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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원왕 12년

10월 겨울

연나라 왕 황(모용황)이 용성으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입위 장군 한(모용한)이 황(모용황)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했습니다


<모용한>이대로 중원(중국)을 도모하기에는

후방에 고구려가 있어서 위험할 수 있습니다

먼저 고구려를 빼앗고

그다음에 우문씨(우문선비)를 멸해야만

중원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에는 두 길이 있었습니다

북쪽길은 평탄하고 넓으며

남쪽길은 험하고 좁앗고

따라서 사람들은 항상 북쪽길을

선택했습니다


다시 한이 말했습니다


<모용한>적국(고구려)은

일반적으로 상황을 고려하여

우리 대군이 반드시 북쪽길로 오리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따라서 북쪽 길을 중시하고

남쪽 길을 가볍게 취급할 것입니다


왕게서 응당 정예 부대를 이끌고

험준한 남쪽길로 가서 공격하되

불의의 공격을 하면

북쪽 도성을 공격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또한 별도의 소부대를

북쪽 길로 보내시면

다소 차질이 있더라도

그들의 심장부가 이미 무너졌으므로

사지를 움직일 수 없을것입니다


황(모용황)은 이 말을 따랐습니다


11월

연나라 왕 모용황이 직접

강병 4만을 거느리고

남쪽길로 진군했습니다


모용한과 모용패를 선봉으로 삼고

별도로 장사 왕우 등으로 하여금

군사 1만 5천을 거느리고 북쪽 길로 진군하게 해서

우리나라(고구려)를 침범했습니다


이에 고국원왕은

공격해 올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

평탄한 북쪽길을 아우 무로 하여금

정예부대 5만을 이끌고 방어하게 했고


자신은 약한 군사를 거느리고

험준한 남쪽 길을 방어했습니다

고국원왕 역시 평탄한 북쪽길로

대군이 올것이라 생각했고

이에 험준한 남쪽길은

별다른 방어를 하지않게되고

연나라 모용황과 한의 계략에

그대로 말려들어가게 됩니다,,


이때 모용한등이 먼저 와서

전투를 벌였고

연이어 황(모용황)의 대군이 도착했으므로


우리 군사(고구려)가 대패했습니다


좌장사 한수가 우리(고구려) 장수 아불화도가를 죽이자

모든 적들이 승기를 타고

드디어 고구려 수도 환도성으로 쳐들어 왔습니다


고국원왕은 단기 單騎(혼자 말을 타고감)로 단웅곡으로

도주했고

연나라 장군 모여니가 따라와서

고국원왕의 어머니 주씨와 왕비를 잡아 돌아갑니다


즉 고국원왕은 연나라인들의 꾀에 당해서

수도가 함락되고 홀로 도주하는 신세가 됬고

수도안의 어머니와 부인은 연나라인들에게

포로로 잡혀가게 됬습니다,,


이때 연나라장군 왕우등은 북쪽길에서

우리(고구려) 군사들과 싸우다가 모두 전사했고

이로 말미암아 모용황은 더이상 추격하지 않고

사람을 보내 고국원왕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고국원왕은 가지 않았고

모용황이 돌아가려 할 때

한수가 말했습니다


<한수>고구려 땅은

우리가 남아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지금은 그들의 임금이 도주하고

백성들이 흩어져

산골짜기에 잠복하였으나

우리 대군이 철수한 뒤에는

틀림없이 다시 모여

나머지 군사들을 수습할 것입니다

이는 족히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구려 왕(고국원왕)의 아버지(미천왕)의 시체를 싣고

그의 생모를 사로잡아 돌아갔다가

고구려 왕이 제 발로 와서 사죄하기를 기다린 후에

돌려주어 은혜와 신의로써 무마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이에 모용황이 그 말을 따라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시체를 싣고 대궐 창고에 있는

역대 보물을 탈취하고

남녀 5만여명을 사로잡고

궁실을 불태우고

환도성을 헐어버리고 돌아갔습니다,,


<모용황>고구려 왕의 어미와 왕비(아내)를 사로잡고

아비(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서 시신을 인질로 잡아라 !

고구려가 다시 재기하지 못하게

수도 환도성을 철저히 짓밟고 불태워라 !


<라봉봉>

그렇게 고구려 16대왕 고국원왕은 연나라인들의 꾀에 당해서

고구려 수도 환도성이 함락되고 짓밟히게 됩니다,,

비슷한 사건으로는 고구려 11대왕 동천왕때 위나라 관구검에게

역시 수도였던 환도성이 함락되고

짓밟힙니다,, 고구려는 평화시기에는 국내성,

전쟁시기에는 환도성을 수도,도읍으로 했다고 합니다

고국원왕때에도 타격이 컸고

특히 살아있는 어머니와 아내가 사로잡혀 돌아갔고

아버지 미천왕의 무덤이 파헤쳐서 시체를 가져가

돌아갔다는 기록, 5만명의 고구려인이 포로로 잡혀가고

수도가 불태워지는등 끔찍한 기록들로 가득합니다,,

이외에 삼국사기 기록 외에

모두루라는 인물의 묘지명,무덤에 새긴 글에는

고국원왕때 반역사건이 일어났다고도 했고

미천왕때 풍요로운 지방들을 얻게되었으나

이와는 별개로 바로 다음왕인 고국원왕때

고구려 상황은 당시 총체적 난국이었습니다,,

고국원왕이 무능하다라고만 느껴진다기 보다는

이 시기부터 점점 고구려와 고대국가들은 중앙집권화가 되고

기존의 부족국가식 정치로는 운영이 불가능해진다는거를

느끼는 과도기적 상태였다고 생각됩니다


옛날 고구려는 왕들과 신하,백성들이 서로 안면이 있고

한집건너 한집이 알고있고

전쟁때에도 건장한 청년들 수백명에 많아야 수천명이

우르르 몰려가서 싸웠던 부족국가적 모습이었다면

이때부터는 조직,국가등이 점점 거대해지며

새로운 정치 변화가 필요했던 시기라 할수있습니다

고국원왕 역시 무능한 왕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으나

고구려 주변에서는 새로운 나라들이 일어나고

시대는 격렬하게 변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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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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