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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소문은


<김부식>혹은 개금이라고도 함


성은 천(=연

김부식 님은 당대

중국 기록을 참고하며 쓰셨기에

중국에서는

연개소문의 연씨는 황제,왕의 이름과

같지 않게하려는 피휘제도로

당나라 고조

이연의 연자를 피휘해서

천개소문이라고 쓰셨던걸 보고

천개소문이라 기록하셨습니다)

씨인데

스스로 말하기를 물속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대중을 현혹시켰다고 합니다,,


<연개소문>아니 동명성왕께서는

하늘의 자손이자 물의 신 하백의 외손이신데


나라고 물에서 태어난게 잘못이여 ?


<고구려인들>아닙니다,, ;;

(그때는 너무 옛날이었고 님은 왕족이

아니란게 문제겠지요,,)


생김새가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의지와 기개가 커서

작은것에 얽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연개소문, 그의 아버지는

동부


<김부식>혹은 서부라고도 한다


대인대대로로 죽으니

개소문이 마땅히 계승해야 했으나

나라 사람들이 그의 성격이 잔인하고

포악하다고 해서

미워했으므로


그 자리에 오를 수 없었습니다,,


이에 소문(연개소문)이 머리를 숙이고

뭇 사람들에게

사죄해서

그 직을 임시로 맡기를 청하고

만약 옳지 못함이 생기면

비록 버려져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

하니,,


<고구려 귀족들>(개소문이도

머리를 숙이는 때가있구나,, 왠일이여,,)

음,, 한번 믿어봅시다 폐하


뭇 사람이 불쌍히 여겨서

드디어 관직의 계승을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연개소문은

흉악하고 잔포(잔인하고 포악)하며

무도해서

여러 대인들이 왕과 더불어

비밀히 의논하고 죽이려 했는데

일이 누설됬습니다,,


소문이 자기 부의 군사를 다 모아서

사열식을 하는 것처럼 하는 동시에

주찬(술과 안주)을 성의 남쪽에

성대히 베풀어 놓고,

여러 대신들을 초청해서

함께 관람하자고 했습니다


손님들이 오자

모두 죽이기를,,

백여 명이나 하고,,

궁중으로 달려들어가서

왕(고구려 27대왕 영류왕)을

시해해서

몇 도막(토막)으로 잘라서

구렁텅이에 버리고,,


왕제,왕의 아우의 아들 장(고구려 28대왕 마지막왕

보장왕)을 세워서

왕을 삼고

제 스스로 막리지가 되니,,


그 벼슬이 당의 병부상서로서

중서령의 직을 겸한 것과 같았다고 합니다,,

(병부상서=군사, 중서령=행정

즉 군사,행정 모두 장악,,)


이에 연개소문은 원근(먼곳과 가까운 곳)을

호령하고


국사를 전제해서

매우 위엄이 있었으며

몸에 칼 다섯을 차고있어서


좌우의 사람들이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라봉봉>여기서 연개소문이

다섯 자루의 칼을 찼다는것은

위압감과 공포감을 주었다는

면으로만 보아서는 안되고


원래 한원 翰苑 이라는 기록에는

고구려 일반 남자들은

누구나 몸에 칼 다섯자루와

숫돌(칼가는 돌)까지 차고 다닌다는

기사가 있다고 합니다

(공격용,방어용,투척[던지기]용,요리용,기타 등)


문제는 고구려는 후기로 갈수록

수렵,유목민족적 기색보다는

평양성으로 천도하고 이후부터

농경민족화 됬고

고구려 인들도

칼을 더이상 5자루씩

안차게 다니게 되었고


연개소문은 이에 스스로

물에서 태어났다는 주장(주몽과 비슷)

이나 칼 다섯자루를 다시 찼다는

거로 보아서

고구려의 옛 기상,초심을 잃어가고

중국에 굽히기만 하는

정책들에 반감을 느꼈고

평소 이런 모습들로

농경화된 평양 고구려 귀족들의 견제를 받다가

반란을 일으키게 된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런 산악,유목세력을

대표하는 옛 수도였던

환도성(국내성 수도 시절 전쟁시 수도)에서는 평양천도 이후

고구려 24대왕 양원왕대에 국내성파 귀족인

간주리의 반란이 일어났고

결국 말기 연개소문의

반란이 정점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또 그의 정권이 그가 죽을때까지,

죽고 나서도 자식들에게도 이어졌다는거로

보아서는

고구려 사회 내부에서도

옛 수도인 산악지역인 국내성 귀족들이나

또 옛날같이 당당했던 기상의

고구려를 그리워하고

기존의 중국에 사대하는 정치와

농경화된 모습에 반감을 느끼는

고구려인들도 적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연개소문>우리의 선조들은

중국에 굽히지 않으셨다 !

고구려의 초심을

찾고 고구려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 !


<반란 동조자들>와아아아 !

고구려를 다시 위대하게 !

고구려 만세 !


문제는 당시 중국은 거대한

통일왕조가 들어서던 때였고

변해가는 시대속에서

고구려인들의 불안감,

연개소문 등 구 국내성 세력이나

유목세력에 대한 견제 등이

맞물려서 그가 일어나게

된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는 말을 오르고 내릴때마다

항상 귀인무장 貴人武將 (귀한 무인 장수,

귀족으로 생각됩니다)을

땅에 엎드리게 해서

디디는 발판을 삼았다고 합니다


<연개소문>옛 고구려는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다 !


내가 귀족을 밟고 말에 오르는데,

이런 나에 불만 있으면

나와서 당당하게 말하라 !


(나는 고구려 막리지인데

귀족들보다 위라는거를 인식시켜야지,,)


<고구려인들> ;;;;; ,,


외출할 때에는

반드시 대오를 벌려서 세우고 갔는데

앞에서 인도하는 자가

긴 소리로 외치면

사람들이 달아나며

구렁텅이라도 피하지 아니했으니


나라 사람들이 매우 괴롭게 여겼습니다,,


<라봉봉>[삼국사기 반역열전 개소문] 에서는

이렇게 초기의 그의 묘사가

귄위주의적이고

흉폭한 모습 위주로 그가 그려지나

후대인들은 여전히 논란은 있으나

연개소문은 특히 나라가 어려울때(일제강점기)

긍정적으로 재평가된 인물이었고


이에 그가 고구려 권력을 장악하게된

배경들을 추측해서 써봤습니다,,

실제로 오늘날에도 소득수준이

매우 낮거나 매우 많은사람들이

보수정당,권위주의에

기대는 경우가 많다고 하고


당시 고구려는 오랜 수나라와의 전쟁으로

매우 피폐해져있는 상태였기에

권위주의 인물인 연개소문이 일어나기에

정말 '좋은' 조건이었습니다,,


연개소문은 고구려 권위주의의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개소문은 수도를 평양성으로 천도한후

고구려 내 국내성,환도성의

유목,강경파 귀족들이 소외되고

국제 정세는 신라가 일어나고

중국에는 통일왕조가 들어서는 혼란,불안에

오랜 수나라와의 전쟁에 지친 고구려인 등을

이용해서 이렇게


연개소문은 이렇게 다시 옛 고구려의

당당한 모습,기상들을 회복하고자 하며

사람들을 어느정도 선동하며

쿠데타,군사 반란을 일으켰고


전쟁영웅이었던 영류왕을 시해했음에도

영류왕은 지나치게 당나라에 필요 이상으로

굽신됬다는 평도 있기에


연개소문은 혼란의 국내외 정세속에

꽤 성공적으로 그의 권력장악이 이뤄진거 같습니다,,


그가 찼다는 다섯자루의 칼,

말을 탈때 사람을 밟고

올라탔다는 기록은

다시 고구려의 기상을 보이기 위함이

있을수도 있으나

그의 권위주의,카리스마의 상징으로

묘사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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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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