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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다리 살을 베어 아버지를 봉양한 향덕, 흔들리는 망덕사 탑>


경덕왕 13년

4월 여름

서울에 우박에 내렸습니다

크기가 달걀 정도였습니다


5월

경덕왕은 그의 아버지 성덕왕의 비석을 세웠습니다


우두주 牛頭州 (오늘날 강원도 춘천시) 에서

상서로운 지초 芝 (영지버섯 같습니다) 를 바쳤습니다


7월 가을

경덕왕이 관원(신하)을 시켜

영흥사와 원연사를 수리하게 했습니다


8월

가뭄이 들고 메뚜기 떼가 나타났습니다


시중(오늘날 국무총리) 조량이 퇴직했습니다


경덕왕 14년

곡식이 귀해서 백성들이 굶주렸습니다


웅천주 熊川州 (오늘날 충청남도 공주시) 의 향덕이라는 사람이

가난해서 그의 아버지를 봉양할 수가 없었으므로

자기의 다리 살을 베어서 아버지에게 먹였습니다

경덕왕이 이 소문을 듣고 그에게 선물을 후히 주고

동시에

정문 表門 (원문에서는 표문, 표시하는 문이라 나오고

옛날에는 이름난 충신,효자,열녀를 위해 나라에서 이런

문, 기념비들을 세워주곤 했습니다)

을 세워서 표창했습니다


<경덕왕>아아 이는 짐이 부덕한 탓이로다 !


망덕사 탑이 흔들렸습니다


<김부식>당나라 영호징의 '신라국기' 에는


'신라가 당나라를 위하여 이 절을 세운 까닭에

이름을 이렇게 (바라볼 망, 덕 덕자의 망덕사 望德寺 로) 지었다


(근데 실제로는 문무왕이 당나라군과 싸울때

당군을 물리치려고 사천왕사를 지었는데

그 소문이 당나라에 전해지자

신라에서는 당나라 왕실을 위해서 지은거라 변명했습니다


이에 당에서는 그 허실을 알려고 사신을 파견했는데

이 때 신라에서는 사천왕사를 당나라인들에게 보이지 않고

당나라 사신을 속이기 위해서 사천왕사 남쪽에

날림으로 망덕사를 창건했고

결국 망덕사는 영호징의 말처럼 당을 위해서 짓긴 지었는데

더 정확히는 당을 '속이기 위해서,,' 지은 절' 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름 망덕사는

나당전쟁 이후부터는 당과의 우호를 위한 절로 남았다 합니다)


두 탑은 마주 보고 있으며 높이는 13층이다.

두 탑이 갑자기 흔들리면서 떨어졌다 붙었다하며

곧 넘어질 듯하였다.

이러한 일이 몇일동안 계속되었다

이 해에 '안녹산의 난(당나라 멸망의 시작을 알린 난이라

할 수 있는 세계사적 사건입니다)' 이 일어났는데

아마도 그 감응이 아닌가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에 방문한 옛 당나라 인들>으으 ;;

왜 갑자기 탑이 흔들리냐해 ?


<신라인들>(음,, 지진아닌가 ? ) 현재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는데

당나라를 위해 지은 절이니 마땅히 그러한게 아닐까요 ?


<당나라인들>하오(good) ;;


4월 여름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서 하정(새해 인사) 했습니다


7월 가을

죄수들을 석방하고

늙고 병든이,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없는 노인들을

위문하고 정도에 따라 곡식을 주었습니다


이찬(신라 2등벼슬) 김기를 시중으로 임명했습니다


<라봉봉>실제로 못먹어서 굶어죽는 시대가 끝난게

독일 과학자 하버의 공기로 만든 '질소비료 개발(하버법)' 이후부터인데

150년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식량난으로 굶어죽던게 인류였고

한국도 '보릿고개' 라는 말이 수십년 전까지만 해도 있었을 정도로

극심히 못살았던 시절이 있었고 하여튼 요즘은

독재나 배급의 문제이지 인류가 먹을

곡식이 부족한 것까지는 아니라 합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진짜 배급을 떠나서 흉년, ,재난, 메뚜기 떼 등으로

식량이 전체적으로 부족한 경우가 번번히 있어왔고

한국사에서 흉년,가난할 때에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자신의 살을 잘라서 부모님에게 먹였다

(이를 '할고 割股 ' 라고 합니다) '


는 이때 기록에도 등장하는데

옛날에 이런것은 효의 상징적 방법이 되었다고도 할 수있고

그 외에도 극심한 흉년이나 가난으로

자식들을 삶아먹거나 시체를 먹거나

혹은 자기 자식을 차마 먹을 수 없어서

이웃집과 서로 아이를 바꿔서 요리해 먹거나

등등 극단적인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이런 것들이 실제로 존재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역사에는 안타까운 기록들도 많이 있고

오늘날도 밝은 이야기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에는 바로 다음 기록인

망덕사 탑이 흔들렸다는 기록인데

망덕사의 건설 배경에는 위에 썼고

당을 막기위해 지은 절인데

나당전쟁 종결 이후 신라와 당나라의 관계가 회복되자

나름 당과의 우호를 위한 절로 사용된 거 같고

13층 쌍목탑(두개의 목탑)도 있었던

망덕사도 상당히 규모가 큰 사찰이었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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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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