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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해 이사금대의 백제와의 와산성 *공방전>


(*공방전 攻防戰 서로 공격하고 방어하는 싸움)


탈해 이사금 10년

백제가 와산성을 공격해서 점령하고

2백명을 그곳에 남겨서 거주시키며 수비하게 했으나

얼마되지 않아서 우리(신라)가 이 땅을 다시 빼앗았습니다


탈해 이사금 11년

정월(1월) 봄

박씨의 귀척 貴戚 (임금의 인척)으로 하여금

국내의 주와 군을 나누어 다스리게 했습니다

그 직위를 각각 주주와 군주라고 불렀습니다


2월

순정을 이벌찬(신라 최고위직)으로 임명해서

정사를 맡겼습니다


탈해 이사금 14년

백제가 침범했습니다


탈해 이사금 17년

왜인이 목출도 木出島 를 침범했습니다

탈해 이사금이 각간 우오를 보내서 방어토록 했으나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우오가 전사했습니다


탈해 이사금 18년

8월 가을

백제가 변경을 약탈하므로

군사를 보내서 이를 방어했습니다


탈해이사금 19년

큰 가뭄이 들었습니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풀어 구제했습니다


10월 겨울

백제가 서쪽 와산성을 공격해서

점령했습니다


탈해 이사금 20년

9월 가을

군사를 보내서 백제를 공격해서

와산성을 다시 찾았습니다

백제에서 와서 살고있던 2백명을 모두 죽였습니다


탈해 이사금 21년

8월 가을

아찬 길문이 가야 군사를 상대로 황산진 입구에서 싸워서

1천여명을 죽였습니다

길문을 파진찬으로 임명해서

그 전공에 해당하는 상을 주었습니다


탈해 이사금 23년

2월 봄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가

다시 북쪽에 나타나더니

20일만에 사라졌습니다


탈해 이사금 24년

4월 여름

서울에 큰 바람이 불어서

금성 동문이 저절로 무너졌습니다


8월 가을

탈해 이사금이 붕어(사망)했습니다

성의 북쪽 양정 언덕에 장사지냈습니다


<라봉봉>그렇게 탈해 이사금대에는 계속 백제와 충돌 기록이 있었고

초기 신라와 초기 백제였으나

두 한국은 초기부터 계속된 충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아직까지는 양국 모두 중압집권국가가 되기 전이고

옛 시대라 대규모 군사충돌보다는

소규모 규모의 전투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 계속해서 신라는 백제,왜(일본),가야 세 세력을 상대해야 했고

한 나라를 상대하기도 힘들었을 것인데

이렇게 3나라 사이에서 계속 조용히 내실을 다지며

꾸준히 명맥을 유지했을 것이고

초기 신라는 동남쪽 구석에 위치해 중국과의 교류가 어려웠고

선진 문물의 수용이 늦었고 이렇게 주변 세력들의

집단적 견제가 있었고

그나마 탈해 이사금대에는 이런것들을 방어해냈으나

이후 신라 왕때에는 여러 굴욕적인 사건들이 많았습니다,,

(근데 이런 악조건속에서도 늦었지만 제대로된 개혁을 이뤄내고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하는 나라는 신라이기에

인물의 중요성을 크게 느낍니다,,)


의외로 탈해 이사금대의 큰 기록이나 업적등은

별로 없는 것으로 보이나

영리했던 탈해 이사금의 성격상

그는 꾸준히 신라의 내실을 다지며 조용히 신라의

국력을 키워갔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게 탈해 이사금은 박씨 왕조인 신라에

최초로 석씨로서 왕이 되며

여러 신라 내정을 개혁하고 박씨,석씨,김씨가 왕이 될 수 있는

혈연이 아닌 능력으로 왕이 될 수 있어서

오늘날 민주정과도 일맥상통하는

독특한 신라의 시스템을 만든 인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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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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