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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덕왕 16년

정월(1월) 봄

상대등(신라 귀족 수장직) 김사인이 병으로 사직하자

이찬(신라 2등벼슬) 신충이 상대등이 되었습니다


3월

서울과 지방 관리들의 월급제를 폐지하고

다시 녹읍 (녹읍은 귀족들에겐 일종의

영지 같은거라고 보면 됩니다 원래 신문왕때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키려 녹읍을 폐지하고 월급제로

바꿨는데 월급제도 많은 비용이 들었다 할 수 있겠고

결국 경덕왕때 국가의 재정부담이나 관리 부담 등으로

다시 귀족들에게 녹읍을 주게 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을 주었습니다


除內外群官月俸 제내외군관월봉

復賜祿邑 복사녹읍


<신라 귀족들>만세 ~ (다시 영주 생활이다 ~)


<경덕왕>음,, 대신 말좀 잘들어라,,

아직 그래도 왕권이 강한데 헛툰짓 하면 알지 ?


<신라 귀족들>넹 ㅋ


7월 가을

영창궁 永昌宮 (신라 궁궐인데 일설에는

왕실 사원이라고도 하고

혹은 천지신에게 제사 지내는 신궁이라고도 한다고 합니다)

중수 重修 (낡고 헌 것을 다시 손대어 고침) 했습니다


8월

조부 調府 (공물과 부역을 담당한 관청) 에

사 史 2명을 더 두었습니다


12월 겨울

사벌주를 상주로 고치고

1주 10군 30현을 소속시켰습니다


삽량주를 양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2군 34현을 소속시켰습니다


청주를 강주로 고치고

1주 11군 27현을 소속시켰습니다


한산주를 한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27군 46현을 소속시켰습니다


수약주를 삭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1군 27현을 소속시켰습니다


웅천주를 웅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3군 29현을 소속시켰습니다


하서주를 명주로 고치고

1주 9군 25현을 소속시켰습니다


완산주를 전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0군 31현을 소속시켰습니다


무진주를 무주로 고치고

1주 14군 44현을 소속시켰습니다


<김부식>양주 良州 는 양주 梁州 로 쓰기도 한다


<라봉봉>경덕왕의 녹읍 부활은

신라 행정사에서 중요하게 이야기 되는 이야기인데

녹읍은 귀족들이 그 땅에서 세금도 받고

노동력도 추취할 수 있는

왕같이 행동할 수 있는 제도였는데


신문왕때 녹읍을 폐지해 귀족들의 권한을 약화시키려 했고

대신 축년사조, 월급제로 전환했는데

월급제 등도 국가에서 일일히 신경을 써야하니

국가적인 부담이 컸고

행정시스템, 사회적 성숙도가

오늘날보다 발달하지 못한 옛날 신라시대에는

그 어려움이 상당히 컸다고 할 수 있어

결국 경덕왕대 이르러 신라 왕실도

녹읍제를 부활시켜 그나마 월급제보다

유지비용이 (당장에는) 덜드는

녹읍제를 부활시키게 됬고

결국 경덕왕 사후 신라는 분열, 멸망기가

시작되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경덕왕도 이런 사실들을 모르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고

대신 그의 심산은 이렇게 귀족들에게 줄건 주고

할 개혁은 하자 이런 마인드였던거 같고

녹읍을 부활시키고 곧바로 신라 지역 이름을

한자명, 중국식으로 바꾸는 '한화정책' 을 시행했는데

당연히 귀족들도

'왕이 녹읍까지 다시 줬는데 아무렴 ? ' 하면서

별다른 무리나 반발 없이 순조로운 개혁이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일단 경덕왕대 왕권은 약하다 볼 수는 없으나

선대왕대부터의 귀족 견제정책등에 대한 일들로 인해

점차 귀족들의 반발에 밀려가던 신라 왕실로 보여진다고 생각되고

나름 '당근과 채찍' 전략을 구사한거 같긴 하나

결과적으로 녹읍은 통일신라를

몰락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은 제도라 하며

녹읍은 워낙 특권이 강해서 그게 신라 초기같은

작은 도시국가들간의 정복,전쟁이

활발할 당시에는 그나마 유지가 가능했을 지라도

통일신라가 되고 정복지도 더이상 늘어나지 않고

전쟁도 없다싶이 한 시대에 녹읍부활은 사실상 지방 귀족들의

군벌화를 불러온 제도라 할 수 있고

결국 지방의 귀족,호족들은 스스로를 성주, 장군 등을 일컬으며

행정권과 군사권을 장악하고 신라 후삼국 시대라는 혼란의

시대를 열게 만든 원인중 하나가

바로 녹읍 부활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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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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