바를 구해서 하실때에도

최저임금이나 주휴수당,노동 법적 보호들 받게된 계기가

전태일 열사로 인해서라고 할수 있습니다

서울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상 바로 오른쪽,미국 대사관

바로 왼쪽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을

가시면 거기에 전태일 열사,평화시장 의류 재단

재현장소가 있던거로 기억하는거 같습니다

그러면 영원한 노동자들의 친구 전태일 열사 이야기입니다


<영원한 노동자들의 친구 전태일 열사 이야기>


시기는 1960년대 박정희 정부,군부정권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5.16 군사정변으로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군인들을 동원한 방식으로 정권을 잡았고

부족한 도덕성에서 국민들의 눈을 돌리기위해

경제 제일주의를 내세워서 온 국민이 경제개발에 나서서 성실히

일하던 시기라 할수있습니다

당시 국민들도 박정희 정부의 비도덕은 워낙 가난했기에

어느정도 눈감아주기도 했고 실제로 한국 경제의

기초산업들이나 주요 산업들이 이당시 진행되어서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 대통령이라고도 불리고

오늘날 노인분들 중에서는

당시에 대한 향수를 가지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실제로도 저도 박정희 대통령은

유능한 대통령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 인권유린과 국민 감시,탄압이 있었고

노동자들도 당시 기계 부속품같이 수많은 장기 노동시간,

저임금등의 문제가 있었고 한국 경제의 기적이라는

한강의 기적은 이런 노동자들의

고난과 수난속에서 이루어졌다고도 할수있습니다


당시 청년 전태일이 일하던 동대문 평화시장,의류시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한국은 오늘날같이 중화학이나 반도체같은 첨단 산업이 아닌

가발,의류 공장같은 경공업이 국가 경제에 중요한 산업이었고

이는 오늘날 동남아시아나 개발도상국에서 보여지는것과 비슷하다고 할수있습니다

이런 경공업부터 자동차,조선,중화학공업으로 그리고 반도체나 원자력 발전같은 첨단산업순으로

한국 산업은 발달해왔다고 할수있습니다


다시 전태일 열사 이야기로 돌아가서,,


전태일 열사는 대구에서 태어났고

어린시절 매우 가난하게 자라서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17살에 서울로 상경해서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재단보조로 일하게됩니다


<전태일 열사 사진>


당시에는 재단보조를 '시다' 라고 불렀는데요

시다는 일본어 시타바리에서 나온 뜻으로

일본어 뜻은 '그런 일을 하는사람' 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한국 표현으로 '내가 니 시다바리가?' 라는 영화 친구의 명대사가 유명합니다

즉 보조,견습들을 당시 일제강점기가 얼마 안끝나고나서

노동,산업계에서는 특히 일제의 영향으로 일본어가 많이쓰였습니다

한국어 순화운동??등으로 오늘날에는 사라지나

저가 어렸을때는 이쑤시개를 요지,어묵을 오뎅이라 했고

오늘날에도 노가다,건설업계에서는 공구리(콘크리트)등 일본어가 꽤

쓰인거로 본거 같습니다


전태일 열사는 그렇게 재단 노동자로 일하며

여러 열악한 현실을 직접 경험하고 느끼게 됩니다

한국 1960~80년대 노동 현장은 매우 열악했고

전태일 열사에 의하면 평화시장 의류 노동자들은 하루 14시간씩 한달 2번씩 밖에

쉬지 못하는상태에서 일했고(오전 8시부터 오후10시까지,,)

열악한 노동현실에서 눈에 이상,위장병,신경통 등을 앓고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평화시장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노동계에서 만연했던 풍조라 할수있고

사실 선진국이라는 서구권,유럽도 산업혁명 초기 이렇게

아동노동은 기본에,, 아이 어른 할거없이 15시간씩 일하다 죽어나가고

이때부터 노동운동과 공산주의가 나타나게됩니다,,


이런 경험에서 전태일 열사는 노동문제를 인식하게되고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됩니다

그래서 근로기준법 책을 구해서 보았으나

당시에는 법서적,책이 한자로 써있어서,,

전태일 열사는 읽기 어려웠으나

해설서나 동네 대학생에게 찾아가서 부탁하며 어찌어찌 읽어내십니다,,


<라봉봉>당시에는 신문이나 이런 주요 서적,법책들이 한자가 매우 많았던 시대였고

이에 한겨례신문이 창간되며 순한글 표기를 표방한거를 인상적으로 본거같습니다

오늘날에는 당연시 된거고 한겨례신문도 은근 논란이 있으나,,

이렇게 모두 다르거나 신선한거는 저도 의의가 있는거 같습니다


그렇게 근로기준법전을 해독??,,하신 전태일 열사는

현실과 법의 괴리가 크다는거를 인식하시고

노동문제에 '바보회'라는 노동조직을 만드십니다


<전태일 열사의 바보회 명함>


만들 당시 바보회라는 뜻의 의미에 대해 전태일 열사의 말은,,


<전태일>노동자들도 당당하게 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며 살 권리가 엄연히 있는데도

여태껏 기계취급을 받으며 업주들에게 부당한 학대를 받으며

찍소리도 한번 못하고 살아왔기에 우리 재단사들의

모임은 바보들의 모임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철저히 깨달아야만 우리도 바보신세를 면할수 있습니다


오늘날로치면 일종의 노조같은거 같습니다

이런거 보면 누구는 역사로 이런 사람들을 기록하고

누구는 언론으로 이런 문제들 알리고

누구(전태일 열사)는 노동자로 일하며 근로기준법전을 읽으며

노동문제에 힘쓰는거를 보면 세상이 정말 신비롭다는 생각도 드는거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 하나하나가 어찌보면 미약한 힘이라도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생각이 드는거 같습니다,,

하루 수많은 시간을 일하시며 밤새 노동 법전을 해석하시는

초등학교 중퇴의 노동자 전태일 열사는 자신이

한국 사회,세계 노동운동에서 중요한 영향을 끼치셨다는거를

아셨을까요??,, 정말 세상은 신비롭습니다,,


그리고 전태일 열사는 빚을 내어 어머니에게 부탁해

근로기준법 해설서를 사서 읽게되나

애초에 법학을 전공하는 대학생들을 위한 해설서였고

한자로 된 책을 책과 씨름하듯이 근성으로 읽어나갑니다

책은 어려웠고 전태일 열사는 입버릇같이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원이 없겠다고 하셨다고 합니다 당시 대학생=지식인,한자를 잘아는 사람

이런 이미지가 있었던 시대라 할수있는거 같습니다

1960~80년대 민주화운동,학생운동도 대학교에서 주도하거나 중요시됬습니다


그렇게 근로기준법 책을 읽다가 흥분하며

옆에서 주무시던 어머니를 깨워서 읽을것을 권하기도 했습니다


<전태일 열사>어머니!! 이걸 읽어 보세요

노동자들도 법적으로 보호를 받을수가,,


<전태일 열사 어머니>그거 안다고 돈이생기나 밥이생기나?


<전태일 열사>어머니도 지금 꼭 알아두셔야지,

안그러면 나중에 후회할지도 몰라요!!


그렇게 근로기준법 책에서 중요한거는 메모를 하기도하고

이해가 깊어지며 전태일 열사는 바보회 회원이나

주변 여공,새로 사귀는 친구들에게 기회가 있을때마다

근로기준법 이야기를 하며 현재 받고있는 대우가 얼마나 부당한것인가를

설명하고 다니십니다

그러다 바보회 창립 얼마후 직장에서 해고당하셨다고 합니다,,

어찌보면 당연히??,, 전태일 열사는 당시 자본가,사장들에게 찍히게되고,,

업주들 사이에서 위험분자로 소문이 납니다,,

다시 일을 하려해도 시장 어느곳에서도 그를 받아주려하지 않았고

자본가나 사장들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고 실력이 있다면 

굳이 안그래도 되는데 고의적으로 노동운동 이력 때문에

취업이 안됬다면 그만큼 당시 경제계가 심각하게 부패되있다고 볼수있습니다

(실제로 당시 이렇게 노동자들 착취한 돈으로 정치권에 뇌물을 바치며

정경유착을 형성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경제민주화는 중요한 정치적 이슈로

4차 산업혁명 못지않은 중요성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돈벌고 일하는게 더 잘먹고 잘살고 하고싶은거를 하려하는것이지

건강을 잃어가고 죽어가며 노예가 되려 하는거 아니라고 생각을 한거 같습니다,,

사장이던 직원이던 경제 민주화가 되던 4차 산업혁명으로 로봇,무인기,일자리가 대체되던간에

평소 정직하고 원칙에 어긋나지 않고 떳떳하게 일하고 기업을 운영한다면

전혀 문제가없고 오히려 더 이익을 볼수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당시 평화시장 업주들이 전태일을 위험분자로 인식,속어로는 찍었다는거는

그만큼 찔리는게 많고 부패했다는거를 보여주는 사례같습니다

평소 떳떳하게 운영하면 전태일같은 노동자가 근로 기준법을 외치고 다녀도

별 문제될게 없을거 같습니다,,


그렇게 해고당한 전태일은 여러 노동을 전전하기도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평화시장내에 노동실태 조사 설문지를

업주들 몰래 돌리기도하고,,

본격적인 노동운동을 시작합니다


<전태일 열사가 평화시장에 돌린 설문지>


당시 실태에는 전태일의 임금은 2만 3000원이고

다른 노동자들도 비슷한 돈을 받았다는데요(견습공은 1500~3000원이라고 합니다,,)

이는 당시 남교사월급이 평균 3만7000원,

남기자가 22700원정도였던 시대에 정말 낮은 월급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보기에도 평균 2~400백만원 정도 받고 일하는

당시 의류 노동자 분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로인해 왜저래 할수도 있겠으나 문제는

일의 양과 질적 문제도 따지지 않을수가 없는거 같습니다,,

공사장 노가다 10시간일하며 한달 300받아가는 분과

평범한 사무직 250 받아가는 분이 50을 덜 받더라도

복지나 고용안정성,근무시간,강도등이 사무직이 더 낫다면

50을 더받아도 일은 더 힘들수 있는거 같고

대표적인 사례가 자동차공장입니다,,

오늘날에도 현대자동차 노조나 자동차공장은 파업이 많기로

유명한데요 그렇다해서 자동차 공장이 월급이 낮은거도 아닙니다

미국 포드자동차도 창립자 헨리포드 사장이 살아있을때

대파업은 유명합니다 헨리포드의 포드자동차는

당시 업계 일당 1.75달러 받을때

5달러를 주는 최고임금에

주 5일제를 세계최초로시행한 회사였으나

그런데도 근무 강도가 워낙 쌔서 파업이 일어나자

헨리 포드가 마피아를 시켜서 기관총으로 실탄을 사격합니다,,

(최초의 현대인이라 할수있는 포드가 선례를 잘못남겨서

현대 노동운동도 수난을 당했던거 같습니다,,)


당시 포드공장 미국인들의 파업원인은 즉 돈의 문제가 아니었고

인간의 부속품,기계화와 강한 노동강도가 문제였고

이렬경우에는 차라리 월급을 줄이더라도 사람을 더뽑거나

일강도를 낮추며 경영을 해야 지속가능한 개발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드는거 같습니다,, 결국 헨리 포드도 아내 클라라가

이대로가면 회사는 망하고 당신은 맞아죽을거라며

고집을 피우면 당신과 갈라서겠다는

최후통첩에 노조를 승인하며 끝나게 됩니다,,

이렇게 1910년대 미국사회가 겪었던 진통,과정들을

한국 1960~70년대 청년 전태일과 평화시장 노동자들도 똑같이 겪게됩니다

또 결국 대한민국은 민주화되고요,,

이런거 보면 선진국이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게 아닌거같고,,

앞으로 개발도상국들도 어느정도 경제발전이 되고나면

한국같이 차례로 민주화 운동,민주화가 시작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옛날에 본 이집트 왕자 애니메이션에서

모세가 파라오인 형에게 유대인들을 풀어줄것을 요구하며

개구리와 질병들을 보내며 백성들을 풀어줘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어! 라는 노래가 나온게

떠오른거 같습니다,, 신이 있다면 모두가 신의 자식들이기에

어느 누구도 노예가 되거나 못사는거를 원치 않으실거 같습니다,,


이렇게 평화시장 재단 노동자들도 결국 임금은

꽤 쎗으나 문제는 당시 아침 8시부터 밤10시까지

하루평균 14~15시간의 한달에 2일만 쉬는 노동에

1.5m 높이 좁은 다락방에서 일을 하던 매우 열악한 환경이었고

전태일이나 평화시장 노동자들이 받은 2만원을

당시 기자나 교사가 받은 2~3만원과 동일시하면 안되는거 같습니다,,

15시간씩 한달에 2번밖에 못쉬고 일을하면 언제 쉬고

개인의 여가생활은 누릴수없고 말그대로 노예와 다름없습니다

먼저 8~9시간은 수면시간으로 해야 건강에 지장이 없을것인데

이러면 진짜 잠만자고 일만하라는거고 당시 노동자들은

이런 열악한 노동환경에 위장통,신경통,눈에 이상들이 생겼다는데요

안생길수가 없는 환경이었다고 할수있습니다


<청계천 평화시장 봉제공장 사진으로

열악한 노동환경을 보여줍니다,,>



당시 전태일 열사는 평화시장 노동자 실태 설문조사를 하고

동대문 구청에 가서 열악한 환경에 대해 말했으나

받여들여지지 않았고

시청 근로감독관실,노동청에도 갔으나 역시 마찬가지였고

당시 감독관청에서는 알겠으니 조금만 기다리라했고

전태일 일행이 몇일뒤 갔더니

'감사가 끝났으니 이젠 알아서해라 이 빨갱이 새끼들아'

라는 대답을 들었다고 합니다,,

아 갑자기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이거도 지강헌 인질극 사건,

1980년대 한국 현대사 유명사건으로 나중에 써야될거 같습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달라 호소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자

전태일은 이에 비애를 느끼고 결국 가지 말아야할,

죽음으로 그 뜻을 알리는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전태일 열사는 평화시장 뒷골목에서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친구에게 불을 붙여달라 말하고 그렇게 죽어가시며 불속에서 외치십니다,,


<전태일>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중에서 입니다,,>


전태일 열사는 불길에서 바로죽지는 않으셨고,,

병원으로 옮겨지셨으나 병원에서 돈이없어 거부당하고,,

당일 저녁에 화상입은 상태로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게 어머니 내가 못 다이룬일을

어머니가 이뤄주세요 라는 유언을 남기시고 사망하십니다,,

전태일 열사가 돌아가실때 그의 나이는 22세였습니다,,


전태일 열사의 죽음으로 반독재,민주화만을 염두해두던 지식인,대학생들은

노동자,도시 빈민문제에도 주목하기 시작했고 진정한 민주화가 시작되게

되었다고 할수있습니다 경제발전과 민주화는 대립하거나

연관이 없는 관계라기보다 경제발전이 되야 민주화 요구도 생겨나고

민주화가 되야 경제도 더 발전하게 된다고 할수있는거 같습니다,,


대학생들은 야학,야간학교를 만들어 노동자들을 교육하게되고

당시에는 고급두뇌,엘리트라 여겨지고

수도 적었고 안정적인 미래가 보장됬던 대학생들은 기업,공장들에서는

아예 대학생들이 취업을 막아놨으나 위장취업을 해서 노동자들의

실태를 파악하게 되게 됩니다

저가 15살때 당시 DMB핸드폰이 생겨서,,

우연히 핸드폰으로 KBS에서 밤에 티비문학관이라는 프로그램에

외등이라는 문학드라마가 나온거를 봤습니다

1980년대 경찰들이 몽둥이 들고 공단가서 노동자들을 두두려패고 탄압하는데요,,

전태일 열사가 박정희 정부때 사망하고나서

노동인권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됬다면

외등의 배경이되는 1980년대 전두환 정부부터는

노동,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

극에 달하던 시대라 할수있습니다

결국 전태일 열사나 민주화운동가들로 인해

매우 소중한 가치 민주화,대한민국 민주화를 이뤄내셨고

젊은 세대는 그로인한 과실과 혜택을 보고있는것입니다

민주주의는 한번 이루어졌다고 끝나는게 아니라 우리가 현재에도

소중히 지켜가야 하고 다음 세대에도 이어가야하는

매우 중요한 가치,사상이라 할수있습니다

우리도 전태일 열사의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유언같이

현재 사회의 부당한 문제들에 굴복하거나 노예가 되지않고

당당히 맞서가야 하는 사람이 되야합니다,,


이외에 전태일 열사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셨다고 합니다,,


<편지 원본>


<전태일 열사의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요약>

대통령 각하,·····저는 서울특별시 성북동 쌍문동 208번지 2통 5반에 거주하는

22살의 청년입니다.·····저의 직장은 동대문구 평화 시장으로서 종업원은 3만여 명이 됩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근로 기준법의 혜택을 조금도 못 받고 있으며·····일반 공무원의 평균 근무 시간이

1주 45시간에 비해,15세의 어린 시다공은 1주 98시간의 고된 작업에 시달립니다.·····저희들의 요구는

·····1일 15시간의 작업 시간을 1일 10시간~12시간으로 단축해 주십시오.1개월 휴일 2일을 늘려서

일요일마다 쉬기를 원합니다.건강진단을 정확하게 하여주십시오.·····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편지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해지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루 10~12시간도 많은데 이거를 바랬다는거는 당시 노동환경이

매우 열악했다는것을 보여준다고 할수있겠습니다,,


서울 평화시장을 가면 이렇게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장소에 표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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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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