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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천왕 20년

12월 겨울

진나라 평주 자사 최비가 도망해왔습니다


예전에 최비는 비밀리에 우리나라와(고구려)

단씨(선비족),우문씨(선비족)를 회유하여

모용외를 공격하게 했고

이에 따라 세나라(고구려,단선비,우문선비)가

극성 棘城 (모용선비의 수도)으로

진공 進攻(나아가여 공격, 진격)했습니다


위기에 빠진 모용외는 성분을 닫고 수비하면서

홀로 쇠고기(소고기)와 술을

우문씨에게 보내서 위로했습니다

이는 고구려,단선비,우문선비를

서로 의심하게 만들기위한 계책이었고

모용외의 작전은 성공합니다,,


다른 두나라(고구려,단선비)는

우문씨와 모용외 사이에

남모르는 계략이 있다고 의심해서

각각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습니다


이에 우문선비의 대인

실독관이 말했습니다


<실독관>두 나라(고구려, 단선비)는 비록 돌아갔으나

내가 혼자 힘으로 극성을 빼앗을 수 있다 !


계략이 성공한 모용외는

고구려,단선비,우문선비 세나라의

연합군은 막기가 어려웠으나

계략대로 고구려와

단선비는 철군하게되고

우문선비 홀로 공격해오자


모용외가 그의 아들 황 (모용황)을 하여금

장사 長史 배억과 함께 정예 부대를 이끌고

선봉에 서게했고

자신은 대부대를 거느리고 뒤를 이었습니다


홀로 공격한 우문선비의 실독관은 대패했고

몸만 간신히 빠져나갔습니다


최비가 이 말을 듣고

형의 아들 도(최도) 로 하여금

극성에 보내 거짓으로 모용외의 승리를

치하(남이 한 일에 대하여 고마움이나 칭찬의 뜻을 표시하다

주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한다)했습니다


이에 모용외는 군사를 옆에 세우고 도를 접견합니다

도는 이를 보고 겁을 내고 최비가

고구려와 단선비,우문선비를

회유해 모용외를 공격한것을

자복(저지른 죄를 자백하고 복종하다)했고

이에 모용외는 곧 도를 돌려보내면서

최비에게 말했습니다


<모용외>항복하는것이 상책이오

도주하는것은 하책이다


모용외는 군사를 이끌고 도의 뒤를 따라서

최비를 정벌하러 갑니다,,


이에 최비는 기병 수십명을 데리고

집을 버리고 우리(고구려)에게 도망해왔고

나머지 군사들은 모두 모용외에게 항복했습니다


모용외는 그의 아들 인(모용인)으로 하여금

요동 관부에 진을 치게했습니다

시장과 마을이 예전같이 평안했다고 합니다


우리(고구려) 장수 여노가 하성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모용외가 장군 자옹을 보내 습격해서 포로로 사로잡고

주민 1천여 호(가족)을 포로로 잡아

극성으로 돌아갑니다,,


미천왕은 이에 여러번 군사를 파견해서

요동을 침공하였고

모용외는 모용한과 모용인을 시켜 우리(고구려)를

공격했습니다,,


모용외 역시 모용선비족의 유능한 인물이었고

단독으로 상대하기 껄끄러웠던 미천왕은

모용외에게 동맹을 요구했고

이에따라 한(모용한)과 인(모용인)이

바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미천왕의 고조선 고토 수복의지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미천왕 21년

12월 겨울

군사를 보내서 요동을 침공합니다

모용인이 항전하여 우리(고구려)가 패배했습니다


<미천왕>저번에 모용외의 꾀에 속아넘어간게 크다,,

그때 철군하지 않고 단선비와 우문선비와

공격했더라면,,


이로서 고구려가 요동지역을

완전히 확보하게 되는것은 100년후

광개토대왕때로 미뤄지게 됩니다,,


미천왕 31년

미천왕은 후조의 석륵에게 사신을 보내

싸리나무 화살을 주었다고 합니다


미천왕 32년

2월 봄

미천왕은 붕어(사망)했습니다


미천언덕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미천왕이라고 했습니다


<미천왕>고생끝에 낙(즐거움)이 오는법이네

희망을 잃지 말라고 ~


<라봉봉>

미천왕이 다른 선비족(유목,기마민족)들과 연합해서

모용선비를 공격했다는게 특이합니다,,

고구려 초기에도 5대왕 모본왕때

선비족과 연합해 북경쪽을 공격한 기록이있는데요


고구려 역시 유목민족적 성격이 있었고

고구려의 역사를 읽으면

고구려인들의 무대가 오늘날 한반도라 불리는

한국 영토만이 아닌

드넓은 대륙을 달린 고구려인들의 모습들이 떠오릅니다,,

물론 옛날 고조선 영토는 더 넓었고

그 땅을 찾기위한 고구려인들의 노력이었습니다


또 모용선비의 왕 모용외는

비록 고구려와 맞선 인물이나

머리가 똑똑한 사람인게 기록으로도 느껴지고

실제로도 유능한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미천왕이 모용외의 꾀에 당한것은 아쉽지만

그래도 당시는 분열되고 힘이 약했던 중국이었고

요동 서안평과 고조선 고토이자 중심인

낙랑군, 대방군을 축출해내고 수복했다는것에

큰 의의가 있습니다

왕이 되기전부터 머슴생활로

연못가에서 개구리들을

돌을 던지며 쫒으며 소금장수에 온갖 고생을

다하며 왕이되고, 되고나서도

고구려인들의 오랜 열망이었던

고조선 영토를 찾아나간 을불,고구려 15대왕 미천왕 !!


이 왕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


미천왕은 고구려의 전성기의 기반을 닦고

중시조(쇠퇴한 가문을

다시 일으킨 조상)가 되서 그의 후손들은

계속 이어져 가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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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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