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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장왕 20년

정월(봄)

당나라가 하남,하북,회남 등의

67개주에서 군사를 징발해서

4만 4천여 명을

평양과 누방 군영으로 가게하고,


또 홍려경 소사업을

부여도행군총관으로 삼아서

회흘 등 제 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으로 진군하게 했습니다


4월 여름

임아상을 패강도행군총관,

설필 하력을 요동도행군총관,

소정방을 평양도행군총관으로 삼아서


소사업과 모든 오랑캐군사

35군을 거느리고


수륙으로 길을 나누어서

동시에 진군했습니다


이때 당고종이 직접 대군을

통솔하려 했습니다


울주 자사 이군구가

말했습니다


<이군구>고구려는 소국인데,

어찌 중국의 모든 국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


만약 고구려가 망한다면

우리가 반드시 군사를 출동시켜서

그들을 지켜 주어야 합니다


이때 군사를 적게 출동시키면

위신이 서지 않을 것이며


많이 출동시킨다면

백성들이 평안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온 나라 사람들을 전쟁으로 내몰아

피곤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이 생각하기는

토벌하는 것이

토벌하지 않는 것만 못하며


멸망시키는 것이

멸망시키지 않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때에 또한 무후도 말렸으므로

당고종이 중지했습니다


5월 여름

보장왕이 장군 뇌음신으로 하여금

말갈군을 거느리고

신라의 북한산성을 포위하게 했고

열흘,10일이 되도록

포위를 풀지 않았습니다


신라의 군량 수송이 차단되서

성안에서는 위험과 공포를 느꼈습니다


갑자기 큰 별이

우리,고구려의 병영에 떨어지고

우레가 치며 비가 오고

벼락이 쳤습니다


뇌음신 등은 의심스럽고

놀라서 퇴각했습니다


8월 가을

소정방이 패강에서

우리 군사를 격파해서

마읍산을 탈취하고

마침내 평양성을 포위했습니다


9월

개소문(연개소문)이 그의 아들 남생(연남생)에게

정병 수만명을 주어서 압록강을

수비하게 했습니다


당나라의 모든 부대가 건너오지 못했고

설필하력이 압록강에 도착했을 때는

강에 얼음이 얼었습니다


그는 군사를 이끌고 얼음 위로

강을 건너서

북을 두드리고

함성을 지르며 공격해왔습니다


이에 우리,고구려 군사가 패주했습니다,,


하력이 수십 리를 추격해서

우리 군사 3만명을 죽였습니다,,

남은 군사는 모두 항복했고

남생은 간신히 자기 몸만 피해서

달아났습니다,,


이즈음, 당나라에서는

군사를 철수하라는 조서가 있었으므로

그들은 곧 돌아갔습니다,,


보장왕 21년

정월(1월) 봄

좌효위 장군 백주 자사

옥저도총관 방효태가

개소문(연개소문)과 사수언덕에서

싸우다가 그(방효태)의 군사가 전멸했습니다

효태도 그의 아들 13명과 함께 전사했습니다,,


소정방은 평양을 포위했습니다

그 때 마침 폭설이 내렸으므로

그들은 포위를 풀고 물러갔습니다


이리하여 당나라는 전후의 정벌에서

매번 큰 성과없이 물러갔습니다


<라봉봉>고구려군이 패퇴하는 와중에도

연개소문의 군대만은 승리했습니다,,


이는 그의 능력을 보여주는 이야기라

할수도 있지만


고대 로마와 카르타고의 포에니 전쟁때

로마를 떨게했다는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은

베테랑 군사들과 계속

로마에 승리 했으나

한니발 장군의 지휘가 아닌

다른 일반 카르타고 군들은

로마에게 계속 패해서

결국 한니발 장군 역시 위기에

갇히게 된다는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고구려는 연개소문 사후

얼마 되지않아서 멸망해버렸고,,


이기는게 중요하더라도

홀로만 살아남거나 이기는 것은

결국 패배하는 것이다라는거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수있습니다,,

(사실 당나라 내부에서도

반란등 사정이 나빴지만

고구려 역시 나빴고,,

결국 당나라와 신라의

협공으로 멸망했다할 수있습니다)


900년, 정식으로는

700년 고구려 역사가

끝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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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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