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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 이름을 *복고시킨 혜공왕 (한화정책 중단) >


(*복고 復古 과거의 모양, 정치, 사상, 제도

풍습 따위로 돌아감 )


혜공왕 11년

정월(1월) 봄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3월

이찬(신라 2등벼슬) 김순을

시중(오늘날 국무총리) 으로 삼았습니다


6월 여름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서

입조(조정 회의에 참가)했습니다


이찬 김은거가 반역하다가

처형당했습니다


8월 가을

이찬 염상이 시중 정문과 함께 반역을 도모하다가

처형당했습니다


(계속 주기적으로 신라 초고위층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혜공왕 12년

정월(1월) 봄

백관(신하) 들의 관직 이름을 모두 이전대로

복구했습니다


<라봉봉>혜공왕의 아버지 경덕왕대에

관직 이름을 중국식,한자식으로 바꾸는

'한화정책' 이 시행됬는데

편의성, 국제적 표준에 맞추려 시행했던

한화정책이었는데

굳이 이것을 이전대로 되돌린 이유는

신문왕대에 폐지된 녹읍이

경덕왕대에 부활했는데

적어도 녹읍은 귀족들에게 큰 이익이 있었던 것이었고

관직명 복구는 딱히 이익도 없지 않았을까 싶은데

결국 왕권에 대한 귀족들의 반발심에서

다시 복구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역사에서는 아무리 옳은 개혁이었을 지라도

'반동' 이라고도 불리는

개혁에 대한 여럿 반발이 있어왔고

보통 패턴이


1. 개혁


2. 반발로 다시 이전 체제로 복구


3. 이후 다시 개혁의 보편화, 안착


이런 패턴이 있어왔고

서양 민주주의 발달사에서도

공화정이 시행되다

왕정이 다시 복고되는 경우도 있었고

세종대왕이 만드신 한글이

연산군대부터 탄압을 받다가

결국 오늘날 보편화됬듯이

역사에서는 이런 패턴들이 여럿 존재했고

이는 기존 체제에 대한 안정감 등에서

과도기적인 반발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당시는 이미 통일된 신라였지만

특히 삼국중에서 보수성이 강했던 신라는

새로운 문물,개혁에 대한 토착세력의 거부성이

강했던 나라였고 이렇게 경덕왕대의 한화정책이

혜공왕때 다시 복고된 것을 보면

백제나 고구려에 비해 불교수용이 어려웠던 신라가

불교가 들어올때 겪은 큰 진통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결국 혜공왕대 다시 복구된 이런 관직명등은

다시 복고되고 이후 기존 체제가 아닌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 했던

고려시대부터 다시 한화정책이 본격적으로 시행됬고

안정 추구성이 강했던 신라인들에게

이런 제도 개혁들이

항상 큰 반발을 겪어왔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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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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