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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16대와 흘해 이사금

재위기간 46년 310~356년


흘해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나해왕(=내해왕, 신라 10대왕 내해 이사금 석내해)의 손자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우로(석우로) 각간(=이벌찬, 신라 1등벼슬)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명원부인이니

조분왕(신라 11대왕 조분 이사금 석조분)의 딸입니다

(조분 이사금은 내해 이사금의 아들은 아니었고

다른 친척이지만 가까운 친척이었고 즉

근친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근친혼에 대한 위험성은 예전에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우로(석우로)는 임금을 섬기는 데에 공로가 있었으므로

여러 번 서불한(=각간=이벌찬, 신라 1등벼슬)이 됬습니다

그(석우로)는 아들 흘해의 용모가 준수하며

심기가 강직하고 두뇌가 명민해서

일을 처리하는 것이 보통 사람과 다른 것을 보고

여러 제후들에게 말했습니다


<석우로>내 집안을 흥하게 할 자는

반드시 이 아이다


이때

기림(신라 15대왕 기림 이사금 석기림)이 죽고

아들이 없었습니다


여러 신하들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신라 신하들>흘해가 어리기는 하지만

나이든 사람이 갖출 수 있는 덕을 지녔다


라 하고 그를 받들어서 왕으로 세웠습니다


흘해 이사금 2년

정월 봄

급리를 아찬(신라 6등벼슬)으로 삼아서

중요한 정사를 맡기고

내외 병마사를 겸하게 했습니다


2월

흘해 이사금이 시조묘에 직접 제사를 지냈습니다


흘해 이사금 3년

3월 봄

왜국 왕이 사신을 보내서

자기 아들의 혼처를 요청하자

아찬(신라 6등벼슬) 급리의 딸을 보냈습니다


흘해 이사금 4년

7월 가을

가뭄이 들고 메뚜기 떼가 나타났습니다

백성들이 굶주리자

특사를 보내서 그들을 구제하도록 했습니다


흘해 이사금 5년

정월(1월) 봄

아찬(신라 6등벼슬) 급리를 이찬(신라 2등벼슬)에

임명했습니다


2월

궁궐을 중수(건축물 따위의 낡고 헌 것을 손질하며 고치다)하는데

비가 오지 않으므로 이를 중단했습니다


흘해 이사금 8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습니다


흘해 이사금이 직접 죄수를 재심사해서

많이 석방했습니다


흘해 이사금 9년

2월 봄

흘해 이사금이 명령을 내리기를


<흘해 이사금>지난해에는 가뭄으로

농사가 잘 되지 못하였다

이제 땅이 기름지고 생기가 돌아

농사가 바야흐로 시작되었으니

백서들을 노역시키는 일을

모두 중단하라


라고 했습니다


흘해 이사금 21년

처음으로 벽골지(전라북도 김제시의 저수지인데

신라가 이곳까지 가기는 어려웠고

백제의 영역이었다고 할 수 있기에

같은 이름의 지역 저수지 같습니다)에 물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둑의 길이가 1천 8백보 였습니다


흘해 이사금 28년

2월 봄

사신을 보내서 백제를 예방(예를 갖추는 의미로

인사차 방문)했습니다


3월

우박이 내렸습니다


4월 여름

서리가 내렸습니다


흘해 이사금 35년

2월 봄

왜국이 사신을 보내서 청혼했으나

딸이 이미 출가했다는 이유로 거절했습니다


(왜[일본]는 한국에서 전해져 오는 문물들이

간절했기에 어떻게든 한국과 관계를 맺으려 했고

이렇게 가까운 신라에 여러 러브콜을 보낸거 같으나

정작 왜를 크게 도와준 나라는 가야와 백제나 고구려였습니다)


4월 여름

폭풍이 불어서 대궐 남쪽의 큰 나무가 뽑혔습니다


흘해 이사금 36년

정월(1월) 봄

강세를 이벌찬(신라 1등벼슬)에 임명했습니다


2월

왜왕이 절교 絕交 (서로의 교제를 끊음,

저 어렸을때 유행한 말인데

오랬만에 보니 반가운 ?? 말입니다,,

친구들끼리 '너랑 절교할거야 !' 이러고 논듯요,,)

한다는 글을 보내왔습니다


(倭王移書絶交 왜왕이서절교)


<왜인들>우리는 매우 화가 났스무니다 !


<신라인들>어 얘네 화났나보다,,

근데 오늘 점심 뭐먹지 ?


흘해 이사금 37년

왜병이 갑자기 풍도에 와서

변경의 민가를 약탈하고

또한 금성을 포위, 급히 공격했습니다


흘해 이사금은 군사를 보내서 전투를 벌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벌찬 강세가 말했습니다


<강세>적병이 멀리서 왔으니

그 예봉(날카롭게 공격하는 기세)을 당할 수 없습니다


공격 시간을 늦추어

그들이 피로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나을 듯 합니다


흘해 이사금은 그렇다고 생각해서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습니다


적들은 식량이 떨어지자 퇴각하려 했습니다


이때 흘해 이사금이 강세로 하여금

강한 기병을 이끌고 추격하게 해서 그들을 격퇴했습니다


흘해 이사금 39년

대궐 우물이 솟아 넘쳤습니다


흘해 이사금 41년

3월 봄

황새가 월성(신라 왕궁) 모퉁이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4월 여름

큰 비가 열흘동안 내려서

평지에 물이 서너 자 (69~92cm)씩 고이고

관가와 민가가 유실되거나 물에 잠기고

산이 열세군대 무너졌습니다


흘해 이사금 47년

4월 여름

흘해 이사금이 붕어,사망했습니다


<라봉봉>그렇게 흘해 이사금대의 여러 기록들이었고

특이한 점은 46년동안 재위했는데

재위기간동안 여러 오랜 기간의 공백이 있었다는 것 같고

그 외에는 농업을 중시하고 왜와의 마찰이 있는 기록등이

있었던거 같고

당대 신라 상황은 점차 석씨왕실이 몰락해가고

김씨들이 일어나던 시기로 보여집니다


신라 석씨왕실이 근친혼으로 인한 몰락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석씨 왕실도 다른 성씨와도 혼인을 했기에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러나 또 흘해 이사금은 석씨 아버지와 석씨 어머니

즉 근친혼으로 태어난 인물이었기에

기록되지 않았던 건강상의 사정등이 있었을 수도 있고

아무리 고대 신라사회가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더라도

이미 근친혼이 잘못됬다는 사실들은

고대국가 성립 이전부터 사람들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고 점점 잦은 근친혼들에

신라인들은 표면적으로는 인정하나

암묵적으로 점점 석씨왕실에

등을 돌리기 시작한게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리 옛날에 노비제도가 명목적으로 있었더라도

노비'주인'들도 당장 사람과 사람의 관계였기에

표면적으로는 주인 행세를 했어도

잘못하면 '죽창을 든다'는 표현 같이

노비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가 있기에

암묵적으로는 나름 대우를 해줬다고 할 수 있고

근친혼 역시 당대 신라사회가 표면적으로는 인정하나

암묵적으로는 경험에서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역사에서는 아무리 고대사회가 여러 악습등이 많았어도

사람사는 사회였고 거기서도 정도에 크게 어긋나거나 하면

바로바로 '제거', '도태'되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흘해 이사금 이야기로 돌아가서,,

흘해 이사금은 석우로의 아들로 나오나

석우로는 249년이나 253년정도에 사망한 인물인데

흘해 이사금은 356년에 사망하기에

아들보다는 손자일 가능성이 있는거 같으나

흘해 이사금은 마지막 석씨왕이기는 하나

흘해 이사금 역시 핏줄로는 정통성이 강한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고 석우로는 초기 신라의 명장이자 큰 인물이었기에

나름 석씨왕실이 몰락해가는 와중에

마지막 힘을 모아서 석우로의 후손을 왕위에 올린 것으로 보이고

흘해 이사금도 46년간 재위하며

나름 마지막 석씨 왕실을 이끌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다음왕 신라 17대왕 내물 마립간 김내물부터

왕위는 김씨로 고정되고 신라 멸망 전에 잠시

박씨왕조가 짧게 들어서는 것을 제외하면

사실상 신라는 김씨왕조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멸망전에 갑자기 박씨왕이 등장하고

나름 초기에 박씨,석씨,김씨 왕들이 나왔다는 사실은

신라가 혈통 말고도 능력을 중시하는

민주정과도 닮아있는 당대 기준으로는 특이한

사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점점 신라 역시 중기,후기로 갈수록

신분제가 고착화되다가 신라 사람들 역시 신라 사회에 등을 돌리다

태조 왕건의 고려가 건국됬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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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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