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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 이사금 23년

8월 가을

음즙벌국(혹은 음집벌국)과 실직곡국이

국경 문제로 다투다가

파사 이사금에게 와서 결정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것은 신라가 아직은 작은 나라였지만

건국때부터 여러 인물들이 나오고 발전하며

당대 한국 동남쪽 일대에서는

지역 맹주 역활을 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파사 이사금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여기고

금관국(금관가야) 수로왕이 나이가 많고

아는 것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를 불러와 물었습니다


수로왕이 의견을 내서

다투던 땅을 음집벌국에 주도록 했습니다


이에 파사 이사금은

6부(신라 여섯마을)로 하여금

수로왕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도록 했습니다


5부(신라 다섯마을)은 모두 이찬을 우두머리로 삼았는데

오직 한기부(배씨 성씨들의 한기 마을이라 보면 됩니다)만은

직위가 낮은 자를 우두머리로 삼았습니다


수로왕이 노해서

그의 종 탐하리를 시켜서 한기부의

우두머리 보제를 죽이고 돌아갔습니다


(즉 다른 신라 5마을들은 고위 우두머리로

가야 수로왕을 접대했는데

한기 마을만 우두머리 보제가 직접 나오지 않고

직위가 낮은자를 보내 접대해서

수로왕이 한기 마을 우두머리 보제를 죽이고 돌아갔다는 것이고

수로왕 역시 신라가 일어나는 것에 나름 예의 주시하며 하는

입장이었으나 전통적인 강국은 가야였는데

신라 마을들 중 하나가 너무 거만을 떨자

자신의 위엄,카리스마가 상처가 난 것으로 인식한 수로왕은

분노해서 신라 마을 촌장을 죽이고 돌아간게 아닐까 싶습니다)


(한기 마을) 보제의 종이 도망쳐서

음집벌주(음집벌국) 타추간 陁鄒干 의 집에 의탁했습니다

파사 이사금이 사람을 보내서 그 종을 찾았으나

타추 陁鄒 가 돌려보내지 않았습니다 (간 干 은 신라 거서간에서도

간 干 자로 나오고 고대 부족사회의 족장이나 국왕의

호칭이라는데 발음상 징키스칸같이

칸 ,지도자를 뜻하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파사 이사금이 노해서

군사를 동원해서 음집벌국을 공격하니

그 우두머리가 자기의 무리와 함께 스스로 항복했습니다

실직,압독 두 나라 왕이 항복해왔습니다


10월 겨울

복숭아와 오얏나무(자두나무) 꽃이 피었습니다


<라봉봉>이런 파사 이사금 당대의 이야기는

여러 한국 동남쪽 국가들의 이해관계들과 패권등 여러 문제들이

얽혀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크게 본다면 전통적인 한국 동남쪽 강국이었던 가야는

신라가 일어남에 이에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파사 이사금 역시 두 소국들이 국경문제를

당대 한국 동남쪽 맹주가 되어가던 신라 파사 이사금에게 부탁하자

파사 이사금은 나름 전통적 강국 가야의 눈치를 봐서

가야 수로왕을 초대해서 의견을 묻고 연회를 베풀게 된 것같습니다

그러나 파사 이사금의 신라측에서도 수로왕을 진심으로 환대한다는

연회나 그에게 굽히려는 연회라는 의미가 아니라

가야의 정세를 살피고 신라가 강함을 들어내는

의미로 베푼 연회가 아니었을까 싶고

만약 신라인들이 정말 수로왕을 두려워했다면

모든 신라 여섯 마을 촌장들이 제대로 그를 대접했겠지만

한 마을에서 낮은 직위의 사람을 보내서

수로왕에게 망신을 주었다고 할 수 있고

이에 수로왕은 분노해서 그 마을 촌장을 잡아 죽였으나

그 촌장의 종이 도망쳐서 소국 음집벌국으로 숨어들었고

이 기회를 틈타 나름 명분으로 해서 파사 이사금은

음집벌국을 점령하고 영토를 크게 넓히게 된거 같습니다

애초에 신라는 가야에 굽혀주거나 예우해주는 제스쳐를 취하면서도

틈틈히 한국 동남쪽의 패자,맹주가 될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가야 수로왕을 푸대접한 신라 촌장 집안의 종이 다른 소국으로 숨어들어갔다는 것은

적당히 가야의 눈치를 보며 영토를 확장할 좋은 명분이었기에

음집벌국은 경주부근이었다고 하나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신라는 경주영역,마을 정도가 아니라

경주바깥 '영토'를 획득하게 되며

기존에 농업을 장려하고 군사력 증강을 꾀했던 준비들이

그 결실을 맺었다고 할 수 있고


이는 다소 제국주의적으로 볼 수 가 있으나

당대 한국은 애초에 하나였는데

여러 갈래로 찢겨져 있던 상황이어서

나름 지역 우두머리가 나타나면 수월하게 통합이 되는 수준이었기에

세계 열강들의 제국주의적 행태로 보기보다는

민족 통합적 모습으로 해석될 수가 있고

아무래도 말도 통하고 원래 하나였고 같은 민족,

정서를 공유하는 입장들은 원래 하나라는 명분도 있고

대게 통합이 수월했고

전혀 다른 민족, 다른 문화권의 통합은 격렬한 저항과 반대 등으로

통합이 어려웠으며 제국주의적 행보로 보여질 수가 있었습니다


비슷한 사례로는 중국 분열기때 중국 수나라는

대충 위협해주면 항복하고,, 수월하게 중국을 통일했는데

이후 통일 중국의 국력으로 한국 고구려를 칠때에는

고구려인들의 격렬한 저항에

수나라 입장에서는

옛날 중국 통일기때같이 대충 크고 무섭게 보이면 항복했던

중국 국가들과 달리 한국 고구려인들의 강력한 저항에 

전혀 다른 양상의 전투를 하며

극심한 피로감으로 이어졌고 이에 수나라가 멸망했다는 사례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고

이렇게 언어가 같고 정서가 같은 같은 민족끼리의 통합은

대게 한국 삼국시대 초창기 고구려,백제,신라 중심으로

북쪽,서쪽,동쪽에서 이렇게 이뤄졌다고 할 수 있고

이때는 꽤나 수월했고

문제는 고구려,백제,신라는 같은 한민족임에도

삼국시대 초창기 한국에 있었던 여러 소국들과 달리

삼국은 모두 수준높은 문화와 역사,전통을 가진 국가들이었기에

이후 삼국통일기때는 그 전쟁양상이

매우 격렬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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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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