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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18대왕 전지왕

재위기간 15년 405~420년


전지왕의


<김부식>혹은 직지라고도 한다


이름은 [양서(중국역사책)] 에서는

영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아신왕의 맏아들(첫째아들)로서

아신왕 재위 3년에 태자가 되었고

아신왕 6년에 왜국에 인질로 갔습니다


아신왕 14년에 아신왕이 붕어,사망하자

왕의 둘째 동생 훈해가 정사를 대리하며

태자의 귀국을 기다렸는데

왕의 막내 동생 설례 碟禮

(碟 는 가죽 다룰설,접시 접자로

설례, 혈례, 첩례 등으로 불리는거 같습니다)가

훈해를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었습니다


이 때 전지가 왜국에서 부고를 듣고

울면서 귀국을 요청하니

왜왕이 1백명의 군사로 하여금

그를 보호하여 귀국하게 했습니다


그가 국경에 이르자

한성사람 해충이 와서 고하기를


<해충>대왕이 죽은 후에

왕의 동생 첩례가 형을 죽이고

자기가 왕위에 올랐으니

태자께서는 경솔히 들어오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했습니다


전지가 왜인을 체류시켜 자기를 호위하게 하면서

바다 가운데의 섬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백성들이 첩례를 죽이고

전지를 맞이하여 왕위에 오르게 했습니다


전지왕의 왕비는 팔수부인이고

그녀는 아들 구이신(백제 19대왕 구이신왕)을 낳았습니다


<라봉봉>국내 상황이 안좋으면

외국,외세가 개입한다는 말같이


비록 백제가 키운 일본이지만

백제 정치가 혼란하면 혼란할 수록

왜(일본)의 영향력도

백제에 커지는 모습들이 보여집니다

당시 왜는 한국,백제에서

기술을 전수받던 시기이기에

왜가 강해서 백제에 이권을 개입했다기보다는

당시에는 나름 왜에서도 백제에 받은

기술등에 보답하는 의리의 마음이었다고 생각되고

실제로 백제와 왜는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오늘날까지 그 의리와 우정이 계속됩니다


전지왕 2년

정월(1월) 봄

왕이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고

왕남쪽 제단에서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내고

죄인들을 크게 사면했습니다


2월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9월 가을

전지왕은 자신을 왕위에 옹립,올렸던

해충을 달솔로 임명하고

한성의 벼 1천 석을 주었습니다


전지왕 3년

2월 봄

이복동생 여신을 내신좌평으로 임명하고

해수를 내법좌평으로 임명하고

해구를 병관좌평으로 임명하니

모두가 왕의 친척이었습니다


<백제 백성 1>아니 건길지(왕)의 친척들이

백제 요직들을 다해먹는 구만 !


<백제 백성 2>답이 없군,,

백제는 다른건

다 좋은데 정치가 쓰레기야 !


전지왕 4년

정월(1월) 봄

여신을 상좌평으로 임명해서

군사(군대)와 정사(정치나 행정)를 맡겼습니다


<김부식>상좌평이라는 직위가

이때부터 시작됬으니

지금의 재상과 같은 것이었다


기존에는 내신좌평이 좌평들중의 좌평,

좌평의 수장급이었으나

전지왕 4년 이때 상좌평 기록이 처음으로

시작되며 상좌평은 이후

백제 최고위 관직,수상직이 됬습니다


전지왕 5년

왜국이 사신을 파견해서

야명주(夜明珠 밤에 빛나는 구슬,야광구슬)

를 보내오니

전지왕이 특별히 예우했습니다


<라봉봉>구슬은 마한,백제에서 귀하게 여겨졌고

왕의 권능을 상징하거나

성스러운 도구라 여겨진것으로

보여진다고 하며

아신왕이 왜(일본)에 큰 구슬을

보내달라 했던거 같이

아신왕의 아들 전지왕 역시 아버지와 같이

왜에 야광구슬을 보내달라 한거같고

백제 아신왕과 전지왕 모두

고구려 광개토대왕~장수왕대의 왕으로

고구려 전성기 시절의 백제왕이었고

어려운 대외관계와 환경속에서

현실의 난을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종교적 권능에

의지하려 했던 모습으로 보여집니다,,


물론 결국 구슬은 보석일 뿐이며

기복신앙,복을 달라는 신앙에만 의지해서

현실의 정치를 외면한다면

결국 최악의 상황으로 이어지게됩니다,,


예전에도 백제 정치가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린다고 한 이유가

국가대신들을 혈족으로 임명하는게

이후에도 있었고(혈족중에도

유능한 사례도 있고

그렇다고해서

혈족이라해서 무조건적으로

나쁘다는 거는 아니지만

폐단이 있었다는 말)

실리를 챙기지 못하고 계속

다른 나라에게 이권을 뺏기는 점,

국난 상황에서 기복종교에 크게 의지한 점 등

안타깝고 무능한 모습들이 많습니다,,


신라가 통일을 했기에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라는 말같이

우리는 현재 신라 중심의 이야기들을

보고있다고 할 수밖에 없고

신라로 인해 만주가 뺏꼈다고

아쉬워 하며 신라를

싫어하시는 분들도

여럿 봤지만

신라는 정말 정치가 발달한 나라였습니다

승리한 자에게는 또한 그 이유가 있는 법이며

살아가며 올바른 시각을 가지려면

여러 사례들을 보고 여러 경험들을

체험에 봐야 합니다

역사에서는 승리자와 패배자,

성공한 사례와 실패한 사례를

모두 보아야 한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나마 백제 18대왕 전지왕대에

불행중 다행인것은

전지왕도 나름 아버지 백제 17대왕 아신왕의

무리한 고구려 공격 실패등에 느낀것이 있었는지

한창 강했던 때의 고구려를 공격하지는 않고

조용히 있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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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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