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시조 始祖 (한 족속의 맨 우두머리 조상,

시작,첫 조상) 온조왕


백제 1대왕 온조왕

재위기간 45년 기원전(B.C) 18년~ 서기 28년


시조 온조왕은

아버지는 추모,

혹은 주몽이라 했습니다

(고구려 시조, 고구려 1대왕 주몽,

동명성왕)


주몽이 북부여로부터

난을 피해서

졸본부여에 이르렀는데


(졸본)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다만 세 딸이 있어서

주몽을 보고 비상한 사람임을 알아서

둘째 딸로서 그의 아내를 삼게 했습니다


얼마 후

(졸본)부여왕이 죽고

사위였던 주몽이 왕위를 이었습니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자,첫째 아들을 비류라고 하고

차자,둘째 아들을 온조라고 했습니다


<김부식>혹은 주몽이 졸본에 이르러서

월군녀 越郡女 를 아내로 얻어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월군녀는 초월,넘는 월 越 ,

마을 군 郡 자로

그대로 해석해보면

마을을 초월한,넘은 여인이기에

주몽은 어찌됬건 지역의 유지,실력가의

딸과 결혼한거 같습니다)


그런데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유리,이후 고구려 2대왕 유리왕)

이 와서

태자를 삼으므로


비류와 온조는 그들이

태자로 용납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해서

드디어 오간,마려 등

십신 十臣 , 10명의 신하와

남쪽으로 떠나니

백성들 중 이들을 따라나서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비류와 온조를 따르는 백성들>유리태자께서

성격이 보통성격이 아닌데

그대로 있다간 궁궐에 피바람이 불거니

빨리 고구려를 떠나야지,,


그들은 드디어 한산 漢山 (서울 북한산 北漢山 같습니다

북자는 조선시대 한강북쪽이라 북이 붙은거 같습니다) 에

이르러 부아악 負兒嶽 (고양군과 서울 도봉구

경계 북한산의

신라시대때 지명이라 합니다) 에 올라서


가히 살 수 있는 땅을 바라보았는데

비류는 해빈 海濱 (바닷가)

으로 가서 살고자 하므로

10신,열명의 신하들이 간하기를


<열명의 신하들>생각컨대

이 하남 河南 (강 남쪽) 의 땅은

북으로 한수를 끼고

동아로 고악에 의거하고

남으로 옥택을 바라보고

서쪽은 대해로 가로막혔으니


그 천험의 지리를 이루어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이룩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


라고 했습니다


비류는 이 말을 듣지 아니하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인천쪽이라고 합니다)로

가서 살고


온조는 하남위례성(현재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

도읍을 전하고

10신 十臣 (십신),열명의 신하들로서 보익을 삼고

국호를 십제 十濟 라고 했는데

(열 십 十, 건널 제 濟 로

열명의 신하가

보필하고 10개의 강물을 건넜다는 뜻이라 합니다)


이때는 전한(중국 한나라) 성제 홍가 3년 이었습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히 살 수가 없으므로

위례성으로 돌아와서

도읍을 새로 정하니

인민이 편안히 살았으므로

드디어 부끄러워 하고 뉘우치며 죽었습니다


<비류>내가 바닷가에서 살자고

고집해서 백성들이 고생하는데

강가에 자리잡은 온조의 백성들은

풍요롭구나,,


온조야 백성들을 잘 부탁한다


그 (비류의) 신민 臣民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위례성(백제 첫번째 수도)으로 모였습니다


그 뒤로부터 날로 백성들이 즐겁게 따르므로

국호를 백제 百濟 (비류의 신하와 백성들까지

모이자 10이 100이 된것입니다)

라고 했는데


그 세계는 구려와 한가지로

부여에서 나온 까닭으로

부여로(부여씨로) 성씨를 삼았습니다

(즉 온조의 이름은 부여온조,

백제 왕들의 성씨는 모두 부여씨)


<김부식>또한 말하기를

시조는 비류왕이고

그 부친은 [우태 優台]로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서자의 아들,

또는 적자[정실이 낳은 아들]의

소실[첩]이 낳은 아들) 이었다


어머니는 소서노이니

졸본 사람 연타발의 딸이다


그녀(소서노)가 처음 우태에게 시집와서

두 아들을 낳았다


첫째는 비류,

둘재는 온조였다


소서노는 우태가 죽은 뒤

졸본에서 혼자 살았다


그 후 주몽이 부여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전한 건소 2년 봄 2월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도착하여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으며


소서노에게 장가들어

그녀를 왕비로 삼았다


주몽이 나라의 기초를 개척하여

왕업을 창시함에 있어서

소서노의 내조가 매우 컸으므로


주몽은 소서노를 극진히 사랑했고

비류 등을 자기

소생(자기가 낳은 아들이나 딸, 친자식)

과 같이 대우하였다


주몽은 부여에서 낳았던

예씨(예씨부인)의 아들

유류(유리,이후 고구려 2대와 유리왕)

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다

그 후 그가 주몽의 뒤를 잇게 되었다


이때 비류가 아우 온조에게 말하기를


<비류>처음 대왕께서 부여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하여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내주어

나라의 기초를 세우는 위업을 도와주었으니

어머니의 조력과 공로가 많았다


그러나 대왕께서 돌아가시자

나라가 유류(유리)에게 돌아갔다


우리가 공연히 여기에 있으면서

쓸모없는 사람같이

답답하고 우울하게 지내는 것 보다는


차라리 어머님을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살 곳을 선택하여

별도로 도읍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


라 하고

마침내 아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패수와 대수를 건너서

미추홀(오늘날 인천이라 합니다)에 와서 살았다


한편 [북사]와 [수서] (중국 기록들)

에는 모두


'동명의 후손 중에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이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웠는데

한나라 요동 태수 공손도가

자기의 딸을 구태에게 시집보내고

그들은 마침내 동이(동족 오랑캐로

중국인들이 한국을 낮춰부른말)의 강국이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어느 주장이 옳은지 알 수 없다


<라봉봉>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시조들의 이야기는

워낙 옛 이야기기에

그 이야기가 신화로 되있거나

김부식님이 어느 주장이 옳은지 알 수 없다는

말같이 여러 이야기가 있는거 같습니다


온조는 비류의 동생이었으나

무리하게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우지 않고

10명의 신하들의 간언(조언)을 듣고

오늘날에도 좋은 땅인 현재 서울,한강쪽에

자리를 잡았고

비류는 바닷가에 살고싶다는 고집으로

미추홀에 가서 습하고 물이 짜서

고생하다가 결국 다시 온조에게 가게 되서

백제가 건국되게 됩니다


여기서 소서노라는 여인도

대단한 인물이라고 여겨집니다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역사인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건국한

여걸 女傑 (용기가 뛰어나고

기개와 풍모가 있는 여자)로 이야기되며

그런 어머니의 기개답게

자식들 비류와 온조 역시


'쓸모없는 사람같이 답답하고

우울하게 살바에'


어머니를 모시고

자신들의 인생을 개척하며

나라를 세웠기에 또한

멋진 모습들을 보여줬습니다


오늘날 일본의

정신,문화적 모태가 되기도 했고

바다를 넘어 대륙을 경략하고

대만(담모라국)을 부용국(식민지)로

삼았으며

백제 필리핀 진출설 등

인도,동남아시아 까지 진출한 해상대국이며

(필리핀 진출설은 큰 근거는 모르겠으나

백제가 인도,동남아와 교류한것은 사실입니다)


오늘날 한류의 원조인

백제류라 할수있는

구다라나이 百濟無

(백제가 아니다, 백제의 것이 아니면 쓸모없다,

시시하다라는 옛 일본어로

현재는 시시하다는 뜻의 일본어)

라는 말이 나오며


일본인들이 그 선진 문화들을

동경했으며

오늘날에도 일본인들이

사랑하는 나라인 백제,


아름다운 문화의 나라 백제의

이야기 입니다 !!


개인적으로도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중에서

백제의 문화가 가장 세련되고

정갈하게 멋있고 현재 라봉봉 블로그 배경도

백제 무령왕릉 족좌(발베개)문양입니다,,


<백제 문양>


반응형
Posted by 라봉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