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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물 이사금(내물 마립간으로 유명하나

삼국사기 기록에는 이사금이라 기록되있기에

현재는 이사금으로 쓰겠습니다) 2년

내물 이사금이 특사를 보내서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없는 노인들을 위문하고

그들에게 각각 곡식 3곡(1곡=10말=180L=180KG 로

즉 540KG)씩을

주었습니다


특별히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깊은 자들에게는

직위를 한 급씩 주었습니다


내물 이사금 3년

2월 봄

내물 이사금이 시조묘에 직접 제사를 지냈습니다

보랏빛 구름이 묘당 위에 감돌고

신기한 새가 시조묘의 뜰에 모였습니다


(보라색,자주색은 예로부터 매우 귀한 색이었고

서양쪽에서도 달팽이나 조개껍질에서 매우적게

얻을 수 있는 귀한 색이었는데

한국 신라에서 역시 보라색은 귀한 색이었고

이에 이후에는 왕족과 1등~5등벼슬까지의

최고등급벼슬의 귀족들만

보라색 옷을 입을 수 있었고

옛날에는 부와 권위의 상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1800년대 영국에서 합성 보라색 염료가 개발되서

수많은 조개들의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전까지는 매우 고귀한 색이었고

신라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할 수 있겠고

보랏빛 구름은 상서롭고 귀한 구름이라 해석하면 된당께요 !)


내물 이사금 7년

4월 여름

시조묘 뜰에 있는 나뭇가지가 맞뭍어서 하나가 됬습니다


(나무 두개가 각각 가지가 서로 붙어서 하나가 되는 것을

연리지 連理枝 라고 하는데

이 역시 화목한 부부나 남녀사이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상서로운 징조로 해석하면 됩니다

아마 내물 이사금이 김씨왕조 시대의 처음[최초의 김씨왕은

김미추,미추 이사금이지만 김내물,내물 이사금이

'김씨 왕조'의 시작을 연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왕이기에

내물 이사금과 김씨 가문의

우상화 작업을 위한 선전,프로파 간다

기록들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내물 이사금 9년

4월 여름

왜병의 대부대가 공격해왔습니다

내물 이사금이 이를 듣고

대적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풀로 허수아비 수천개를 만들어서

옷을 입히고 옷을 입힌 허수아비마다 병기를 들게해서

토함산 아래에 열지어 세워놓고

용사 1천명을 부현 동쪽 벌판에 매복시켰습니다

왜인들은 자신의 병력이 많은 것을 믿고

곧장 진격해 왔습니다

복병(숨은 군사)들이 갑자기 공격해서 허를 찌르니

왜인이 대패해서 도주했습니다

우리(신라) 군사가 추격해서 거의 모두 죽였습니다


내물 이사금 11년

3월 봄

백제인이 와서 예방(예를 갖추는 의미로 인사차 방문)했습니다


4월 여름

큰 홍수가 나서

산이 열 세 군데 무너졌습니다


내물 이사금 13년

백제가 사신을 보내서

좋은 말 두 필을 바쳤습니다


(당대 백제왕은 백제 최전성기 왕,정복군주인

'근초고왕'이었습니다,,

그런 근초고왕이

정말 내물 이사금에게 말을 바쳤다기[물론 한자 해석상

선물이라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보다는

근초고왕이 백제 중심의 국제 질서를

세우려 했고 왜국[일본]과 가야가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자 신라 역시 백제에 말 두필을

하사받고 어쩔 수 없이 이런 백제 중심의

국제 질서에 합류했다고 합니다)


내물 이사금 17년

봄과 여름에 큰 가뭄이 들었습니다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굶주리고

유랑자가 많이 생기자

내물 이사금은 특사를 보내서

창고를 풀어서 구제했습니다


내물 이사금 18년

백제 독산성주가 백성 3백명을 이끌고

투항했습니다


내물 이사금은 이들을 받아들여서

6부에 나눠 살게 했습니다


백제 왕(근초고왕)은 글을 보내와서,,


<근초고왕>두 나라(백제와 신라)가 화목하여

형제처럼 지내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지금 대왕은 우리나라(백제)에서 도망간 백성들을

받아 들였다


이는 화친하자는 뜻과 크게 어긋나는 것이며

대왕에게 기대했던 바가 아니다

청컨대 그들을 돌려 보내기를 바란다


라고 했습니다

이에 내물 이사금은


<내물 이사금>백성이란 항시(항상) 같은 마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카이

왕이 그들을 돌보아 주면 오고,

힘들게 하면 가나니,

백성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이기야


대왕이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주지 않은 것을 걱정하지 않고

과인을 책망하니

어찌 이토록 심한것이노 ?

(메롱메롱 멧돼지 너나잘하셈 ~ㅋ)


라고 대답했습니다


<신라 신하들>,,(이열 우리 이사금이

패기가 장난이 아닌데 ?)


백제가 이를 듣고

다시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근초고왕>하,, 이놈들을 어찌해야 하지,,


<백제 신하들>어라하(왕) !

북쪽에는 고구려도 있고 참으셔야 하옵니다,,


(근초고왕대의 백제가 최전성기의 시기였기는 했어도

당대 백제 역시 내실이 크게 튼튼하지만은 않았었기에

백제의 전성기는 곧 끝났고

곧 고구려의 전성기가 시작됬습니다

백제에 비해 국가적 역량이 크게 부족했던

가야나 왜가 백제에 크게 협력했다면

신라는 백제보다 역량이 조금 부족하기는 했으나

나름 한국 동남쪽의 맹주이기도 했고

그렇게 역량이 크게 부족하지도 않았고

백제 역시 상황이 좋지만은 않았던 상황인 것을 파악하고

내물 이사금은 나름 패기있게 근초고왕에게 맞선거 같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당대 백제는 최전성기의 백제였고,,

그 결과는 백제에 의한 신라의 고립과

이에 신라는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하다가

고구려의 속국화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5월 여름

서울(수도)에 비가 왔는데

물고기가 빗속에 섞여서 떨어졌습니다


내물 이사금 21년

7월 가을

부사군에서 뿔이 하나인 사슴을 진상했습니다


대풍년이 들었습니다


내물 이사금 24년

4월 여름

양산에서 뱁새가 황새를 낳았습니다


내물 이사금 26년

봄과 여름에 가물어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굶주렸습니다


위두를 부진 苻秦 (중국 전진인데 부견이 세웠다고해서

부진이라고 도 했습니다) 에 보내서

토산물을 바쳤습니다

부견이 위두에게 물었습니다


<부견>그대가 해동의 사정을 이야기함에 있어

사용하는 언어가 옛날과 같지 않으니

무슨 까닭인가 ?


위두가 대답했습니다


<위두>이는 또한 중국과 동일한 현상입니더

시대가 변하면 명칭과 호칭도 바뀌는 법이니

오늘날의 언어가 어찌 예전과 같겠십니꺼 ?


내물 이사금 33년

4월 여름

서울에 지진이 있었습니다

6월에 또 지진이 있었고

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았습니다


내물 이사금 34년

정월(1월) 봄

서울(수도)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습니다


2월

흙비가 내렸습니다


7월 가을

메뚜기 떼가 생겼고

곡식이 잘 익지 않았습니다


내물 이사금 37년

정월(1월) 봄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왔습니다


고구려가 강성했기 때문에

내물 이사금은 이찬(신라 2등벼슬) 대서지의 아들

실성(내물 이사금 다음왕인 신라 18대왕

실성 이사금[마립간] 김실성)을 인질로 보냈습니다


내물 이사금 38년

5월 여름

왜인이 와서 금성을 포위하고

닷새(5일)가 되도록 풀지 않으니

모든 장병들이 나아가서 싸우기를 요청했습니다


내물 이사금이


<내물 이사금>지금 적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깊이 들어와서 죽음을 각오하는 마당에 있으니

그 예봉(날카롭게 공격하는 기세)을 당할 수는 없다


라고 말하고

성문을 닫았습니다


적은 성과없이 물러갔습니다


내물 이사금이 먼저 용감한 기병 2백명을 보내서

그들의 퇴로를 막았습니다


<내물 이사금>우리 국토를 유린한 자들을

한놈도 살려보내지 말라 !


그리고 또한

보병 1천명을 보내서

독산까지 추격해서

양쪽에서 협공해서

그들을 대파했습니다

죽은 적병과 포로로 잡힌 적병이 아주 많았습니다


<라봉봉>여기까지만 신라 기록상으로만 보면

내물 이사금의 업적적 기록이라 볼 수 있지만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된

실제 당대 상황은 신라는 백제의 주도로

백제,가야,왜 삼인방에게 이리저리 얻어맞고 있던 상황이었고

이에 내물 이사금은 광개토대왕에게 사신을 보내서

도움을 요청했고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400년에 보병과 기병 도합(합쳐서)

5만명을 보내서

신라를 구원했고 당대 가득했던 왜군들을

크게 무너트렸고

이에 내물 이사금은 광개토대왕에게 직접 가서

조공했을 정도로 신라의 상황은 좋지 않았고

신라 내물 이사금이 백제 근초고왕에 한번 패기를 보이다가

결국 백제는 가야와 왜를 조종,연합해서

신라를 큰 위기로 몰고가다가

이에 내물 이사금은 겨우 고구려의 지원을 받고

나라를 유지하며 이때부터 사실상 고구려의

속국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기록들은 삼국사기에 기록되있지 않은데

고구려인들이 직접 기록한 광개토대왕릉비에

자세히 남아있고

당대 국제 질서는 초강대국이었던

고구려 천하관,고구려 중심으로

돌아갔음을 알 수 있는 기록입니다

개인적으로 신라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기록이나

또 고구려,백제,신라는 사실 모두 하나,한국이기에

당대 광개토대왕 시기는

한국사의 영광의 시기로

이야기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인으로서 '고구려'라는 이름만 들어도

뭔가 가슴에 전율같은게 있는데

당대 최전성기 시기이자

한국사 위인인 광개토대왕 시기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내물 이사금 40년

8월 가을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므로

군사를 보내서 실직 평야에서 그들을 대파했습니다


내물 이사금 42년

7월 가을

북쪽 변방 하슬라(강원도 강릉시 지역으로

고구려에 뺏기기 전의 당시까지 신라 영역이

꽤 북쪽까지 올라가 있었다 할 수 있습니다

의외로 초기 신라는 경상도 일대에만 있었다기 보다

동해안 바다로 배를 타거나 평평한 해안가 도로로

이렇게 북쪽으로 올라가서 영역으로 삼았다고 할 수 있고

오히려 고구려나 백제의 경우에는 산맥들을 넘어야 하기에

동쪽 지역을 점거하기가 어려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에

가뭄이 들고 메뚜기 떼가 나타났고

흉년이 들고 백성들이 굶주렸습니다

그 지방의 죄수들을 특사(특별 사면)하고

1년간의 세금을 면제해 줬습니다


내물 이사금 44년

7월 가을

날아다니는 메뚜기 떼가 들을 뒤덮었습니다


내물 이사금 45년

8월 가을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습니다


10월 겨울

내물 이사금이 타고 다니던 궁중의 말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슬프게 울었습니다


내물 이사금 46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습니다


7월

고구려에 인질로 가있던 실성이 돌아왔습니다


<김실성을 호위하는 고구려 군사들>실성 동지

잘 말하시라요,,


<김실성>(알겠십니더,,)

오랫만에 고국에 돌아오니 반갑습니다 동무들 !

지금은 고구려가 크게 강대한 시기인데

오랫동안 고구려에 살았던

고구려에 해박한 나를 밀어달라우 !


<신라인 1>어머 실성왕족님은 벌써 고구려말투인데,,

세련됬노,,


<신라인 2>야야 ! 우리도 고구려 말투를 써야하지 않겠니 ?

우리가 나라를 유지하는게 다

따뜻한 고구려 햄(형) 덕분이다 이기야 (??)


내물 이사금 47년

2월 봄

내물 이사금이 붕어,사망했습니다


<라봉봉>그렇게 내물 이사금(마립간) 대부터 신라 김씨왕조가

시작됬다고 할 수 있는데

내물 이사금은 나름 최초 김씨왕인 김미추,미추 이사금 다음에

다시 석씨 왕조가 시작됬는데

석씨 왕조에서 오랜 기간동안

은인자중 隱忍自重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참으며 신중하게 행동함) 하던 김씨일족들이

결국 김내물이라는 인물을 왕위에 옹립함으로서

이후 왕은 김씨로 고정되고

사실상 김씨 왕조 시작이었던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고

김내물은 그렇게 왕위를 노리고 있었던

김씨 일족의 상징적인 인물로서

당대 규모가 커져있었던

김씨 일족들이 팍팍 밀어주던 인물로 보이고

이에 내물 이사금은 여러 패기들을 보이기도 하고

백제와의 관계에서 정치적 무리수를 두기도 하다가

신라의 외교적 고립으로 이어지게 된 거 같습니다

(즉 신라내에서는 입지가 컸지만

'우물안의 개구리'라는 말 같이

신라 밖 국제 정세에서는

내물 이사금이 신라 내에서 하던대로 되지는 않았다고

보면 될거 같습니다)


결국 백제,가야,왜에게 고립된 신라는

북쪽의 강성했던 고구려에게 손을 벌리게 됬고

이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중심의 질서를 세우려

신라에 대군을 보내서 구원하게 됬던 것으로 보이고

강성했던 고구려군은 당대 왜를 궤멸시켜서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고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되 있습니다,,


그로 인해 신라는 다행히 나라는 유지하게 됬으나

이때부터 고구려군이 신라에 주둔하는 등

사실상 속국화 되었고

당대 고구려는 신라를 속국으로 거느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대 신라인들 입장에서도

그래도 오랜 적이었던 백제,가야,왜보다는

북쪽의 수준높은 문명을 가지고 있었던

또 같은 민족이었던(물론 백제,가야도 같은 민족이지만

가까운 위치에서 오랫동안 싸워왔기에

적국으로 인식했었을 것입니다)

고구려를 친숙하게 여겼을 수도 있고

고구려 역시 당대 신라를 직접지배하기는 무리가 있어서

이렇게 속국화 시키며 신라를

백제나 가야,왜 등의 남방 세력들을

견제하는 거점으로 삼으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나름 신라인들 입장에서도 고구려의 속국화됬던 시기는

암울했다고만 여겨지는것 보다는

고구려와의 우호관계를 통해서 나라를 유지하고

백제,왜,가야를 견제할 수 있는 우방으로 여겼고

또 한국 동남쪽 구석에 위치해서 중국의 선진문물 수용이

어려웠던 신라는 북쪽의 고구려와 교류하며 중국과

고구려의 선진문물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통로로

사용할 수 있었고

나름 신라인들은 실리를 취하기도 했고

이때부터 한국인들의 사대주의 외교가 시작되서

이후 나당(신라,당나라)동맹으로 이어졌고

강대국과의 사대주의 외교는

이렇게 이때부터 조선시대까지 이어져왔던게 아닐까 싶습니다


또 내물 이사금의 칭호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는데

삼국사기에서는 '이사금'이라 기록되있으나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라 이 시기부터 '마립간'칭호가 사용됬다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그러나 저는 현재는 삼국사기 기록 중심으로 쓰고 있기에

현재는 먼저 이사금으로 썼습니다

또 언어학적으로 당대 발음으로 그의 이름은 '내물'이라기 보다

'나밀'이 가깝다고 하며

현재 쓰는 한자표기 내물 奈勿 도 나물로 읽는게 옳다고 합니다

(奈 는 어찌 내, 어찌 나 자 입니다)


그러나 현재는 내물로 표기되있고

보통 내물 마립간이라고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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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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