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신라 35대왕 경덕왕 김헌영

재위기간 23년 742~765년


경덕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름은 김헌영이며

효성왕의 동복 아우입니다


효성왕이 아들이 없으므로

김헌영을 태자 太子 (아들 자 子 자가 아닌

아우 제 자를 써서 태제 太弟 라 할 수도 있습니다) 로 삼아서

왕위를 잇게 한 것입니다


왕비는 이찬(신라 2등벼슬) 순정의 딸입니다


경덕왕

10월 겨울

일본국 사신이 왔으나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신라 내에서는 친일본(=반당파) 파와

친당파와의 대립이 있었고

이때에 친일본파와 싸움에서 친당파가 승리했다는

해석도 있다하고 일단 신라는 백제 만큼은 아니었지만

일단 백제보다 일본과 지리적으로는 가깝기도 해서

여러 교류가 있었을 것이고 건너가서 살거나

주 무역 대상으로 삼거나 하는 등 하며 친일본파 세력들 역시

미약하게나마 존재했을거 같은데

일단 일본은 당대에 한국보다 여러 부분에서 역량들이 떨어져있고

거대한 영토, 자원, 인구라는 잠재력만이 있던 상태라 할 수 있어서

신라에 친일본파 세력이 있었다 한들

그것이 교류나 이익적 목적의 친일본파 세력이었을 것이지

친당파같이 선진문물을 수용할 수도 있는 그런 세력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세력이 미약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또 경덕왕대에 적극적인 한화정책 즉 중국화 정책이 있어서

왕 역시 중국쪽에 더 마음을 기울였다 할 수 있겠고

그런 상황에서 신라 - 일본 관계는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당대 일본 역시 후진국이었지만 섬나라였기에

생존,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대륙, 지상과의

교류가 필수적이었기에 적극적으로 대외진출을 모색하려 했다

할 수 있고 특히나 대륙과 해양 사이의 성향을 지닌

한국은 일본이 예로부터 선진문물을 수용하거나

대륙으로 진출하려 하기위해

거쳐야할 관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경덕왕 2년

3월 봄

주력공 主力公 의 집에서 소가 한번에 송아지 세마리를 낳았습니다


당의 현종이 찬선대부 위요를 보내와서

제사에 참여하게 하고

이어서 경덕왕을 신라왕으로 책봉해서

선왕의 관작을 잇게 했는데

그 조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당현종>고개부의 통삼사사지절대도독

계림주제군사겸지절영해군사

신라왕 김승경의 아우 김헌영은

대를 이어서 인덕을 품고

일상예절에 마음을 쓰니


대현 大賢 (매우 현명한 사람) 의 풍교 風敎 (교육이나 정치의 힘으로

백성을 착하게 가르침) 는 조리 條理 (도리, 이치) 가 더욱 밝아지고

중국의 규범과 의식은

지위 높고 점잖은 사람이 이어받았다


바다를 달려서 사신을 파견해서

구름을 벗삼는 먼 길을 따라

당나라의 조정에 왕래하여

대대로 사심 없는 신하로서

여러 번 충절을 나타내었다


이전에 왕(경덕왕)의 형(효성왕)이 국가를 계승했으나

그가 아드이 없어 아우가 그 뒤를 잇게 되니

이것도 떳떳한 법도라 할 것이므로

이에 빈례(예의를 갖추어 손님을 대접함) 로 우대하여

책명하노니(왕위에 책봉하니)

마땅히 구업을 지켜

번국(제후국) 의 수장으로서 명예를 계승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특별한 예우를 가하여 중국 관작의 칭호를 주노니

형의 관작인 '신라왕개부의동삼사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

겸충지절영해군사' 를 이어 받으라


아울러 어주효경 御註孝經 (당현종이 직접 주해[풀이]한 효경)

1부를 하사했습니다


4월 여름

서불한(=이벌찬, 신라 1등벼슬) 김의충의 딸을 왕비로 맞았습니다


8월 가을

지진이 있었습니다


12월 겨울

왕의 아우를 당나라에 보내서 하정(새해 인사) 하였더니

'좌청도솔부원외장사' 를 제수받고

녹포 綠袍 (초록색 도포) 와 은대 銀帶 (은으로

새긴 장식을 가장자리[끝부분]에 붙인 관료들이 허리에 차던 띠)

를 하사받고 돌아왓습니다


경덕왕 3년

정월(1월) 봄

이찬(신라 2등벼슬) 유정을 중시(오늘날 국무총리)로 임명했습니다


2월 윤달 閏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서 하정(새해 인사) 하고

아울러 특산물을 올렸습니다


4월 여름

경덕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서 말을 바쳤습니다


겨울에 이상한 별이 중천에 나타났는데

크기가 닷말(다섯 말 약 40kg ?? ) 들이 그릇만 했습니다

이 별은 열흘 만에 사라졌습니다


경덕왕 4년

정월(1월) 봄

이찬(신라 2등벼슬) 김사인을 상대등(신라 귀족 수장직)

으로 임명했습니다


4월 여름

서울에 우박이 내렸습니다

그 크기가 달걀 정도였습니다


5월

가뭄이 들었습니다


중시 유정이 퇴직하자

이찬 대정이 중시가 되었습니다


7월 가을

동궁 東宮 (신라의 별궁)을 수리하고

또한 사정부 司正府 (형률, 탄핵 관련 관아)와

소년감전 少年監典 (제사 연주 관청 ??) 과

예궁전 穢宮典 (궁중에서 저장하던 진귀한 물건들 관리하는

관청 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을 설치했습니다


경덕왕 5년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서 하정(새해 인사) 하고

아울러 특산물을 올렸습니다


4월 여름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고

백성들을 위한 큰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승려 150명에게 도첩(승려 자격증) 을 주었습니다


<라봉봉>일본 관련 기록 외엔 별 다른 기록은 없고

나름 당대 신라가 안정기였음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때 당시 신라에게 무시받은 일본은

이후 신라 침공계획을 세우기도 하는데

배 500척도 만들고 등등 나름 준비를 하나

실익도 없고 등등의 이유로 결국 흐지부지하게 됩니다


경덕왕은 일본을 노골적으로 무시한 면이 있었던거 같고

이는 당대 경덕왕 뿐만 아니라 그냥 신라 백성들도

전체적으로 일본을 무시하고 얕보던 시절 같고

경덕왕 11년인 752년에는 김태렴이라는 신라 사기꾼이

신라 왕자를 자칭하고 일본 천황(일왕) 을 속이고

신하를 자처하며 천황의 비위를 맞춰주다가

이에 흥분한 ?? 일본정부의 적극적인 협조하에

여유롭게 일본 관광도 하고 가져온 물건을 다 팔아치우고

귀국했다고 합니다


일본 왕이 일개 신라 장사꾼에게 속아 넘어갈 정도로

일본과 신라의 국력차가 컸음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고

하여튼 이 기록들은 단순히 경덕왕 뿐만 아니라

신라 백성들 사이에서도 일본을 무시하는 풍조가 강했고

이후 통일신라가 후삼국시대가 시작되고 어려워질때에도

신라인들은 배를 타고 일본에 가서 일본을 약탈하고 돌아왔고

이에 일본인들은 신라인들을 우리가 '왜구(일본 해적)' 라 불리듯이

'신라구' 라 불렀다는데 역시 김태렴 기록이나 신라구 기록은

당한쪽인 일본측 기록에만 있는 상황입니다,,


하여튼 이런 상황들에  분노한 일본인들은

762년 신라를 공격하려했으나 결국 흐지부지 됬고

압도적인 신라와 일본의 국력차등에

굴욕적인 감도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반응형
Posted by 라봉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