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눌지 마립간 9년

정월(1월) 봄

큰 바람이 불어서 나무가 뽑혔습니다


2월

역대의 능원을 보수했습니다


4월

눌지 마립간이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신라에 와있는 고구려인들>신라는 참 특이한 나라야

지금 마립간은 김씨인데 박씨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다니,,


눌지 마립간 20년

4월 여름

우박이 내렸습니다


죄수를 재심사했습니다


눌지 마립간 22년

4월 여름

우두군 牛頭郡 (소 머리 고을 ??, 춘천지방이라고 합니다) 에서

산골물이 갑자기 불어나서

50여 호(집)가 떠내려 갔습니다


서울(수도)에 큰 바람이 불고 우박이 내렸습니다


백성들에게 우차 牛車 (소달구지, 소가 끄는 수레) 만드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신라 관리들>백성 여러분 이렇게 하면 소에게 짐끄는

일을 시킬 수 있어요 !


<신라 백성들>이로 인해 일이 편해져서 수많은 혁신이 일어나겠군,,

그러나 그로 인해 수많은 일자리가 사라지겠지,,

과학 발전의 무서움은 어디까지일까,,


눌지 마립간 24년

왜인이 남쪽 변경을 침범해서

가축을 약탈해갔습니다


6월 여름

(왜인이) 동쪽 변경을 다시 침범했습니다


눌지 마립간 25년

2월 봄

사물현에서 흰빛깔의 꼬리가 긴 꿩을 진상했습니다

눌지 마립간이 이를 가상하게 여겨서

그 현의 관리에게 곡식을 하사했습니다


눌지 마립간 28년

4월 여름

왜병이 금성을 열흘동안 포위하다가

식량이 떨어지자 돌아갔습니다

눌지 마립간이 군사를 보내서 추격하려 하자

측근(곁에서 가까이 모시는 사람)들이,,


<눌지 마립간의 측근들>병가(군사학계)의 말에


'궁한(가난하고 어려운) 도적을 추격하지 말라'


고 하였으니

마립간께서는 그들을 내버려 두십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도둑도 도망갈 틈을 주고 잡아야된다'라는

말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눌지 마립간은 이를 듣지 않고

수천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해서 독산 동쪽에 이르러

접전했습니다


눌지 마립간이 이 전투에서 적에게 패해서

죽은 장병이 절반이 넘었습니다


눌지 마립간은 당황해서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적(왜병)이 여러 겹으로 산을 포위했습니다

이 때 갑자기 어두운 안개가 끼어서 지척을 분별할 수 없게 됬습니다

적은 하늘이 왕을 돕는다고 생각해서

군사를 거두어 물러갔습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나름 눌지 마립간도 측근들의 말을 안듣고

왜병을 섬멸하려 했는데 왜 역시 반격이 만만치 않았고

이에 눌지 마립간이 위기에 몰렸으나

현실적으로 식량이 떨어져서 도망가던 왜병 입장에서도

그렇다고 신라군에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이 아니었기에

물러간 것으로 보입니다)


눌지 마립간 34년

7월 가을

고구려의 변방 장수가 실직벌(벌=언덕=들판으로

실직벌=강원 삼척지방)에서 사냥하고 있었는데

(신라) 하슬라(강원도 강릉지역) 성주 삼직이 군사를 보내서

그를 습격해서 죽였습니다


고구려왕(고구려 20대왕 장수왕[고구려 최전성기 왕중 한명)이

이를 듣고 분노해서

사신을 보내서


<장수왕>내가 대왕과 더불어 우호 관계를 맺어

매우 기뻐하였는데

이제 군사를 보내 우리 변경의 장수를 죽였으니

이는 무슨 도리인가 ?


라고 말하고

즉시 군대를 동원해서 우리나라(신라)의 서쪽 변경을

침범했습니다


눌지 마립간이 겸손한 말로 사과하자

그들이 돌아갔습니다


(우발적인 사건이라기보다

눌지 마립간의 고구려 영향에서 벗어나려했던

'반 고구려 정책'이 표면으로

들어난 사건이라 할 수 있는거 같고

눌지 마립간도 당장에는 전성기였고

당대 초강대국이었던 고구려 장수왕에게

'겸손한 말' 로 사과했으나

신라와 백제가 '나제동맹'을 맺은 이후부터는

점점 '고구려 천하관'에서 신라와 백제가

이탈해 가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눌지 마립간 37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습니다


7월 가을

이리떼가 시림 始林 (=계림 鷄林 = 닭의 숲) 에 들어왔습니다


눌지 마립간 38년

7월 가을

서리와 우박이 내려서 곡식이 죽었습니다


8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했습니다


<눌지 마립간>드디어 고구려가 우리의 반 고구려 정책에

대한 눈치를 챘군,,

이제부터는 모두 단디(단단히) 각오하라 이기야 !


눌지 마립간 39년

10월 겨울

고구려가 백제를 침범하므로

눌지 마립간이 군사를 보내서 (백제를) 구원했습니다


<신라군들>이로서 우리는 고구려에 맞설것이다,,

백제인들 그대는 한때의 적이었지만 현재는 우리의 친구,,


<백제군들>(이래도 되는것인가 싶지만 우리도 급하니깐,,) 고맙구먼,,


눌지 마립간 41년

2월 봄

큰 바람이 불어서 나무가 뽑혔습니다


4월 여름

서리가 내려서 보리를 상하게 했습니다


눌지 마립간 42년

2월 봄

지진이 발생해서

금성 남문이 저절로 무너졌습니다


8월 가을

눌지 마립간이 붕어,사망했습니다



<라봉봉>눌지 마립간대의 신라는 고구려의 오랜 내정간섭에

반 고구려 풍조가 팽배해졌던 것으로 보이며

일본측 기록인 '일본서기'에는 당대 상황에 대해서


고구려 왕이 정예병사 1백명을 보내서 신라를 지키게(사실상 내정간섭의

목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했고

그러다 고구려 병사가 휴가갈때 신라인을 말끄는 마부로 삼았는데

고구려 병사가 '너희나라(신라)가 우리(고구려)의 땅이 될 날이

멀지 않았다' 고했고 이에 신라인 마부는 배아프다는 핑계로

물러나서 신라로 도망가서 들은바를 말했고

눌지 마립간은 이에 고구려가 거짓으로 지켜주는 줄 알고

사신을 보내서 급하게 신라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여 집안에서 기르는 수탉(고구려인들은

머리에 조우관[깃털관]을 쓰고다녔고

고구려인을 비유한 암호일 것입니다) 을 죽여라 !'


이에 신라인들이 나라안에 있는 고구려인들을 모두 죽였고

간신히 살아남은 고구려인 1명이 틈을타서 빠져나갔고

고구려 장수왕은 격노해서 군사를 일으켰으나

신라는 가야왕에게 원군을 청해서 고구려군을 물리쳤다고 하고


비록 고구려병사의 말 하나로 일어난거라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미 신라 내부에서는 오랜 고구려의 정치간섭으로

반 고구려 풍조가 팽배했던것으로 보이고

이런 사건의 도화선이 되었던 사건으로 보입니다


이로 인해 신라는 고구려에 정면으로 맞서게 되었고

역시 고구려에 나라가 풍전등화(바람 앞의 등불)의 위기였던

백제 역시 고구려에 맞서 신라와 한마음으로 고구려군에

맞선 것으로 보이고

고구려 역시 백제나 신라 1vs1 구도였다면 무난히 이겼을 것인데

두 나라가 연합을 하자 남방 국경선 역시

중국과의 국경선 못지않게 부담스러운 상황이 됬고

이에 고구려 정예군,전선을 두개로 나눠야 했기에

부담이 커졌던 상황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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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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