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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20대왕 자비 마립간 김자비

재위기간 21년 458~479년


자비 마립간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눌지왕(신라 19대왕 눌지 마립간의 맏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김씨이며

실성왕의 딸입니다


<라봉봉>눌지 마립간은 장인 실성 이사금을 죽였는데

즉 눌지 마립간은 자신의 장인이 자신을 죽이려하자

장인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고,,

그런데 그런 장인의 딸과 결혼해서 낳은

아이를 자신의 후계자로 그것도

자비(불교에서 사랑과 비슷한 뜻)라는

이름까지 붙이며 왕위에 잇게했는데

자신의 처가와 아들 세종대왕의 처가를 몰살한

조선 태종 이방원이 생각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이 역사를 '현대인만 어리석은게 아니라

인류 전체가 어리석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착한 학문이다'

라고 말한게 떠오릅니다,,


또 실성 이사금은 김씨 아버지와 석씨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이었고 친고구려적 성향을 보였다고 할 수 있는데

그를 죽이고 왕이된 그의 사위였던,, 눌지 마립간은

내물 이사금의 아들이었는데 내물 이사금은

김씨와 김씨사이에서 근친혼으로 태어난 인물이었는데,,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눌지 마립간은 즉위하고 장인의 흔적 지우기에 몰두했던거 같고

이로인해 수많은 석씨일족과 친고구려 성향의 신라인들이

숙청된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후부터 석탈해계 석씨 일족들이 단 한명의

왕도 배출하지 못하고 오늘날에도

석탈해계 석씨는 김씨와 박씨가 많은 것에 비해서

그 수가 매우 적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같고

또 박씨는 이후에도 잘 살아남고

신라 멸망 직전에 잠깐 박씨왕들이 나왔던 것을 보면

눌지 마립간때 충신이었던 박제상이 매우 큰 공을 세웠고

박씨 일족들은 석씨들이 숙청되는 상황에서도 조용히

있었고 이렇게 박제상 같은 인물이 나와서

공을 세우기도 해서 신라 사회에서 옛 왕실세력이자

주류계층으로 계속 이어져 오게 된 거 같습니다


이번에는 자비 마립간의 이름에 대한 이야기로

자비 마립간 김자비 金慈悲 의 이름은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 慈悲 (사랑) 와 한자가 같은데

자비는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정신인데

아마 이때쯤을 전후해서 신라사회에 불교가

틈틈히 유입되와서 눌지 마립간이

맏(첫째)아들 이름을 불교식 이름을 지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나마 김자비의 실제 한국 이름과

발음이 비슷한 한자중에서

가장 좋은 뜻이 자비여서 자비라는 한자로

기록됬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당대 신라사회에 불교가 아니라

기독교가 들어왔다면

love king 사랑 마립간 사랑왕 김사랑이

신라사회에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ㅋ 헤헿


자비 마립간 2년

2월 봄

자비 마립간이 시조묘에 참배했습니다


4월 여름

왜(일본)인이 병선 백여 척을 동원해서

동쪽 변경을 침범하고

이어서 월성(신라 왕궁인데

하여튼 신라 수도였던 경주가 바닷가 근처에

위치해 있다보니 왜인들이 금새 수도를

포위하고 그랬던거 같습니다,,)을 포위하니

사방에서 화살과 돌이 비오듯 했습니다


그러나 왕성이 무너지지 않자

적은 퇴각하려 했습니다


이 때 군사를 보내서 적을 격파하고

도주하는 적을 바다 어구까지 추격했습니다

적병 가운데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절반이 넘었습니다


자비 마립간 4년

2월 봄

자비 마립간이 서불한 미사흔의 딸을 왕비로 삼았습니다


(미사흔은 자비 마립간의 아버지 눌지 마립간의 동생이었기에

즉 근친혼,,인데 미사흔은 박제상의 도움으로

왜에서 구출된 인물이어서 박제상의 딸과 결혼했고

만약 미사흔의 딸이 박제상의 딸 사이에서 낳은 인물이라면

김씨 일족에서 박씨 일족에 대한 보답으로 딸을 미사흔과

결혼 '시킨[호의였다 해도 정략혼을

좋게보지는 않습니다]' 것은 물론

이후에도 박제상의 손녀를

왕비로 삼았을 수도 있었던거 같습니다,,

이후에도 박제상[미사흔]의 후손들은 신라사회에서

거칠부나 선덕왕으로 나타나는거 같고

중요한 대우를 받은거 같고

신라사회에서 박제상의 입지는

조선시대로 치면 임진왜란때 조선 바다를 수호한

이순신 장군 정도였다 할 수 있기에

이순신 장군의 후손들도 조선정부의 호의 ?? 로

적성을 무시당하고 사실상 강제적으로 끌려가서

조선 수군이 되었고,,

박제상의 후손들도

신라 사회에서 여러 요직을 맞게 된거 같습니다,,)


4월 여름

금성 우물에서 용이 나타났습니다


자비 마립간 5년

5월 여름

왜인이 활개성을 습격해서

1천명을 사로잡아갔습니다


자비 마립간 6년

2월 봄

왜인이 삽량성을 침범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는데,

자비 마립간이 벌지와 덕지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길에 매복하여 기다리고 있다가

그들을 공격하게 해서 대승했습니다


왜인이 자주 국경을 침범하므로

자비 마립간은 변경의 두곳에 성을 쌓았습니다


7월 가을

크게 군사를 사열했습니다


자비 마립간 8년

4월

홍수가 나서 산이 열 입곱 군데가 무너졌습니다


5월

사벌군에 메뚜기 떼가 나타났습니다


자비 마립간 10년

유사에게 명해서 전함을 수리했습니다


9월 하늘에서 붉은 빛이 돌았고

큰 별이 북쪽에서 동남쪽으로 흘러갔습니다


자비 마립간 11년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의 실직성을 습격했습니다


9월 가을

하슬라 사람으로서 15세 이상되는 자를 징발해서

니하 泥河 에 성을 쌓았습니다


<김부식>니하 泥河 를 니천 泥川 이라고도 한다


자비 마립간 12년

정월(1월) 봄

서울(수도)의 방과 리의 이름을 정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도시 지명 계획을 한거 같습니다)


4월 여름

서쪽 지방에 홍수가 나서

민가가 떠내려 가고 허물어졌습니다


7월 가을

자비 마립간이 수해를 당한 주와 군을 순행해서

위문했습니다


자비 마립간 13년

삼년산성 三年山城 을 쌓았습니다


<김부식>삼년 三年 이란 공사를 시작한지

삼년만에 끝났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자비 마립간 14년

2월 봄

모로성을 쌓았습니다


3월

서울(수도)에서 땅이 갈라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갈라진 틈이 20장이고

혼탁한 물이 솟아 올랐습니다


10월 겨울

전염병이 크게 돌았습니다


자비 마립간 16년

정월(1월) 봄

아찬(신라 6등벼슬) 벌지와

급찬 級湌 (=급벌찬, 신라 9등벼슬)덕지를 좌우 장군에 임명했습니다


7월 가을

명활성을 보수했습니다


자비 마립간 17년

일모, 사시, 광석, 답달, 구례, 좌라 등에 성을 쌓았습니다


7월 가을

고구려왕 거련(고구려 20대왕 장수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했습니다 (고구려의 한성공격[함락])


백제왕 경(백제 21대왕 개로왕 부여경사,부여경)이

아들 문주(백제 22대왕 문주왕 부여문주)를 보내서

(신라에) 구원토록 했습니다


<부여문주>백제국 태자 부여문주가 급한 도움을

청하옵니다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원컨대

신속히 원군을 보내주시옵소서 !


<자비 마립간>당장 구원군을 보내겠다 !


그러나 (신라) 구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백제(백제 수도 한성이)가 이미 함락되엇고

또한 경(개로왕 부여경사,부여경)이 죽었습니다


(삼국사기 기록에는 백제 수도가 함락됬다고 나오지 않고

백제가 이미 함락됬다고 나오고

당대에는 이를 사실상 백제 멸망이라 보기도 했던거 같고

결국 살아남았던 태자 부여문주가

수도를 웅진으로 옮겨서 백제부흥운동에 성공해서

개로왕 이후에도 백제가 이어져가게

됬다고 할 수 있는거 같습니다)


자비 마립간 18년

정월(1월) 봄

자비 마립간이 명활성으로 이사해서

그곳에 거주했습니다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은 모두

평소 수도와 평시 수도 근처의 전시 수도가 있었는데


고구려 첫번째 수도 졸본성-오녀산성

두번째 수도 국내성-환도산성

세번째 수도 평양성-대성산성


백제 풍납토성(위례성)-몽촌토성 [백제의 경우는 추정]


신라 월성-명활산성


이렇게 이야기 되고 있고


신라의 경우 평소 왕이 월성[왕궁]에 거주하다

전시의 경우에는 명활성으로 이주했던거 같고

당대 동맹국이었던 백제 수도가

고구려에 함락되자 위기감을 느낀

자비 마립간이 산성이었던 명활성으로 이주해서

비상계엄체제에 돌입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비 마립간 19년

6월 여름

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범했습니다

자비 마립간이 장군 덕지를 시켜 그(왜인)들을 공격토록 했습니다

그(덕지)는 2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 잡았습니다


자비 마립간 20년

5월 여름

왜인이 군사를 동원해서

다섯 길로 들어와서 침범했으나

결국은 아무런 성과없이 돌아갔습니다


자비 마립간 21년

2월 봄

밤에 붉은 빛이 땅에서 하늘까지 뻗쳤는데

마치 비단을 펼쳐 놓은 듯 했습니다


10월 겨울

서울에 지진이 있었습니다


자비 마립간 22년

봄 2월 3일

자비 마립간이 붕어,사망했습니다


<라봉봉>자비 마립간은 재위기간 내내

이름과 다르게 ?? 수많은 성을 쌓았고

자비 마립간대에 여러 안보정책의 일환으로

이렇게 성들을 쌓은거 같은데

신라는 '작지만 강하다, 작은 고추가 맵다, 옹골차다,

우주방어' 이런 말들의

표본이었던 국가으로서 이후에도 이런 정책들은

이후 왕들에게도 계승되어서

이후 신라의 영토확장 이후에도

축성된 성들은 큰 역활을 하게 되고

이런 우수한 안정력,방어력을 바탕으로 신라는

이후에도 고구려,백제,왜에게 연속으로 공격받았음에도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게 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재위 기간내내 왜인들이 계속 침범했고

백제는 국가적으로 수도였던 한성이 고구려

최전성기 왕인 장수왕에게 함락되는 등(반대로 보면

고구려에게는 최고의 시기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최악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고

특히나 백제는 오랜 한국 남쪽의 대국 大國 이었는데

강성했던 고구려가 그런 백제의 수도를 함락시켜버리자

신라인들 역시 다음은 곧 고구려의 말발굽이

신라 수도로 이어질 수 있기에

자비 마립간이 명활성으로 이주하는 등

전시체제를 갖추게 된거 같고

여러 급변하는 국제정세에서 계속 부지런히 성을 쌓으며

신라의 방어력을 계속 높인 임금 같습니다,,

예전에도 한 이야기였는데 아기돼지 삼형제중에서

신라는 벽돌집을 만든 막내돼지가 생각난다 했고

짚과 나무 등 가벼운 재료들로 일찍 집을 지어

놀고있었던 첫째돼지(백제)와 둘째돼지(고구려)와 다르게

형제 돼지들에게 놀림받으면서도 묵묵히 집을 지은,

짓는 속도가 느렸던 벽돌집을 쌓았던 막내돼지(신라)는

결국 이후 급변하는 늑대라고 비유할 수 있는

정세나 위기속에서 유일하게 방어가 되는 튼튼한 집을

짓게 되었고 첫째 돼지(백제)와 둘째 돼지(고구려) 모두

셋째 돼지(신라)의 벽돌집 지붕 아래에서 삼형제가 살게 되기에

이보다 삼국의 상황을 비유한 적절한 동화가 없는거 같습니다 ㅎ,,


축성,성을 짓는다는게 노동력이 많이 들고

무리하게 한다면 백성들의 원망을 사기도 했으나

또한 옛날에는 국가적으로는 외침에서 보호해주는 중요한

역활을 하기도 했기에 양날의 검이었다고도 할 수 있고

이후에도 신라의 영토확장과 삼국통일전쟁기때도

신라인들이 쌓아놓은 성들이 중요한 역활을 했다는 점을 보면

오늘날에도 자비 마립간이나 신라인들의 근성있는 축성력은

대단하게 이야기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라인들은 육로나 해로로 중국과 교류하기도 하고

넓고 풍요로운 영토 등에서 일찍 풍요를 누리던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발전이 늦었다고 할 수 있으나

온갖 어려움에도 굽히지 않는 태도 '불굴의 의지'와

매사에 정성을 다했던 '근성'이 강했고

이런 태도들이 삼국통일의 대업에 기초가 되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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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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