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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14대왕 유례이사금 (유례왕 석유례)

재위기간 15년 283~298년


유례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김부식>고기에는 제 3대(신라 3대왕 유리 이사금),

제 14대의 두 왕의 이름을

똑같이 유리 혹은 유례라 하였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조분왕(신라 11대왕 조분 이사금 석조분)의

맏아들입니다(조분 이사금이 죽었을때 그가 너무 어려서

조분 이사금의 동생 석첨해,첨해 이사금이 먼저 왕위를

잇게 된거 같습니다)


어머니는 박씨이고

갈문왕 나음의 딸이었습니다

그녀(유례 이사금의 어머니)는 예전에 밤길을 가다가

별빛이 입으로 들어간 일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서 임신이 되었습니다 (윗 기록에서는

조분왕의 맏아들이라면서 바로 밑기록은 이렇게

자연의 정기 ?? 로 임신하게 됬습니다)


(유례 이사금의 어머니는)유례를 낳던 날 저녁에

이상한 향기가 방에 가득 찼습니다


유례 이사금 2년

정월(1월) 봄

유례 이사금이 시조묘에 참배했습니다


2월

이찬 홍권을 서불한(=이벌찬, 신라 1등벼슬)에 임명하고

중요한 정무를 맡겼습니다


유례 이사금 3년

정월(1월) 봄

백제가 사신을 파견해서 화친을 요청했습니다


3월

가뭄이 들었습니다


유례 이사금 4년

4월 여름

왜(일본)인이 일례부를 습격해서 불을 지르고

1천명을 잡아갔습니다


유례 이사금 6년

5월 여름

왜병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

선박과 병기를 수리했습니다


유례 이사금 7년

5월 여름

홍수가 나서

월성(신라 왕궁)이 무너졌습니다


유례 이사금 8년

정월(1월) 봄

말구를 이벌찬(신라 1등벼슬, 근데 이벌찬은

한자음 표기때문에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고 추측,해석하는데

그런데 굳이 다르게 서불한과 이벌찬이 기록된거는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각간이라는 뜻의 뿔은

옛글자로 서불과 비슷했고

각간은 이벌이라는 말과 대응되기에

이벌찬=각간=서불한이라 보는게

정설이기는 합니다)에 임명했습니다


말구는 충직하고 지략이 많았고

유례 이사금은 자주 그를 찾아가서

정사(정치)의 요령을 물었습니다


유례 이사금 9년

6월

왜병이 사도성을 공격해서 점령하자

일길찬(신라 7등벼슬) 대곡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도록 했습니다


7월 가을

날씨가 가물었고 메뚜기 떼가 나타났습니다


유례 이사금 10년

2월 봄

사도성을 개축하고

사벌주의 호민 80여 호를 옮겨 살도록 했습니다


유례 이사금 11년

여름

왜병이 장봉성을 공격했으나

그들은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7월 가을

다사군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진상했습니다


유례 이사금 12년

유례 이사금이 신하에게


<유례 이사금>왜인이 자주 우리 성읍을 침범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없다


내가 백제와 함께 계획을 세워

백제와 우리가 일시에 바다를 건너

왜국을 공격하고자 하는데

이 계획이 어떠한가 ?


라고 말했습니다


서불한 홍권이


<홍권>우리는 수전 水戰 (물,바다 싸움)에 익숙하지 못하므로

모험삼아 원정을 하는 경우에는

예상 밖의 위험이 있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더구나 백제는 사술 詐術 (남을 속이는 수단)이 많고

항상 우리나라를 병탐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또한 그들과 함께 일을

도모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 같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유례 이사금이


<유례 이사금>옳다


라고 말했습니다


(한국 동남부에 위치했던 신라는

바다건너 왜,일본과 매우 가까웠고

이에 건국 초부터 여러 충돌이 많았습니다

한국측 기록에는 잘 없고

주로 우리가 왜에게 약탈당하거나 피해입은

기록 위주로 있지만

일본측 기록에는 실제 신라인들이

바다건너 일본을 공격한 이야기들이

여럿 있는거 같습니다)


유례 이사금 14년

정월(1월) 봄

지량을 이찬(신라 2등벼슬)에

장흔을 일길찬(신라 7등벼슬)에

순선을 사찬(신라 8등벼슬)에 임명했습니다


이서고국이 금성(신라 수도)을 공격해왔습니다

우리나라(신라)가 군사를 크게 동원해서 이를 방어했으나

물리칠 수 없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이상한 병사들이 나타났는데

그 수를 모두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댓잎(대나무 잎)을 귀에 꽂았는데

우리 군사와 함께 적군을 쳐부수고 난 후에는

돌아간 곳을 알 수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수만개의 댓잎이

죽장릉(미추 이사금 김미추의 묘)에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신라 백성들이


<신라 백성들>돌아가신 (김미추) 임금께서

하늘의 군사를 보내 전쟁을 도우셨다


라고 말했습니다


유례 이사금 15년

2월 봄

서울(수도)에 안개가 심해서

사람을 알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안개는 닷새(5일)만에 개었습니다


12월 겨울

유례 이사금이 붕어,사망했습니다


<라봉봉>유례 이사금은 어린 나이여서인지

조분 이사금의 맏아들이었음에도

이후에 왕위에 올랐고

조분 이사금의 맏아들이지만

어머니가 별빛의 기운으로 임신했다하기에

출생 당시의 기록을 미화시키려 했던 기록이거나

혹은 불분명한 출생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바로 전왕이 신라 최초 김씨왕 미추 이사금,김미추였고

다시 곧 석씨가 왕이 되었는데

이는 신라 최초 석씨왕이었던 탈해 이사금,석탈해 이후

곧 박씨가 왕이 되었던것과 비슷하고

이미 김씨들은 점점 신라 국정을 장악하고 있었고

김미추를 왕위에 올렸기도 했으나

아직 굳히기 작업이 들어가기전이라

석탈해의 후손들이 그랬던 것처럼

먼저 기존의 석씨왕들을 다시 왕으로 세워서

과도기적 정부를 만들고 국정장악에 집중한거 같고


(실제로 신라사나 세계사적으로도

바로 정부를 바꿔버리면 혼란해질 위험이 있어서

이렇게 괴뢰 정권,허수아비 왕을 세우거나 하며

간접지배 형식을 취하다가 곧 직접지배로 바꿔버리는

사례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물론 당시 석씨일가도

아직 완전히 몰락했을때는 아니었습니다)


석씨들도 석탈해,탈해 이사금 사후 박씨들을 왕위에 올리고

점점 국정을 장악하다가 석씨왕조 시대를 연거 같고

김씨 일족들도 석씨 일족들이

했던것을 그대로 모방,벤치마킹 한게 아닐까 싶습니다


신라정치는 후대의 왕위쟁탈전이 일어나기 전에는

상당히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모습도 있고

과격한 반란,반정보다는 이렇게 차근차근 국정을 장악하며

왕위에 오른 인물들이 여럿 나타나고

물론 말기에는 여러 왕위 쟁탈전이 나타나기도 했으나

멸망때까지 신라 정치계는

되게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느낌이 강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신라 초기에 기록들에

반란,반정들이 일어났다는 해석들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보고있고

반란,반정보다는 오랜 기다림과 인내의 시간등으로

평화로운 정권 이양,선양이 주로 이루어진게 초,중기 신라

정치의 모습으로 보이고

물론 이런 장점들이

후기 신라로 가서는 신라 정치계가

점점 폐쇄적인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해버려서

이런 높은 보수성의 신라 정치가 신라의 강성함의 원인이었고

또한 멸망의 원인이었다고도 생각합니다


다시 유례 이사금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렇게 유례 이사금은 석유례,석씨 왕이었는데

전왕이 김씨왕이었고 출생에대한 이야기들 때문에

여러 반정이나 그런 이야기들도 있으나

그렇게 보지는 않고 대신

당대에도 김씨 일족들이 신라 국정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아직 석씨 일족들도

완전히 몰락한 상황은 아니었고

나름 김씨 일족들도 그런 석씨 일족,석씨 왕실의

눈치를 보던 때라 해석할 수 있을거 같고

그런 상황에서 왜국이 공격해오자

나름 유례 이사금도 신라 국왕으로서


왜국 공격에 대한 의견을 내놓았고

이에 신하들의 반대로 그만두게 된 거 같습니다


또 조선시대 역사책 동사강목에

일본에 방문했던

조선통신사 김세렴은

일본 현지에서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유례왕이 왜국원정을 가서 오사카까지 가서

백마(흰말)를 죽여서 맹세한 뒤에

화친하고 돌아왔다는 기록을 남겼고

실제 신라와 왜(일본)는 매우 가까웠기에

한국 기록에 빠져있는 신라인들이 일본을 공격했던

기록들이 여럿 있고 충분히 신빙성 있는 기록이라고

생각됩니다


또 유례 이사금대에는 이서고국의 공격에

위기의 상황에 몰렸는데 한국 동남쪽의 맹주였던

신라가 이서고국이라는 작은 나라에 휘말려서

위기까지 갔을지는 모르겠지만

미추 이사금 김미추가 보낸 대나무 귀신 병사들이

도왔다는 그런 기록들로 보아서는

김씨 일족들이 이서고국의 공격에

처음에는 유례 이사금,석씨 왕실에

병사를 내놓지 않거나 협조를 안하다가

끝내 도와주는 식으로 하며

점점 국정을 장악하기 시작했다고 해석해도 되지 않을까 싶고

하여튼 전왕이었고 김씨왕이었던 미추 이사금이

도왔다는 기록은 김씨일가가 쌓아놓은 덕이나

병사,유산들로 외세를 방어했다는 이야기로

해석해도 될거같고 학계에서도 이를 김씨들의

사병으로 추측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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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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