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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신왕 7년

2월 봄

진무를 병관좌평으로 삼고

사두를 좌장으로 삼았습니다


3월

쌍현성을 쌓았습니다


8월 가을

아신왕이

고구려를 공격하려

군사를 출동해서

한산 북쪽 목책에 이르렀습니다


그날 밤에 큰 별이 떨어졌는데

진영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아신왕은 이를 매우 불안하게 생각해서

공격을 중지했다고 합니다,,


이에 계속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맞서려는 아신왕에게

하늘마저 그만 좀 하라고 경고를

줬던 모양이라는

웃지못할 해석도있습니다,,


아신왕은 백제 최고의 근성(끈기)왕으로

불리며 계속 광개토대왕에게

패하는 와중에도 이렇게

끊임없이 고구려를 공격하려 한거도

그 나름대로 숙부였던 진사왕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거나

그의 성격이거나 하겠습니다,,


9월

서울(수도)사람들을 모아서

서대 西臺 에서 활쏘기를 연습하게 했습니다


아신왕 8년

8월 가을

아신왕이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서

군사와 말을 대대적으로 징발하니

백성들이 병역을 고통스럽게 생각해서

많은 사람들이 신라로 도망했고

이 결과로 호구 戶口 (호적상 집의 수효와 식구 수)

가 줄었습니다


아신왕 9년

2월 봄

혜성이 규성과 누성 성좌에 나타났습니다


6월 여름

초하루(달의 첫번째 날) 경진일

일식이 있었습니다


아신왕 11년

큰 가뭄이 들어서

벼가 타들어가자

아신왕이 직접 횡악에서

기우제(가뭄에 비를 내려달라고 비는 제사,

물제라고도 불림)를 지내니

곧 비가 내렸습니다


5월

왜국(일본)에 사신을 보내서

큰 구슬을 요구했습니다


<라봉봉>마한(백제)인들은

금,보화,비단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고

(마한은 경기도,충청도,전라도 지역의

곡창지대,풍요로운지대에 자리잡아서

풍요에서 비롯된거 같습니다)

오직 구슬을 귀하게여겨서

옷에 장식하거나 귀나 목에

매달았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고

일본에서 구슬은 특산품이었다고도 하고

백제 전지왕대에는 왜에서

밤에 빛을 발하는 구슬,

야명주 夜明珠 (야광구슬 ??)도

받았다 하고

이런 구슬은 일본의 삼종신기[세가지 신기한 보물]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아신왕이 왜,일본에 큰 구슬을 요구했다는 것은

국난의 상황을 샤먼(무당),종교적인 권능으로

타개하려는 방편으로 삼고자 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백제 신하들>어라하(왕) !!

오랜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호구수가 줄고 가뭄이 들고 어려운 상황입니다,,


<아신왕>왜에 사신을 보내

큰 구슬을 보내라 하시오

그 구슬이 있다면 전지전능한

하늘께서 우리 백제를 보호할 것이니,,

(해석이 사실이라면

현실적 상황에서 해결하려 하는것이 아닌

종교적 방법에 의지하는 나쁜예)


고대인들 역시 사람이기에

훌륭한 분들도 계시나

의학도 고대에는 과학적인

치료방법이 아닌 주술등에

의지하려 했고

정치도 현실적인 방법이 아닌

이런 종교적인 방법에 의지하려

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부여를 계승한 백제는

왕족의 성씨가 부여씨였고

부여에는


'부여에서는 곡식이 익지 않으면(농사가 안되면)

왕에게 죄를 돌려서

왕을 죽여야 한다고 까지 했다'


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왕권이 약했고

부여를 계승한

백제 역시 그래서인지

혹은 1대왕,시조 온조왕과

열명의 신하(십제공신)들이

건국하고 귀족들의

권한이 강한 나라여서

왕권이 약했기에

다급해진 아신왕은

구슬같은 주술에 의지하며

국난을 타개하려한거 같습니다,,


아신왕 12년

2월 봄

왜국에서 사신이 오자

아신왕이 이들을 환영하고

위로했으며

특별히 후하게 대우했습니다


7월 가을

군사를 보내서

신라 변경을 침공했습니다


아신왕 14년

3월 봄

흰 기운이 왕궁 서쪽에서

일어났는데

마치 비단을 펼쳐놓은거 같았다고 합니다


9월 가을

아신왕이 붕어,사망했습니다


<라봉봉>백제 17대왕 아신왕은

재위시작부터 끝까지

모두 고구려 19대왕 광개토대왕의

재위기였고

아신왕도 은근 용자(용맹스러운),대장부 기질이

있던 왕이었던거 같으나

역시 광개토대왕 앞에서는

굴욕의 왕이었다고 할 수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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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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