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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덕왕 6년

정월(1월) 봄

중시 中侍 (오늘날 국무총리)를 시중 侍中 으로 고치고

국학 國學 (신라 교육기관) 에

제업박사 諸業博士 (국학에서 교육을 담당한

전문 관직) 와 조교를 두었습니다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서 하정 (새해 인사) 하고

아울러 특산물을 올렸습니다


3월

진평왕릉에 벼락이 쳤습니다


가을에 가뭄이 들고 겨울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이 굶주리고 또한 전염병이 돌았으므로

사방에 특사(신하) 를 보내서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위로했습니다


경덕왕 7년

정월(1월) 봄

천구성 天狗星 (별똥별)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8월 가을

태후 太后 (임금의 어머니) 가

영명신궁 永明新宮 으로 옮겨 거처했습니다


처음으로 정찰 貞察 (관리들의 풍기를

살피고 바로잡는 임무의 관직) 한 명을 두어서

백관을 규찰해서 바로 잡게 했습니다


아찬(신라 6등벼슬) 정절등을 파견해서

북쪽 변경을 시찰하게 했습니다


처음으로 대곡성 大谷城 (황해도 평산군)

등 14개의 군현을 두었습니다

(신라인들이 북방 지역을 개간한거 같습니다)


경덕왕 8년

3월 봄

폭풍이 불어서 나무가 뽑혔습니다


3월

천문박사 天文博士 (천문 관측 벼슬) 한 명과

누각박사 漏刻博士 (누각=물시계로 시간

관측 벼슬)여섯 명을 두었습니다


경덕왕 9년

정월(1월) 봄

시중(오늘날 국무총리) 대정이 사직하자

이찬(신라 2등벼슬) 조량이 시중이 됬습니다


2월

어룡성 御龍省 (국왕을 가까이서 모시는

직으로 추정) 에 봉어 奉御 (원래는 어백랑 御伯郎 이라

불렸는데 이때 봉어로 이름이 바뀌었다 하고

어룡성의 차관직이라 하며 국왕의 비서업무를

했다고 합니다) 두 명을 두었습니다


경덕왕 11년

3월 봄

급찬(=급벌찬, 신라 9등벼슬) 원신과 용방을

대아찬(신라 5등벼슬)으로 삼았습니다


8월 가을

동궁아관 東宮衙官 (동궁아에 딸린 벼슬,

동궁아는 태자가 거처하는 궁을 관리하는

동궁관 소속) 을 두었습니다


10월

창부 倉部 (국가 재정관리 관청) 에

사 史 (실무를 담당하는 하급 관직) 3명을 더 두었습니다

(사 는 처음에 8인이었는데

삼국통일 이후부터 꾸준히 늘었다 하고 신라의 재정사무가

확대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경덕왕 12년

8월 가을

일본국 사신이 왔는데

그가 오만무례하므로

경덕왕이 만나주지 않아

곧 돌아갔습니다


무진주 武珍州 (오늘날 광주광역시)에서 흰 꿩을 바쳤습니다


<라봉봉>글이 길어지면 주제가 선명해지지 않고

읽기 복잡해지는거 같아서 글 양을 줄였습니다,,


다시 경덕왕 이야기로 돌아가서,,

경덕왕은 나름 행정에 힘쓰는 모습과

무난무난한 치세를 유지하는 기록을 보여주고 있고

학문에도 힘쓰고 나름 성덕왕의 치세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국력도 강대했던 시기고 대곡성 기록같이

신라인들이 고구려 남부 영토였던 패서지역으로 진출하게

됨을 보여주는 기록도 나타납니다

일본과의 관계는 역시 좋지 않았지만

정치적으로 안정적이고 무난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점차 신라는 쇠망기로 접어든다 할 수 있고

이에 그를 신라 황금기의 마지막 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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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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