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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18대왕 실성 이사금

재위기간 15년 402~417년


실성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알지(김알지)의 후손이며

대서지(김대서지) 이찬(신라 2등 벼슬)의 아들입니다

어머니 이리부인은 (母伊利夫人 모이리부인)


<김부식>이 伊 를 기 企 라고도 한다


석등보 아간 阿干 (아간=아찬, 신라 6등벼슬)의 딸입니다

왕비는 미추왕(미추 이사금 김미추)의 딸입니다


실성은 키가 7척 5촌 (172.5cm 정도, 1척=23cm, 1촌=2.3cm)이요

총명해서 미래를 예견한다는 식견이 있었습니다

내물(내물 이사금 김내물)이 붕어(사망)했으나

그의 아들이 어렸기 때문에

백성들이 실성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했습니다


<라봉봉>실성 이사금 김실성은 즉위전

내물 이사금 김내물대에 내물 이사금의 아들은 아니었으나

신라 2등벼슬인 이찬 대서지의 아들로서 즉 신라 고위귀족의

아들로서 고구려의 인질로 간 적이 있었고

이로인해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서

백제,가야,왜 삼인방에게 당하고 있을때

고구려의 구원군으로 인해 신라는 위기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고

고구려 입장이나 신라 내에서도 고구려에 인질로 간

김실성의 역활이 컸다고 할 수가 있었고

고구려 역시 백제나 신라를 멸망시킬정도의

여력은 부족했는데

남방의 백제를 견제할 세력은

신라라는 사실을 알았고 이에 신라에

고구려 군사를 주둔시키며 신라를 남방 거점으로

삼으려 했던 것으로 보이고

이 상황에서 고구려 왕실에서도

신라 왕족 김실성을 적극적으로 밀어서

친 고구려 성향의 인물을 왕위에 앉히려 했고

이에 김실성이 신라에 돌아온 후 왕위에 올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김실성은 '총명하여 미래를 예견하는 식견이 있었다' 라는 기록같이

인질로 고구려에 간 상황에서도

신라 내부의 상황을 듣고 고구려 유력자들과 접촉하며

왕위를 노렸을 수도 있고

이상한 점은

그가 신라로 돌아온 후 곧 내물 이사금이 사망했는데

이에 내물 이사금이 고구려에 암살당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미 47년을 재위한 인물이기에 암살보다는

수명이 다해 사망했다고 보면 될거 같고

이렇게 내물 이사금 사후 내물 이사금의 아들이 어린 것과

고구려 세력의 지원등으로 왕위에 오른 인물로 보여집니다


실성 이사금 원년(1년)

3월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내물왕(내물 이사금)의 아들 미사흔을 인질로 보냈습니다


<실성 이사금>다르게 생각하지는 말게나

나도 인질생활을 해봤고

이는 '우호'를 위한 것이네


<신라 신하들>,,(이사금께서

너무 시작부터 전 이사금의 아들들 견제하는 것이 아닌가 싶군,,)


(사실 실성 이사금 입장에서는 본인의 자식도 아니고

전 왕이었던 내물 이사금이 자신의 아버지도 아니었는데

이에 내물 이사금의 아들들을 인질로 보내서

명목적으로는 '우호관계' 때문이었겠지만

누가봐도 전 왕의 아들들에 대한 '견제'라고 할 수 있었고

더 깊게 생각해보면

실성 이사금 본인 스스로도

내물 이사금때 내물 이사금에 의해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졌기에

고구려에서 인질생활을 마치고 신라로 돌아와서

왕이 된 실성 이사금은 역으로 내물 이사금의 자식들에게

자신이 당한것을 그대로 반복하는 '복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 다음 기록인 눌지 마립간 기록때는

실성이 내물이 자신을 외국에

인질로 보낸 것을 원망해서 그의 자식들을

죽임으로서 원한을 풀려했다고 합니다,,)


실성 이사금 2년

정월(1월) 봄

미사품을 서불한(=이벌찬, 신라 1등벼슬)에 임명하고

군사와 정치에 관한 일을 맡겼습니다


7월 가을

백제가 변경을 침략했습니다


실성 이사금 3년

2월 봄

실성 이사금이 직접 시조묘에 참배했습니다


실성 이사금 4년

4월 여름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는데

실성 이사금이 기병을 거느리고

독산 남쪽에서 요격(반격)했으며

다시 싸워서 그들을 격파하고

3백여 명을 죽였습니다


실성 이사금 5년

7월 가을

서쪽 지방에 메뚜기 떼가 나타나서 곡식을 해쳤습니다


10월 겨울

서울에 지진이 있었습니다


11월

얼음이 얼지 않았습니다


실성 이사금 6년

3월 봄

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략하고

6월 여름에

다시 남쪽 변경을 침범해서

1백명을 잡아갔습니다


실성 이사금 7년

2월 봄

실성 이사금은 왜인이 대마도에 병영을 설치하고

병기와 군량을 저축해서

우리나라(신라)를 습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그들이 공격해 오기 전에

먼저 정병(정예군사)을 뽑아

그들의 군사시설을 공격하고자 했습니다


서불한(=이벌찬, 신라 1등벼슬) 미사품이 말했습니다


<미사품>저는


'병기란 흉물스런 도구요,

전쟁이란 위험한 일이다'


라고 들었습니다

황차(하물며) 큰 바다를 건너 타국을 공격하는 것이야말로

이보다 더할 것입니다


만일 실패한다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니

차라리 험난한 지형을 찾아 요새를 설치하였다가

적이 올 때 이를 막아

침범하지 못하게 하고

우리에게 유리할 때 나가서 사로잡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내가 남을 끌어 당길지언정

남에게 끌려 다니지 않아야 한다'


는 것이니

책략중에 상책입니다


(이에) 실성 이사금이 이 의견을 따랐습니다


실성 이사금 11년

내물왕의 아들 복호를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습니다


<실성 이사금>나도 내물 이사금에 의해

고구려에 인질로 가봤는데

그리 나쁘지 않았고

또 고구려가 강성한데 잘 지내놔야하지 않겠노 ?


<신라 신하들>,,(이제는 대놓고 보내시는군,,)


실성 이사금 12년

8월 가을

낭산에 구름이 피어올라서

누각처럼 보였고

향기가 퍼져서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실성 이사금이


<실성 이사금>이는 틀림없이 신선이 내려와 노는 것이니

응당 복스러운 땅이다


라고 해서

그후로 이 곳에서

벌목(나무 베기)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평양주 대교(다리)를 새로 축성했습니다


실성 이사금 14년

7월 가을

실성 이사금이 혈성벌(벌=들,언덕,벌판)에서 크게 군대를 사열하고

또한 금성 남문에 행차해서 활쏘기를 관람했습니다


8월

왜인과 풍도에서 싸워서 승리했습니다


실성 이사금 15년

3월 봄

동해변에서 큰 물고기를 잡았는데

뿔이 있고

수레에 가득 찰 만큼 컸습니다


5월 여름

토함산이 무너지고

샘물이 세 길(1길=10척=2.3m로 3길=6.9m)높이로 솟아 올랐습니다


실성 이사금 16년

5월 여름

실성 이사금이 붕어,사망했습니다


<라봉봉>그렇게 고구려에 가서 인질생활까지 했던

실성 이사금은 나름 영민하게 처신해서

고구려 유력자들과 인맥도 터놓고

이런 영향등으로 신라에 돌아와서 왕위에 오르게 된 인물로 보이고

그러나 인질생활에 대한 트라우마,고통이 컸는지

왕이 되자마자 자신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던

내물 이사금 때문에 내물 이사금의 아들들을 인질로 보내게 된 거 같고

나름 신라 사회에서 이것이 왕이 대놓고 전왕의

아들들을 견제하는 것임을 분명 알았을 것임에도

실성 이사금 스스로도 인질생활을 했다는 점 때문에

딱히 실성 이사금에 대한 반발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결국 실성 이사금은

내물 이사금의 아들을 정말 죽이려 하다가

역으로 자신이 죽게되었고

이 이야기는 다음 기록에 자세히 나오게 됩니다,,


나름 성격적으로 쾌활하고 영민했던 인물이나

왕위에 오르고 나서도 선왕에 대한 원망심이 커서

스스로 화를 부르게 된 인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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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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