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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왕 이야기는 매우 깁니다,,

조선시대 세종대왕때의 문인 윤회라는 사람은


<윤회>삼국사기는 부피가 많고 용장(쓸데없이 길어,,)하여

잠이 올 지경이다, 황당하고 미친소리같아 입에 담으면

불경한 소리가 된다


(해석 : 삼국사기 너무길어서 읽으면 졸린데,,

훌륭한 조상님들의 이야기이고

이미 성역화 되서 욕하면 나만 나쁜놈 되겠죠 ? ㅠ 이런 뜻입니다,,)


조선시대 실학자 정약용도 삼국사기를 믿을수 없다고 비판하십니다,,


삼국사기는 인종과 김부식 외 고려 관료들이 드림팀을 만들어

한국역사,외국 역사책들을

말그대로 박박 긁어서 모아서 하나의 거대한 사전같이 만들어낸 책으로

거짓말같은 이야기들도 고대 한국역사는

위낙 자료가 부족하니 다 넣어 만든 책입니다,,                                                

당연히 지루한 이야기도 있고 즐거운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태조왕 이야기가 삼국사기를 지루하게 해주는 이야기중 하나같고요,,

훌륭하신 분이나 투머치 토커 이런 말이 생각나는거 같습니다,,

훌륭하신데 너무 길고 장황해서 귀를 막고 고통스러워 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잊혀지지를 않는거 같고 은근 이런거도 유머 포인트 아니겠습니까 ?


<태조왕때의 일식관측 기록>


정말 오래사신,, 태조왕 56년

봄에는 가뭄이 들었고

여름에는 땅이 붉게 변했다고 합니다

이에 백성들이 굶주렸고 태조왕은,,


<태조왕>사신을 보내서 백성들을 구제하여라 !


태조왕 57년 1월 봄에는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

안제의 성년식을 축하했다고 합니다


태조왕 59년

태조왕은 사신을 한나라에 보내서

특산물을 바치고

현토에 복속하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쓰신

김부식님은 이 기록에 바로 밑에


<김부식> 통감(자치통감)에 이르기를

이해 3월 고려(고구려)왕이 예맥과 함께

현토를 침범하였다

복속을 원했는지, 침범 했는지는 알지못하며

하나의 오류일 것이다


라고 쓰십니다 정황상 고구려가

초기였던 태조왕때 멸망한거도 아니고

중국측에서 자신들이 유리하게 썼다거나

아니면 항복하는 척하며 뒤통수를 치는,,

화전양면전술 이런 방법으로

한나라 현토에 항복하는척하며

친게 아닐까 싶습니다,,

고구려인들은 무예를 중요시한

상무정신을 바탕으로 외적이나 강한 상대(보통 중국)에게

이런 전략을 정말 자주 사용합니다,,


태조왕 62년 3월 봄에는

*일식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일식 사진>


(일식 <천문> 달이 태양의 일부나 전부를 가림.

또는 그런 현상. 일부를 가리는 현상을 부분 일식,

전부를 가리는 현상을 개기 일식이라 하고,

태양의 중앙부만을 가려 변두리는 고리 모양으로

빛나는 현상을 금환식(金環蝕)이라 한다.)


10월 가을에는 태조왕이

남해 南海 에서 돌아왔다고 합니다


태조왕 64년 3월 봄 고구려에서

또다시 일식이 일어납니다


12월 겨울에서는 눈이 다섯자, 약 1.5m가 내렸다고 합니다


<고구려의 선진,독자적인 과학기술>


여기서 삼국사기,옛 고대역사의

일식같은 이런 과학,관측기록들은 매우 중요합니다

한국 역사서 삼국사기의 과학 관측기륵은 대부분

중국 역사서와 교차검증을 해보면

맞게 나오고 이는 삼국사기의 진실성을 높여주는 주요 자료라 할수있고

과학자분들도 따로 삼국사기에서의 과학 관측 자료만 모아

책을 낼정도로 귀중한 가치가 있는 기록들입니다

이에 중국 역사서를 그대로 배껴온게 아닌가라는 주장도 있으나

여기서 고구려 태조왕대의 일식 관측기록이 중요한 이유는

고구려는 114~273년간 10개의 일식 기록이 있었고

독자 관측이 가능한것으로 판된되며 그 이유는

태조왕 64년 (116년) 일식 기록은

중국 역사서 '후한서'의 오행지에


'사관은 보지 못하고 요동(고구려를 이르던 말)에서 전해들었다'


라는 기록이 있었고

이에 고구려에서는 일식,천문 독자관측이 가능했던 사실을

알수 있다고 합니다

최선진,초강대국 이었던 중국인들도 천문에서는

고구려 기록을 의존했던걸까요 ?,,


태조왕의 기록들을 보면 동물,천문등 여러 과학 기록들이 많이

나오는거를 봐서 오늘날 식으로 말하면

과학인재형 군주였을거 같습니다 


세종대왕도 신하들과 강연중에

백제,신라의 일식 기록에 대해

이야기 하신적이 있으십니다,,


세종실록 26권, 세종 6년 11월 4일 을해 1번째기사


정사를 보고 경연에 나아가 《시경》 시월편을 강하다


정사를 보고 경연에 나아가 《시경(詩經)》 시월편(十月篇)을 강하였다.


<세종대왕> 주전(朱傳)의 (주자께서 전하시기를)

일식과 월식은 비록 떳떳한 돗수가 있으나,

임금이 덕을 닦아 정치를 잘 하면 식(食)이 일어날 것도 일어나지 아니한다.

는 데에 이르러, 말하기를,

"이 말이 진실로 그러하다.

그러나, 내가 일찍이 《삼국사략(三國史略)》(동국사략)을 보니,

신라에는 일식이 있었는데, 백제에서는 쓰지 아니하였고,

백제에는 일식이 있었는데, 신라에는 쓰지 아니하였다.

어찌 신라에서는 일식이 있는데,

백제(百濟)에는 일식이 없었다 하겠는가.

아마도 사관의 기록이 자상한 것과 소략한 것이 다르기 때문인가 한다."


하니, 시강(侍講) 김돈(金墩)이 대답하기를,

<김돈>그렇습니다. 음(陰)·청(晴)이 달랐으면 달랐지

어찌 노(魯)나라에서는 일식이 있었으면서 제(齊)나라에서는 일식이 없었으며,

제나라에서는 일식이 있었으면서

노나라에서는 일식이 없었을 이치가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즉 세종대왕도 이는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이

더 섬세하거나 꼼꼼하지 못했거나의 차이로

과학 기록들을 기록하거나 못했던거 같다고 말씀하시는데요

국정을 돌보시는 와중에도 이런 옛 기록까지 토론을 하시던

한국사의 위인 세종대왕 다우셨던 기록입니다,, (과로를 하신듯요,,)

그러나 오늘날 과학계에서는 이는 꼼꼼하다의 차이보다는

한국 삼국에서 독자적 과학 관측 능력이 있고 없었다의

차이로 이야기 하는거 같고요


이런 기록들을 보아 분명 한국 삼국사기에서는

일식 기록에서 조작된 흔적은 찾을수없고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보다

앞선 과학 관측기술,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은 천문활동의 관측으로 볼때

삼국 모두 수학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로 추측하는거 같습니다


생각해보니 태조왕때에는

동물,흉년,메뚜기떼,토지의 색변화,

일식기록 등 과학 관측기록들이 꼼꼼합니다,,


오늘날 식으로 역사적 상상을 더 해보자면

과학군주였던 태조왕때 여러 과학자들이 우대됬고

동물학,천문학,기술등이 발달하게되

태조왕 이후 고구려가 영토를

크게 확장하는 계기가 된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실제로 한국 역사상 위대한 왕이라 불리시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영토확장에는

고구려 장인들의 철기,강철검 제조능력이라는

숨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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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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