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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는 고구려>


유리왕 32년

11월 겨울

부여가 침범해왔습니다


유리왕이 아들 무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이를 방어하게 했습니다


무휼은 병력이 적어서

대적할 수 없음을 염려해서

기묘한 계책을 내서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산골짜기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부여 군사가 곧바로 학반령 아래에 이르자

숨겼던 군사를 출동시켜서

불의의 공격을 하니


부여 군사들이 크게 패해서

마필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무휼이 군사를 풀어서

그들을 전부 죽여버렸습니다,,


<무휼>나는 아무도 우리 고구려를

소국으로 보게 하지 않을 것이다 !


<고구려 군사들>만세 ! 만세 !

무휼 왕자님 만세 !

고구려 만세 !


유리왕 33년

정월(1월) 봄

유리왕은 왕자 무휼을 태자로 삼고

군사와 국정에 관한 일을 맡겼습니다


<유리왕>부여군을 물리친

왕자 대무신왕을 태자로 삼겠노라 !

(첫째 도절도

둘째 해명도 죽었으나

셋째 무휼이라면 안심하고

고구려와 백성들을 맡길 수 있겠어,,)


8월 가을

유리왕이 오이와 마리에게 명해서

군사 2만명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을 공격해서

멸망시키고

계속 진군해서 한나라의

고구려현 高句麗縣 을

습격,탈취하게 했습니다


<김부식>현 縣 은 현토군 玄菟郡 에 속한다


<오이,마리>한나라에게 뺏긴

옛 조선땅을 되찾았다 !


<고구려 군사들>만세 ! 만세 !


<오이>우리도 추모(주몽) 임금님과

젊었을때 부여를 탈출한게

엊그제 같은데

백발의 노장이 다됬네


<마리>협보가 없는게 아쉽군,,

하늘에 계신 동명성왕(주몽)께서

흐뭇하게 바라보고 계실거야


<유리왕의 죽음>


유리왕 37년

4월 여름

왕자 여진이 물에 빠져서

죽었습니다


유리왕이 슬퍼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시체를 찾게 했으나

결국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 후, 비류 사람 제수가

시체를 찾았다고 알려왔기에


곧 예식을 갖추어 왕골령에

장사지내고


제수에게 금 10근과

밭 10경을 줬습니다


7월 가을

유리왕이 두곡에 행차했습니다


10월 겨울

유리왕이 두곡 이궁(별궁)에서

붕어했습니다


도국 동원(동쪽 언덕)에 장사지내고

호를 유리명왕이라 했습니다


<유리왕>또다시 아버지를 뵈러 가는군,,

그래도

아들 무휼(고구려 3대왕 대무신왕)이가

똑똑하니 안심하고 갈 수 있겠군,,


<라봉봉>유리왕도 옳지 못한 행동들을 많이 했으나

장단점이 뚜렸하다는 임금이라는 평답게

후기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큰 정복들을

하게 됬습니다


원래 유리왕은

부여에서 아버지 없이 자랐고,,

주몽이 부여에서 남긴 징표를 가지고

부여를 탈출해서 주몽의 아들이라는

것 이외에는

뚜렷한 정치적 기반등이 없었기에

초기에는 외정보다는

내정,내치에 집중했던거로 보여집니다


수도를 아버지 주몽,동명왕이 자리잡은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기고

아버지의 신하였던 협보를 파면시키고,,

아버지 주몽의 정치보다는

자신의 정치를 하려했고

황룡국과의 관계를 중요시하며

자신의 아들,태자였던 해명을 죽인일,,

그리고 부여 사신의 협박에

굽히려 했던 모습 등은

매우 비굴하다고

느껴질 정도이지만,,


선비족 공격이나 셋째아들 무휼을 믿고

결국 부여에 맞서고

이후부터는 부여보다도 더 큰 적국이었던

한나라에 맞서는 모습 등을 보여줬고

특히 유리왕 후기에는

공을 세우고 태자가 된 무휼이

한나라를 공격하는 등

정국을 주도한게 아닐까 싶습니다

(한나라 공격을 주도한게

태자 무휼이 아닐가 싶습니다)


고구려는 초기 건국때부터

멸망할때 까지 왕들,인물 한명한명이

개성있고 매력이 큽니다,,

고구려 이야기도 거의 끝나가지만

나중에 또 이야기하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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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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