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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종의 죽음으로 무산된 고구려 원정>


보장왕 7년

정월(1월) 봄

보장왕은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당태종이 조서를 내려서

우무위 대장군 설만철을

청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위 장군 배형방으로

그를 보좌케 해서


장병 3만여 명과

누선 및 전함을 가지고

내주로부터 바타를 건너서

우리,고구려를 공격하게 했습니다


4월 여름

오호진 장수 고신감이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와서 공격했습니다


그는 우리,고구려의 보병,기병 5천명과

역산에서 조우해서 우리 군사를 이겼습니다,,


그날 밤

우리 군사 1만여 명이 신감의

배를 습격하다가

신감의 복병이 출동해서 패배했습니다


당태종은 우리가 피폐되었다고

판단하고


다음해에 30만 대군을 출동시켜

일거에 멸망시킬것을 논의에

붙였습니다


누군가,어떤이가 다음과 같은 의견을 말했습니다,,


<어떤이>대군이 동방으로 원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1년의 군량미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군량을

마소(말과 소)나 수레에 실을 수는 없으니

마땅히 선박을 준비하여

수로로 운반해야 할 것입니다


수나라 말기에 검남지방만은

도적의 침입이 없었고

지난번의 요동 정벌때에도

검남이 참여하지 않았으니


그곳의 부유한 백성들로 하여금

선박을 만들게 해야할 것입니다


당태종이 이 말을 따랐습니다


7월 가을

서울 여자가 아이를 낳았는데

몸뚱이는 하나였고 머리가 둘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샴쌍둥이 이나

당시 시대적으로 이 기록이

기록된것은 국가멸망 등

불길한 상징으로 기록됬을것 같습니다,,


태종이 좌령 좌우부 장사

강위를 검남도에 파견해서

나무를 베어서

선박을 만들게 했습니다


큰 배 중에는

길이가 1백척,

넓이가 오십척 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배들은 따로 사신을 파견해서

수로를 통해서

무협에서 강남과 양주를 거쳐서

내주로 가게했습니다


9월

노루가 떼를 지어서

강을 건너서

서쪽으로 갔고

이리도 떼를 지어서

사흘 동안 서쪽으로 갔습니다


당태종이 장군 설만철 등으로 하여금

우리나라,고구려를 공격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바다를 건너서

압록강으로 들어와서

박작성 남쪽 40리 지점에 진을 쳤고


고구려 박작 성주 소부손이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방어했습니다


만철(설만철)이 우위 장군 배행방으로

하여금 보병과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이들을 공격케 하자

우리,고구려 군사가 무너졌습니다


배행방 등이 진격해서 포위했으나

박작성은 산을 이용한 험준한 요새였으며

압록강으로 튼튼하게 막혀있었기 때문에

그들(당나라 군)이 함락시키지 못했습니다


우리,고구려 장수 고문이

오골성,안지성 등 여러 성의 군사

3만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두 진으로 나누어 구원했고


당나라 만철(설만철)은 군사를

나누어 이에 대응해서

우리,고구려 군사가 패배했습니다,,


태종이 또한 내주 자사

이도유에게

군량과 기계를 운반해서

우호도에 비축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는 장차 대정벌을 일으키려는 것이었습니다


보장왕 8년

4월 여름

당나라 태종 이세민이 사망했습니다

태종은 조칙을 내려서

요동 정벌을 중지하게 했습니다


<당태종 이세민의 유언>고구려는

천하의 이 이세민이도 어려웠던 나라인데

괜히 건들여서 사직을 위태롭게 하지말거라


다시는 요하를 넘지 말라,,


<김부식>논평한다

처음에 태종(당태종 이세민)이

요동 원정을 할 때는

이를 말리는 자가 한 사람 뿐이 아니었다


또한 안시성으로부터 군사를 철수한 뒤에는

자기가 성공하지 못한것을

깊이 후회하고

한탄하며,


<당태종 이세민>만약 위징(당나라 명재상)이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번 원정을 못하게

했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가 다시 고구려를

치려 할 때


사공 방현령이 병중에 있으면서도

표문을 올려

다음과 같이 간했다


<방현령>노자는


'만족함을 알면 욕을 당하지 않으며,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라고 말했습니다


폐하의 위대한 명성과 공덕은

이미 만족할만 하며

국토를 넓히는 일도

역시 멈출만한 정도가 되었습니다


폐하께서는 한명의

중죄인을 처형할때도

언제나 필히 세번 심사하고

다섯번 변명할 기회를 주셨으며

검소한 식사를 올리게하고

풍류를 중지하게 했으니


이는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일 터인데

이제 무죄한 사졸들을 몰아다가

칼날 밑에 맡겨

참혹히 죽게 하는것만은

왜 불쌍하게 여기지 않습니까 ?


지난날 고구려가

신하의 절조를 어겼다면

벌주는 것이 옳으며


우리 백성들을 침략하였다면

없애버리는 것이 옳으며


후일 중국의 걱정거리가 된다면

제거하여 버리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와같은 세가지 조건이

하나도 갖추어져 있지 않은데,


공연히 중국 자신을 괴롭히면서

안으로는 선대의 치욕을 씻고

밖으로는 신라의 복수를 한다하니


이야말로 어찌 얻는 것은 작고

잃는 것은 큰 것이 아니겠습니까 ?


원컨데 폐하는 고구려가

스스로 새로 태어나도록 허락하시어

창파에 띄운 선박을 불태우고,

징발해온 군사들을 돌려보내십시오


이렇게 되면 중국에는 경사가 깃들고,

오랑캐들은 우리를 믿을것이며,

먼 곳은 조용하고

가까운 곳은 평안해질 것입니다


양공(방현령의 작위, 방현령)이 죽음을

앞두고 한말이 이와같이 간곡하였다


그러나 황제(당태종 이세민)는

이 말을 따르지 않고

동방을 폐허로 만드는것을

자기 만족으로 삼으려다가

죽은 뒤에야 그만 두었다


사론에서 말하는 바


'큰 것을 즐기고

공명을 좋아하여

먼 곳으로 군사를 내몰았다'


는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 ?


유공권의 소설에서는


'주필산 전쟁에서

고구려가 말갈과 군사를 연합하니

그 군사가 바야흐로 40리나

뻗쳤다

태종이 이를 보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고 하였으며

또한


'황제(이세민)의 6군이

고구려 군사에게 제압되어

거의 꼼작 못하였네,


영공의 휘하에 있는

검은 깃발이 포위되었다고

척후병이 보고하니,


황제가 크게 두려워하였네'


라고 하였다


비록 나중에 몸은 탈출했으나

그와같이 겁을 내었는데

[신구당서]와

사마광의 [통감]에 이를 기록하지 않은것은

나라의 체면 때문에

말하기를 기피한 것이 아니겠는가 ?


<라봉봉>김부식님 역시

삼국사기를 쓸때

중국 중심으로 쓰여진 당시의 기록에

의심을 한 모습을 사론에 적어놓으셨습니다


초,중기 고구려 역사를보면 무적의 고구려라는

말이 생각났고 그랬던 고구려가

이렇게 말기,마지막 왕 보장왕때에 와서는

속수무책으로 당나라군들에게 패배하는게

정말 아쉽습니다,,


당태종 못지않게 고구려 연개소문도 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고 생각되나


당태종은 수양제의 폭정에 일어나서

나라를 건국했기에(정확히는 아버지를 도와 큰 기여)

형제의 난,왕위 찬탈자였어도

주변 귀족,세력들을 이끌 명분이 있었고


연개소문은 큰 폭정에 일어난것도 아니고

수나라와의 전쟁 당시 전쟁영웅이었던

영류왕을 시해하고 일어났기에

명분이 부족했기에

반정 이후 주변 귀족,고구려 지방 성들까지

권력을 장악할 능력이 부족했기에

이렇게 가뜩이나 통일제국 당나라를 상대하기가

어려운 상태에서

더 혼란이 가속화 된거 같습니다,,


당태종이라는 인물은 죽었으나

여전히 당나라라는 국가는

압도적으로 강한 초강대국이었고

이후 고구려는 당태종의 뒤를 이은

당태종의 아들 당고종에게 멸망합니다,,

의외로 당고종은 당태종에 비해

능력이 적다는 평과

악평이 있는 군주였으나,,

물려받은 유산이 워낙 커서

국력으로 압도가 가능했습니다,,


당태종,연개소문 모두

반정을 일으켜 집권했고

야심가였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모습이 있으나

이는 개인의 능력 이외에도

사회적인 요건,환경의 차이도

중요하다고 할수 있는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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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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