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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17대왕 아신왕

재위기간 13년 392~405년


아신왕은


<김부식>혹은 아방이라고도 한다


<라봉봉>일본기록 '일본서기'에서는

그를 아화,아미라고도 했습니다


침류왕의 맏아들입니다


그가 한성의 별궁에서 태어났을 때

신비로운 광채가 밤을 밝혔습니다


그가 장성하자 의지와 기풍이 호방했으며

매사냥과 말타기를 좋아했습니다


침류왕이 붕어했을 때

그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그의 숙부(작은아버지) 진사(진사왕)가 왕위를

이었는데


진사왕이 재위 8년에 붕어하자

그가 즉위했습니다


아신왕 2년

정월(1월) 봄

아신왕이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찾아 뵘)하고

또한 남쪽 제단에서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아신왕은 진무를 좌장으로 임명해서

군사에 관한 일을 맡겼습니다


진무는 왕의 외삼촌으로서

침착하고 굳세며

지략이 많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8월 가을

아신왕이 진무에게,,,


<아신왕>관미성은

우리나라 북쪽 변경의 요새이다


그 땅이 지금은

고구려의 소유로 되어 있다


이것을 과인은 애통해 하니

그대는 응당 이 점에 마음을 기울여

이 땅을 빼앗긴 치욕을 갚아야 할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아신왕이 마침내 1만명의 군사를

동원해서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칠 것을

계획했습니다


진무는 병졸보다 앞장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석현 등의 다섯 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먼저 관미성을 포위했는데

고구려 사람들이 성을 둘러싸고

굳게 방어했습니다


진무는 군량의 수송로를 확보하지 못해서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습니다


<진무>보급이 안되는데도

무리해서 강국인 고구려를 친다면

반드시 패하는 법

모두 물러나자꾸나,,


<백제 병사들>진무장군님이 인물이시지만

고구려왕 담덕(광개토대왕)이 너무 강하구나,,


아신왕 3년

2월 봄

아신왕이 맏아들 전지(백제 18대왕 전지왕)를

태자로 삼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했습니다


아신왕은 아신왕의

이복동생(다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동생) 홍을 내신좌평(백제 최고위직)으로

임명했습니다


7월 가을

고구려와 수곡성 아래에서 싸워서

패배했습니다,,


낮에 태백성(금성)이 나타났습니다


아신왕 4년

2월 봄

혜성이 서북쪽에 나타났다가

20일만에 사라졌습니다


8월 가을

아신왕이 좌장 진무 등에게 명해서

고구려를 치게 하니

고구려왕 담덕(광개토대왕)이

직접 군사 7천명을

거느리고

패수에 진을 치고 대항했습니다


<광개토대왕>백잔 百殘 (잔인한 백제,

백제 오랑캐, 백제를 낮춰부르는 말)

놈들이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구나


저 나쁜 무리들을

모두 쓸어 없애

백성들을 편안케 하라 !


<백제 군사들>으악,,


우리(백제) 군사가 크게 패배했으니

사망자가 8천명이었습니다,,


11월 겨울

아신왕이 패수전투의 패배를

보복하기 위해서

직접 군사 7천명을 거느리고

한수를 건너서

청목령 아래에 진을 쳤습니다


그때 마침 큰 눈이 내려서

병졸들 가운데

동사자가 많이 발생하자

아신왕은 회군해서

한산성에 와서

군사들을 위로했습니다


아신왕 6년

5월 여름

아신왕이 왜국(일본)과 우호관계를 맺고

태자 전지를 인질로 보냈습니다


7월 가을

한수 남쪽에서 대대적으로

군대를 사열했습니다


<라봉봉>백제의 진무장군도

기록으로 보아서는


'침착하고 굳세며

지략이 많아서

당시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는 기록과 같이

유능하고 훌륭한 장군이었던거 같으나

하필 고구려 국왕이

고구려 최전성기의 대왕,태왕이자

한국사의 위인인

광개토대왕이었다는게

안타까운 점입니다

서로의 능력치가 한쪽이 압도적으로

높을 경우에는

능력이 압도적으로 높은

사람의 국가,기반이 약하고

능력치가 압도적으로 낮은

사람의 국가,기반이 강하더라도

상황을 뒤집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능력치가 비슷비슷 하거나

한쪽이 약간정도 높다면

그때는 환경,국력,기반등의 영향도

크다고 할 수있는데

중국사에서는 중국사의 천재인

촉나라 제갈공명(제갈량)이

위나라 사마의보다는

능력이 약간 높았더라도

(사실 약간의 차이도 크기는 큽니다)


'사마의가 비록 공명(제갈량)을

이길수는 없어도

막아낼 수는 있었다'


는 말 같이 사마의도 제갈공명에 비해서

능력치는 부족하지만

압도적으로 능력치가 부족한 인물은 아니었고

제갈공명의 촉나라보다

사마의의 위나라가 국력이 압도적으로 높았기에

이는 가능했습니다


백제의 진무장군 역시 백제의 인물이라고 여겨지나

고구려는 막대한 영토의 강대국이었고

만약 고구려왕이 무능하거나 평범한 인물이었다면

진무장군의 공세등 역시 큰 효과를 볼 수있었겠으나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은 비범한 인물이었고


백제 최전성기 근초고왕때도 고구려가

패하긴 했어도 강국은 강국이었기에

함부로 고구려를 깊게 치려 하지는 못했는데

가뜩이나 무너지고 있었던 아신왕대에

백제에서는 말할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신왕이 태자 전지를 왜에 인질로

보냈다는 것은

일본측 기록이 허세가 심한거를

감안 하더라도

일본서기가 사실이라면

아신왕은 즉위때 왜의 도움을

받은 왕이었다고 할수있고

(사실로 보기 어렵다는 말도있습니다)


아신왕이 즉위때

왜의 도움을 받은게

거짓이던 사실이던

왜는 이미 백제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게 사실이기에


당시 고구려가 공격해오며

나라가 흔들릴정도로 위급했던

백제에서는

가까운 왜에 태자까지 보내며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보려 한다는 말이

있는거 같이

절박했던 상황이라 할 수있겠습니다


왜,일본을 고양이 손에 비유한다는 것은

오늘날 일본인들이 보기에

자존심 상해보일수도 있겠으나


실제로 당시 일본은 막

글자가 도입되던 시기에

정말 약했습니다,,

그러나 왜,일본 역시

영토가 넓고

섬이라 전쟁의 위협이 없었기에

왜군의 기본적 전략은

양으로 압도하려는 인해전술이나

일본섬에서 가까운 신라(경상도)를

노략질,약탈하고

도망치거나 하는 방식이었을거 같고

이도 발목을 잡아놓는다거나

은근 무시 못했던

전력이기에 백제도 왜의

중요성을 인식한거 같습니다


그러나 결국

문명이 발달하지 못하는 등

왜군은 백제 멸망때까지

질적인 한계가 있었고

결국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궤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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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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