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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이야기와 이어집니다,,


<남해 차차웅의 사위가 된 석탈해>


그렇게 석탈해는 꾀를 써서

신라 재상 호공의 집을 탈취하고 그곳에서 살게 되었고,,


석탈해가 어질다는 소문이 나자

남해 차차웅은 자기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습니다


<석탈해>출 ☆ 세 했당 ! 엄마 !


<라봉봉>단순히 어질다는 소문 이외에도

그가 간악한 꾀 역시 있었다고 할 수 있기에

또 비범한 인물이기는 했기에

신라인들이 그를 높게 여기기도 하면서도

또한 두려워 했을거 같고

이에 석탈해 역시 꾀로 신라 재상 호공의 좋은 집을 탈취했으니

이제는 그것을 굳히기에 들어가야해서

주변사람들에게 좋은 모습으로 보이려고 행동한게 아닐까 싶고

어질다는 소문으로 이어진게 아닐까 싶습니다


원래 장사,사업을 할때에도 무조건적으로

이익만 보려한다기 보다는

적당히 주변 사람들에게 베풀면서 자신의 몫을 챙기는게

사업의 방법이라 배운거 같고

만약 절대 손해를 보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려 한다면

그것은 '장사꾼'이고

주변사람들에게 적당히 베풀면서 (물론 자신의 것을 챙기지 못하면

그것은 사업이 아니라 자선가일 것입니다,,)

자신의 몫을 챙겨가며 주변 사회에 기여하는게 '사업가'라고 배운거 같고

장사꾼보다는 사업가가 되라는 이야기를 본 거 같습니다


석탈해 역시 부지런히 고기잡이를 하며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고

부지런히 학문에 전념하며 이런 사업의 생리를 꿰뚤어 봤고

호공의 집을 빼앗고 나서부터는

최대한 주변 사람들에게 베풀며('그래도 남는 장사니까'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빼앗은 호공의 집을 자신의 것으로

굳히기 작업에 들어간게 아닐까 싶고

이에 신라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기도 하며 또한 그가 뿌리는 뇌물(??)들을 받으며

또 점점 그가 그 집을 공인받고 귀한 집에서 사는 인물이었기에

점점 그가 어질다는 소문,평판들이 신라 사회에 퍼져나간게 아닐까 싶고

사실 인간의 본성이나 행실은 자연히 변해가게 되거나

천천히 변해가는 것이겠지만 가끔 이렇게 빵 뜰때도 있는거 같고

연예인,개그맨 등으로 성공한 인물들이나

신흥 부자들 역시 처음엔 딴따라,광대,졸부라고 욕먹기도 하나

이후에는 결국 그들이 자리를 잡아가며

사람들이 그들을 높여 이야기 하는 사례가 있듯이

(물론 뜬 경우에도 평소의 잘못된 인성이 있었다면

이후에 발목을 잡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괜히 평소 행실보다 더 미화된 이야기들이 나돌 수도 있는거 같고

석탈해 역시 그런 수혜로 점점 어질다는 소문이 난게 아닐까 싶습니다


옛 짧은 기록으로 이런 예리한 분석을 하는

저는 천재같습니다 핳핳핳

(너무 글을 잘써서 죄송합니다 핳하핳하하핳)


<최초의 석씨 신라왕이 된 석탈해>


남해 차차웅 7년에

남해 차차웅은 석탈해를 '대보 大輔 (재상, 오늘날 국무총리격으로

왕 바로 다음 벼슬)'로 임명하고

정사를 맡겼습니다


그리고 남해 차차웅의 다음 왕인

남해 차차웅의 아들이었던 유리 이사금이

죽음을 눈 앞에 두고 말했습니다


<유리 이사금>선왕(남해 차차웅)은


'내가 죽은 후에 아들(유리 이사금 자신)과

사위(석탈해)를 막론하고

나이가 많고 현명한 자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라'


고 유언 하셨다

이리하여 내가 먼저 왕위에 올랐다

이제는 마땅히 왕위를 탈해에게 전해야 할 것이다


또 삼국사기 유리 이사금 기록에서는

유리 이사금이 병환이 나자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리 이사금>탈해는 신분이 국척 國戚 (임금의 인척, 석탈해는

남해 차차웅의 사위였습니다) 이요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고

공을 여러 번 세웠다

나의 두 아들은 재능이 그를 따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내가 죽은 뒤에는 탈해를 왕위에 오르게 하라

나의 유언을 잊지 말라


그렇게 유리 이사금이 사망하자

석탈해는 62세의 나이로,,

신라 4대왕이 되었습니다


<라봉봉>석탈해 역시 오랜 기다림의 근성의 사나이로 보이고

굳이 남해 차차웅의 아들 유리를 제치고 왕위에 오르는

무리수를 두지는 않고 그를 보필하고 국사에 전념하며

공들을 세우며 비록 62세의 나이에 왕위를 이었지만

늦었음에도 안전한 방법으로 성씨가 박씨가 아님에도 왕위에 올라

초기 신라의 기틀을 잡은 인물로 보이고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굳이 신라를 멸망시키거나 하지 않고

'박씨만의 신라'가 아닌

'석씨도 왕이 될 수 있는 신라'를 만든 인물이었고

이는 혈연이 아닌 능력으로 국가 지도자가 될 수 있는

'민주정'과도 일맥상통한 모습으로

석탈해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좋은 선례를 남기며

이런 전통을 만들어 냈고

신라의 이런 민주정과 닮아있는 전통은

비록 골품제같이 혈연으로 꽉 막힌 악습도 있었지만

이렇게 여러 성씨가 왕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은

능력중심 사회임을 뜻하기도 하고

비록 신라가 한국 동남쪽 구석에서 시작해서

문물의 발전이 늦었다 하더라도 이런 모습은

신라 발전의 큰 도움을 주었다고도 할 수 있는거 같습니다


석탈해는 보통 인물이 아니었기에

왕이 된 이후에도 함부로 소위 말하는 '물갈이'를 하며

반대파를 찍어누르지는 않았을거 같고

(물론 자신의 세력등으로 인사들을 했을 것이겠고

반대파 역시 찍어눌렀을 가능성도 있겠으나

반대파를 크게 찍어내리고 그럴 인물이었다면 애초에 

오랜 기다림이 아닌 반란을 일으켰을 인물이 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후에도 신라를 유지하고 이어가는 모습등을 보이며

전혀 새로운 석씨만의 나라가 아닌 다시 박씨가 왕이 되기도 하고

하는 그런 국정운영을 했던거 같습니다

신라 정치는 꽤나 특이하고 민주적인 모습들도 있는데

아쉽게도 이런 좋은 전통은 고려,조선시대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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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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