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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왕 66년 2월 봄

지진이 있었고

6월 여름에는 태조왕의 예맥과 함께

한나라 현토를 습격하여

화려성을 공격했다고 합니다


고구려는 중국과 1-1로는 싸우면 패배했으나

이렇게 다른 종족과 연합해서 싸웠을때는 여러번

이겼던거 같고,, 이로인해 고구려는 멸망때까지 다른 부족,국가와

연합해서 중국에 맞서는 외교는 계속되는거 같습니다,,


7월 가을에는 메뚜기 떼가 생겼고

우박이 내려서 곡식들이 상했다고 합니다


8월에는,,


<태조왕>해당 관청들에게 명하여

선량한 사람, 효성스러운 사람, 온순한 사람들을 *천거하게 하고

홀아비와 과부, 고아와 자식없는 노인과 늙어서 자기 힘으로

살수없는자들을 조사하여서 입을것과 먹을것을 나눠주어라 !


(*천거 어떤 일을 맡아 할 수 있는 사람을

그 자리에 쓰도록 소개하거나 추천함)


이렇게 태조왕은 긴 재위기간동안

오랫동안 백성들을 위했던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태조왕 69년 봄에는

한나라 유주자사 풍환,

현토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 등이 군사를 이끌고 침입하여

예맥의 우두머리를 죽이고

무기와 말,재물들을 약탈했다고 합니다


<한나라 장군들>예맥의 우두머리 주제에

고구려와 연합하여

감히 대 한나라를 공격해 ?

이로서 원수를 갚았다 !


<한나라 병사들>와아아아아 !


이에 태조왕은


<태조왕>한나라에서 예맥을 공격했다,,

나의 아우 수성은 고구려 군을 이끌고

한나라에 맞서라 !


태조왕은 친동생이었던 수성에게

고구려 군사 2000명과 풍환과 요광(한나라)등과 싸우게 했습니다

수성은 풍환과 요광 등에게 사자를 보내서

거짓으로 항복하겠다는 말을 하게되고

풍환과 요광 등은 이를 그대로 믿습니다,,


수성은 그렇게 시간을 벌수있었고

곧 험한곳에 의지해 한나라 대군을

막으며 뒤로는 비밀리에 3000명의 고구려 군사들을 보내서

한나라 대군이 출정하며 빈집이 되버린

현토, 요동 두 군을 공격해서

성곽을 불지르고 2000여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고 합니다,,


<풍환>제길 ! 고구려인들에게 또 속았다 !


이해에는 한나라와의 전쟁이 잦습니다

4월 여름에는

태조왕은 선비족 군사 8000명과 

요대현을 공격합이나

이에 한나라 요동태수 채풍은

군사를 거느리고 신창에 나와 싸우다가 전사,사망합니다

공조연 용단과 병마연 공손포는

자신들의 몸으로 채풍을 엄호,보호하다가

채풍과 함께 진영에서 죽었고

이때 사망자가 백여명이었다고 합니다,,


10월 겨울에는

태조왕은 부여에 행차해서 부여인이었던

어머니 부여태후의 묘에 제사를 지냈고

곤궁한 처지의 부여 백성들을 위문하고

정도에 따라 물품을 주었다고 합니다,,

비록 고구려는 건국 초기에는 부여와

여러 원한 관계가 있었으나 결국 조선(고조선)의 후예,

한민족이었고 태조왕때 이르어

서로 하나가 되가는 모습이 보여집니다


또 이당시 숙신의 사신이 와서

자주색 빛 여우갑옷과 흰색 매, 흰색 말을 바쳤다고 합니다

이에 태조왕은 연회를 베풀어 위로하고 보냈다고 합니다


11월

태조왕은 부여에서 돌아옵니다

태조왕은 아우,동생 수성(고구려 7대왕 차대왕)에게,,


<태조왕>내 아우 수성은 한나라 군을

지혜로서 물리쳤다,

내 나이도 늙었고 국정을 보기가 어려우니

앞으로 수성에게

군사와 국정에 관련한 일을 맡기겠다


이로서 수성과 수성의 사람들은

고구려 국정을 장악하고

이때부터 수성은 태조왕의 아들이 있었음에도

고구려 차기 왕위 계승자로 인식되게 됩니다,,


태조왕은 대군이었던 한나라군의 약점은

타 종족들과 연합해서 싸운다는거라고 파악한거 같고

12월 부터는 태조왕은 마한,예맥 기병 1만명을 거느리고

현토성을 포위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부여왕은 아들 위구태를 시켜서 군사 2만명을

거느리고 한나라 군사와 힘을 합쳐서 대항했다고 합니다,,

이에 우리군사(삼국사기에는 아군이라 기록되있습니다),

고구려군은 크게 패하였다고 합니다

500명의 고구려군이 위구태의 부여군에게 죽었다고 합니다,,


태조대왕 70년에는 태조왕은

마한,예맥과 연합해서

요동을 공격하자 부여왕은 군사를 파견해

한나라를 구원했고 고구려군을 격파했다는데요


의문인것은 태조왕이 69년 12월 마한,예맥과 연합해

현토성을 공격할때 불과 2개월전에

부여를 방문해서 부여인이었던 어머니의 묘를

방문하고 부여 백성들을 위문했는데

부여왕은 아들 위구태를 시켜서 2만 부여군으로

한나라를 도왔다는게 의문입니다

태조왕이 방문한 부여는 다른 부여세력이었던걸까요 ?


삼국사기를 쓰신 김부식님은 삼국사기에서도

이당시 기록에 바로 밑에 의문을 남겼는데요


<김부식>마한은 백제 온조왕 27년에 멸망했는데,

지금 고구려왕(태조왕)이 함께 군사행동을 하였다 하니

멸망했다가 다시 일어난 것인가 ?


오늘날에도 이런거에 여러 해석들이 나오고있고

이런거를 볼때 고대사는 아직도 미스터리하거나

불분명 한게 많은거 같습니다,,

오히려 다행인것은 김부식님이 삼국사기를 편찬하실때

모른다고 해서 삭제하거나 그런게 아니라

몰라도 먼저 써놓고 의문을 달았기에

비록 미스터리한 부분들이어도

귀중한 고대 지명,이야기들이

하나라도 더 수록되었다는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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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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