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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부 시기의 경제>

[강남 개발]

[강남 이기주의]

[첨단 사업 육성]

[삼성의 반도체 신화]

[국제그룹 해체사건]

[노동운동 탄압]

[구로동맹파업]

<라봉봉>

 

[강남 개발]

전두환 정부는 이전 박정희 정부 시기 경제 정책을 계승했는데

이전 박정희 정부시기인 70년대부터 서울 도심의 인구폭발 방지를 위해

계획된 강남 (한강 남쪽) 지역을 서울로 포함시켜 개발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면산에서 본 오늘날 강남 , 서초구의 모습

 

한국사회와 강남 ,

한국의 비벌리 힐스라고 할 수도 있는 강남은

한국에서 가장 사치스럽고 , 고급스러운 도시의 대명사가 되었고

(물론 더 자세히 보면 진짜 부자들은 강북에 개인주택에 거주한다지만

강남이라는 지역은 한국사회에서 부를 상징하는 상징적 의미가 큽니다)

 

원래는 한강 이남지역은 서울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영등포 지역만 서울에 속했고

이곳을 제외하면 대다수가 허허벌판에 농지 , 습지 , 과수원 등

소박한 생활을 살던 가난한 지역이었는데

 

북한과 대치하던 상황속에 강북지역 인구밀도를 분산하기 위해

또 정치자금 조성 , 경제성장 , 자동차 보편화 등이유로

여러가지 복합적인 사정으로 논두렁이던 강남이 도시로 개발됩니다

 

1978년 강남구 압구정동 아파트 옆에서 밭을 가는 농부의 모습

 

결국 박정희 정부를 이어 전두환 정부는 강남개발을 추진해

허허벌판위에 건물들은 건설했고

구불구불한 골목이 많은 서울(강북)과 달리

강남은 미국식 스트리트 등의 개념을 도입해

바둑판식 깔끔한 도시개발을 했고

당시부터 수많은 정치인들은 강남 개발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땅들을 투기하기 시작합니다

 

강남은 한국 신도시 1기이자 (일산보다 더 먼저임)

단순한 인구 밀집 해소를 위한 차원이 아닌

정부 차원에서 편애하듯이 엄청난 공을 들여 개발했는데

강남지역에는 양질의 학군형성을 위해

서울 강북의 명문고등학교들을 이전시켰고

수많은 시설들 , 편의시설까지 강남으로 이주하며

경제적 중심이 아예 서울에서 강남으로 옮겨집니다

 

하루아침에 깡촌에서 고급 대도시가 된 강남이었고

수많은 땅투기꾼들이 기회와 이익을 얻기 위해 몰려들었고

수많은 욕망과 '강남불패 신화(강남은 지지않는다는 믿음)' 를 낳은

강남이었습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가장 미국느낌나는 곳을 뽑으라면

저는 이태원이 아닌 강남을 뽑고 싶습니다

미국 다녀오신 분들은 알겠지만

미국은 신용 , 신뢰 , 법치적 측면에서 한국과 달리 엄청나게 철저한 모습이 있고

강남은 환상을 좇아 수많은 사기꾼과 범죄자 ,

창녀와 건달들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하지만

가장 한국사회에서 물가도 세고 돈도 많고 또

가장 법과 신용이 FM 대로 지켜지는 곳이라고도 생각됩니다

[물론 미국사회나 강남에도 노답 구석이 많으니 너무 환상을 가지면 안됩니다] )

 

1966년에는 강남구 압구정동 땅 한평이 짜장면 10그릇 값에 불과했습니다

 

강북 고급 주택가 신당동이 평당 3만원이었을때

당시 압구정동과 신사동은 400원에 불과했다 하고

당시 짜장면값이 한그릇에 40원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박정희 정부시기부터 강남 개발에 대한 소리가 나오자

강남땅은 어마어마하게 폭등합니다

 

(이미 1966년 서울 말죽거리는 땅 한평값이 300원이었고

짜장면이 30원이었는데 오늘날까지 짜장면값이 150배정도 오를 동안

말죽거리 땅값은 평당 3천만원 이상으로 10만배가 넘게 올랐고

자고 일어나면 수십배씩 땅값이 오르던 시절이라

마치 몇년전 비트코인때 그랬듯이

이후에도 강남개발때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단 비트코인은

실체가 없다는 문제로 땅과 엄연히 다르지만 순수 생업을 위한 목적이 아닌

투기자본 형성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

 

이런 상황이 전개되자

당시에 '복부인' 이라 불리는 땅투기 아줌마들이 달려들었고

또 고급학군을 찾아 치맛바람을 휘날리는 아줌마들도 강남에 달려들고

하여튼 여러 '큰 손' 들이 나타나 강남을 사기 시작했습니다

 

부동산 투기를 업으로 삼는 여성을 뜻하는 '복부인' 들 , 출처 : 영화 복부인(1980)

 

가장 큰손은 놀랍게도 정부 인사였는데

박정희 정부의 정치 , 대선자금을 마련하려

수많은 땅을 싸게 샀다가 땅값이 오르면 팔았고

이에 박정희의 정치자금이 마련됬다고 합니다

 

(사실 한국 정치인들이 소탈한척 하는데도 실제로는 썩은 구석이 너무 많고

박정희 빨면 안되는 수많은 이유중 하나가 또다시 나타납니다)

 

물론 당시에도 공무원 신분의 중립성을 지키며

돈가방을 싸들고오며 정보를 알려달라는 사람들에게

정보를 알려주지도 , 땅을 사지도 않은 강직한 공무원도 있었고

돈벼락을 맞은 강남의 대표적인 땅부자들도

그렇게 행복한 노년을 보내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하여튼 조금더 강남이야기를 하자면

강남 투기 자본들의 상징성이 가장 큰 건물은

뭐니뭐니해도

 

'대치동 은마아파트'

 

였습니다

 

강남 투기의 상징 '대치동 은마 아파트'

 

강남구 최대의 주거 전용 대단지로 건설됬고

36년동안 강남 아파트의 상징이었다 2015년부터 재건축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고

하는데

대치동 은마아파트는 한국사회에서

'몇년도에 은마아파트는 얼마얼마였는데' 하는 당시 물가 기준을 의미하는

척도로도 쓰이는 아파트이기도 하고

특히 대치동은 강남에 경기고 , 휘문고 등의 명문고가 이주되자

학원가가 발달해 학원특수로 엄청난 집 수요가 발생해

집값이 천정부지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로 강남은 한국에서

'욕망의 땅' 을 상징하는 지역이 되기도 했고

강남 개발사를 다룬 드라마 '자이언트' 1화 오프닝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오며 시작됩니다

 

<자이언트 1화 오프닝 내레이션>강남 , 한강의 남쪽.

실개천이 흐르고 송아지 울음소리가 울려퍼지던 이 강남 땅에서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개발의 서막이 시작됐다.

불과 40년만에 강남의 땅값은 수십만배나 올랐다.

이 황금의 땅을 둘러싼 싸움은 그 어떠한 전쟁보다도 비정하고 처절했다

 

강남 개발사를 다룬 한국 현대사 드라마 '자이언트(2010)'

 

강남개발사를 다룬 영화 '강남 1970 (2015년 작품)'

 

[강남 이기주의]

엄청난 욕망과 환상을 남긴 강남이지만

막상 가보면 동네가 엄청나게 부유한 느낌보다는

 

(그런 곳은 보통 고급 주택가로 따로 있습니다)

 

정갈한 평범한 동네 느낌도 나는데

물가가 매우 쎈 느낌도 나서 무시무시한 느낌도 나는 동네입니다

 

이곳에 수많은 이들이 환상을 좇아 몰려들었고

더불어 많은 빈민층도 살고 유흥업소들이 들어서며

창녀와 건달들도 모여드는 동네가 됬는데

이러한 모습들에

한국 물질주의와 이기주의를 상징하는 동네가 되기도 했고

 

실제 '강남 이기주의' 라는 말이 있는데

강남 이기주의는 집값 상승을 위해 좋다는 인프라는

모조리 강남일대로 유치시키려 징징거리는 지역 이기주의이며

이들의 요구대로 이루어진게 적지않게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유형의 이기주의는 사회학에서는

님비현상(우리지역에 매립장이나 교도소같은 혐오시설은 절대 안된다는 주의)

의 반대말로

핌피현상(우리지역에 제발 병원 , 백화점 등 집값올리기 좋은 시설을 지으라는 주의)

이라고도 이야기 되고 있고

 

(사회에서는

의무는 다하지 않고 권리만 챙기려는 얌체같은 모습들만 보인 사람들을

흔히 '양아치' 라하며

그런 사람들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되있습니다)

 

'강남 이기주의' 같은 모습은

여러 사회의 공동의 이익을 저해할 수도 있기에

사회에서 특히 경계해야 할 이기주의 모습입니다

 

이에 가수 싸이가 강남 사회를 희화화 시킨

'강남 스타일' 이 2013년에 세계적 열풍을 불러오기도 했고

특히 유튜브에 올라온 뮤직비디오가

세계적으로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했는데

 

각 나라마다도 '강남같은 지역' 이 존재하는 경향도 있기에

강남의 우스꽝 스럽고 사치스러운 모습이 나오는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는

많은 사람 , 세계인들의 공감을 받은 노래가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강남을 풍자하는 뮤직비디오로 세계적으로 흥행한 가수 싸이의 '강남 스타일'

 

강남 집값은 꾸준히 상승해왔고 오늘날에도 계속 상승해

'강남불패' 라는 오만한 말도 나오게 됬는데

오만한 강남을 상징하는 말이라고도 생각하지만

저는 강남이 그렇다고 이기주의와 물질주의에 필패한다고도 생각하지도 않고

저는 그러한 이기주의에 빠진

'강남 스타일' 을 혐오하는 모습도 있는 사람이지만

재밌는게 제 블로그 방문 지역 1위가 미국이 압도적으로 높고

2위부터 9위는 일산과 분당 신도시를 제외하고 모두

강남 , 서초 , 송파 , 서울지역에서 들어온다는 점이고

'난 시골스타일이기도 한데 왜 내글을 보지 ?' 하며

의심의 마음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역사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가지는 지역이라 생각되어 참 뿌듯했습니다

 

근데 쪼잔한 투기 졸부놈들이라 그런지

강남사람들에게 후원은 한번도 받은적이 없고 하하

하여튼 저는 강남은 너무 부유하거나 환상적인 느낌이 나는 동네도 아니고

그저 평범하고 정갈하고 정상적인 느낌이 나는 동네이기도 하다 생각합니다

 

제가 사는 일산도 강남이 포화되고 땅값 상승등 진입장벽이 높아지자

강남 다음의 2기 신도시로 만들어졌고

일산도 바둑판식 , 정갈한 느낌 , 정상적임을 추구하는 느낌이 있어

평생 일산에서 산 저는 강남도 일산이랑 똑같은 느낌이 나긴 나서

서울 광화문이나 강북지역을 다니는 것에 비해

굳이 강남에 가도 그다지 큰 감흥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오늘날 젊은 층에서도 강남 지역을 좋아하는 성향이 강한데

강남이 한국에서 오늘날까지 여러 환상 , 좋은 이미지등을 남긴 것은

그 도시가 가지는 엄청나게 특별한 느낌의 풍취라기 보다

평범한 느낌이지만서도 그나마 원칙과 법이 한국 사회에서

가장 잘 지켜지는 동네이기도 하고

불법과 뒤통수 , 뒤통수의 뒤통수가 난무하는 한국사회에서

지극히 상식적인 일들을 지키려는 시늉이라도 하는게 그나마

강남같기도 하고 완전 제취향은 아니지만

저도 나름 선진적이고 깔끔한 느낌의

강남의 멋에 빠진 적도 있었던 거 같습니다

 

최근에 작은 사기와 큰 사기를 당해 마음이 크게 아픈 적이 있었는데

저는 물론 사기범들에게 반드시 피해보상을 받아내는 사람이지만

만약 강남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들이 한국 다른 지역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들에 어찌보면 앞으로도 한국은 점차 강남화가 되갈 수도 있고

강남은 한국 다른 지역들의 미래를 보여주는 도시이기도 하다고 생각됩니다

 

오늘날 강남의 빌딩숲

 

[첨단 사업 육성]

전두환 정부 시기에 박정희 정부 경제정책과 다른 모습의

가장 중요한 것중 하나가

바로 반도체 , 첨단산업 육성인데

박정희 정부시기 경공업과 중화학 공업이 육성되어

한국 경제는 크게 성장했고

 

한국 국민게임인 스타크래프트를 해본 아재들이라면 다들 아시겠지만

마치 마린(경공업) 뽑다가 탱크나 레이스뽑았으면 (중화학 공업)

그 다음에는 배틀쿠르져나 클로킹 고스트와 핵미사일(첨단산업) 가야하듯이

한국 역시 중화학 공업 다음 먹거리로 첨단 , 전자산업 육성을 시작하게 되었고

전두환 정부의 전폭적 지원아래 기업들은 첨단 산업 육성에 뛰어듭니다

 

단 이과정에서도 정부와 경제계의 정경유착은 끊이질 않았고

많은 기업들이 전두환 정부에게 정치자금을 내야했거나

내기를 강요받기도 합니다

 

전두환은 고속도로건설 , 차세대 전투기 , 반도체 , 율곡사업(국방력 강화) 등의

이권을 삼성에게 제공하는 대가로 삼성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8차례 걸쳐 220억원의 자금을 받게 됬습니다

 

(전두환은 이후 법의 심판을 받자 자신의 재산이 29만원 밖에 없다는

망언을 남기기도 했으며

아직도 전두환이 기업을 협박해 꽁쳐 둔 돈이 다 어딧는지 모릅니다)

 

전두환 정권은 1983년을

'정보산업의 해' 라고 명명하고

당시 돈으로 10억원 예산을 들여 컴퓨터를 보급하기도 했고

전국 광케이블 매설을 추진해 훗날 IMF 를 극복하는 원동력이 된

IT 산업 발전의 기틀을 놓기도 했습니다

 

[삼성의 반도체 신화]

또 가장 중요한 것으로 오늘날 한국 주요 먹거리 중 하나인

전자 - 반도체 산업이 전두환 정부시기 육성됬는데

대표적인 기업이 바로 '삼성' 입니다

 

삼성전자 로고

 

당시 삼성창업자 이병철도 점차 늙어가고

그의 자식들로 차기 삼성 회장 후계구도가 이뤄지고 있었는데

이병철은 첫째아들 이맹희에게 그룹 경영 일부를 맡겼는데

6개월도 채 안되서 맡겼던 기업체 뿐만 아닌 그룹 전체가

혼란에 빠지고 말아 매우 분노해있었고

또 그의 첫째 , 둘째아들은

문제를 일으키거나 아버지를 청와대에 고발하거나 대들다 얻어맞는 등

삼성가에는 콩가루 집안 파티가 펼쳐지고 있었고

 

절망에 빠진 이병철은

그의 셋째아들이었지만 가장 총명했던 이건희에게

일을 맡겼더니

이건희는 앞으로 반도체야 말로 앞으로 한국의 미래먹거리임을 확신했고

이병철 회장의 회의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1974년 사비를 털어 파산직전의 한국 반도체를 인수했고

(이때까지는 재벌아들의 중소기업 설립 수준입니다)

 

엄청난 노오오오오오력을 해서

전자회사의 모양을 잡아가게 됩니다

 

이건희가 반도체에 계속 기술투자로 돈을 꼬라박자 이병철 회장이

반대했지만

이건희는 고집을 꺾지 않고 계속 투자를 시작하며 자기 생각대로

밀고 나가기 시작했고

이병철도 이건희의 뚝심을 보고 결국 얘는 믿고 맡겨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후계자리를 이건희에게 줄 것으로 마음을 굳히게 됬다고 합니다

 

1987년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3라인 기공식에 참여한 말년의 이병철 회장(맨 오른쪽) 과 이건희(이병철 왼쪽)

 

결국 이건희는 양이 아닌 질에 엄청난 집착을해

계속해서 기술을 쌓아나갔고

그러한 뚝심은 이후 그에게 어마어마한 부를 가져다 주고

오늘날 삼성이 세계 최고품질의 반도체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여튼 이병철도 초대 창업주답게

사람 , 사업 보는 눈은 뛰어났던 인물이었기에

곧 이건희가 주도하던 반도체가 앞으로 엄청난 미래가치가 있는 사업임을 직감했고

 

당시 대한민국의 상황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겨우 산업화가 되고 막 인프라를 갖춘 시기였는데

미래 가치를 보고 결국

미국 , 일본정도의 초선진국이나야 할 수 있었던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게 되었고

 

미국과 일본 기업들의 덤핑공세로 공격받아

삼성은 84년에는 당시돈 1300억원의 어마어마한 적자가 났지만

꿋꿋이 밀어붙여 1984년 256K D램 개발에 성공하고

 

삼성의 256K D램

 

86년 1Mb D 램을 출시해 전환점을 맞이했고

확고한 기술력과 관리능력이 갖춰지자

사업이 본 궤도에 오르게 되며

256K는 시장 출시 1년만에 세계 D램 시장

1/10 을 점유하고 이후 미국 , 일본 선두주자들을 차례로 추월하며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게 됬습니다

 

이병철 사후 이건희는 삼성을 전자회사로 키워냈고

삼성가의 아름다운 일화이기는 하지만

당시 이병철 회장도 전두환 대통령을 만나

반도체 산업에 대한 정부차원의 전폭적 지원을 요청했고

새로운 미래사업 육성에

과기처가 100억원 , 통신공사가 200억을 내는 국비가 투입되기도 했고

1988년 4M D램 반도체가 완성되자

전두환은 삼성 , 현대 , 연구원 , 교수들을 청와대로 불러

저녁 만찬을 즐겼고

전두환 대통령은 기분이 좋아져 직접 마주앙 와인병을 들고

연구원들 한명 한명에게 따라주었다고 합니다

 

한국 반도체 사업은 기업 뿐만 아니라 정부까지

국책사업으로 느끼고 차기 한국 미래의 운명을 걸고 올인한 것이었고

세계 최고 수준의 한국 반도체는 오늘날 한국 수출의 효자 상품이 되었습니다

 

[국제그룹 해체사건]

이미 박정희 정부시기부터 정부와 대기업의 여러 얽히고 얽힌 관계였고

전두환 정부시기 기업들은 삼성처럼 좋은 일만 있지는 않았는데

 

일단 현대 정주영 회장은 이전 자신을 깊게 신뢰한 박정희 정부는

좋아했지만 전두환 정부때는 계속해서 정치자금을 강요받는 등

여러 곤란이 있었다는데

정주영 회장은 전두환의 정치자금 요구가 괴로웠지만

내기 힘듬에도 강압적인 분위기로 안 낼 수가 없었기에 냈다 하고

결국 이후 정주영 회장은 이러한 정치권의 갑질에 분노를 느껴

대선에 출마하기도 했습니다

 

현대 정주영 회장은 그나마 처세를 잘한 편이었고

당시 재계순위 7위 재벌기업이었던 부산 제 1의 향토기업이었던 국제그룹은

전두환 정부의 눈에 밉보여 하루아침에 해체되게 됩니다

 

전두환의 퇴직후 대비를 위해 설립된 '일해재단(일해는 전두환의 호)' 은

대한민국 내로라 하는 재벌총수들에게 찬조금을 받았는데

당대 한국 30대 재벌중 국제그룹 양정모 회장의 기부액은

가장 적은 5억원에 불과했고 이후에도 밉보여

전두환 정부에게 괘씸죄로 찍혀서 부실기업으로 찍혀

해체되게 됬습니다

 

옛 국제센터 빌딩 (현 LS 용산타워)

 

당시 국제그룹은 부실기업으로 정리됬다고 하지만

여러 논란과 의문을 낳아 오늘날

사실상 전두환에게 돈을 덜준 것 때문에

해체 된 것이 유력하다 이야기 되고있고

 

또 전두환에게 잘보였던 기업들은 상당한 특혜를 받으며

재계 순위가 껑충 뛰어오르거나

알짜배기 산업을 인수해 '새우가 고래를 먹었다' 는 말이 나오게 될 정도였고

결국 공권력에 의해 탄탄한 그룹하나가 공중분해 되고 하는 등의

정경유착 폐해가 심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후 전두환은 국고를 빼돌리고 기업들에게 정치자금 출연을 강요해

엄청나게 많은 비자금을 챙긴 죄로 결국 1996년 포괄적 뇌물죄로

추징금 2200억원을 선고받았고

600여억원을 납부했는데

본인은 남은 돈이 없다 주장하나

오늘날에도 측근들과 호화 골프를 즐기다

지탄받게 되었고 또 미국 한인 사회에서는

어느어느 마트나 농장들이 전두환이 운영하는 것이라는

뒷소문이 있다고 합니다

 

그의 말도안되는 주장으로 패러디 된 29만원 지폐 , 29만원을 1두환 , 1DH 라고도 부르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노동운동 탄압]

또 전두환은 그나마 자기에게 잘보이는 대기업들과는 친하게 지냈지만

노동자 인권등에 대해서는 박정희와 같이 잔혹했는데

 

집권초부터 전태일 열사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계엄법 위반으로 구속한다거나

노동조합 정화 지침을 내려

노동운동을 집중적으로 탄압했고

 

노동운동을 사회로부터 고립시키려 했고

학생들의 노동야학과 노동현장 진출을 범죄로 다루었다고 합니다

 

전두환 정부는 민조노조를 파괴한 뒤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노조원들의 재취업을 막았고

노동조합 간부들을 삼청교육대로 끌고가 '순화교육' 을 시킨다거나

노조들을 엄청나게 파괴하거나 어용화시키며 노동운동의 씨를 말릴려고 했습니다

 

박정희 · 전두환 정부는 철저한 기업가의 편에 서서

노동운동하는 노동자들을 국가 이익에 저해되는 빨갱이정도로만 여긴 것이었고

노동운동도 물론 여러 집단 이기주의 변질될 수도 있는 것이지만

 

고용주 입장에서도 노동자들의 현실을 잘 헤아리는게 결국 사업 성공의

주요 방법임에도 (기업의 지속 가능성과 연관됩니다)

 

전두환 정부는 그저 노동운동을 악으로 규정하고 가혹한 탄압을 했고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전두환은 학창시절 신문배달과 리어카 배달을 하고

가난 때문에 직업군인의 길로 갔다는데

정작 권력을 잡고난 뒤는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탄압을 가했던 것이고

참으로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 는 말이 떠오릅니다

 

[구로동맹파업]

이러한 정부의 잔혹한 탄압이 계속되자

민심은 서서히 저항심을 키워가며

학생과 노동자들은 극한 투쟁으로 맞섰고

전태일 열사 분신사건 이후부터 학생 , 민주화 운동가들은

정치적 민주화 뿐만 아닌 노동계에도 민주화가 시급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전두환 정부 시기부터는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은 결합을 통해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움직임도 나타났고

당시 학생들이 노동현장에 들어가는 '농활' , '공활' 은 당연한 활동으로 인식됩니다

 

70년대부터 이어온 열악한 대한민국의 노동환경은 80년대에도 개선되지 않았고

 

1985년 6월 24일 결국

구로공단의 노동조합들은 연대해

대한민국 최초의 동맹파업을 벌였는데

당시 미싱사로 일하던 심상정(오늘날 정의당 정치인) 등의 주도로

파업에 돌입했고

이에 여러 기업들의 노동조합들이 파업에 동참합니다

 

구로 노동파업 당시 농성을 하는 노동자들의 모습

 

결국 기업가들과 경찰의 탄압속에서

파업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해산시켜

1주일만에 파업은 끝났고

파업을 주도한 44명의 노동자들은 불법파업을 벌였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파업 결과 1천여명의 노동자가 해고됬습니다

 

이후 노동조합 운동가들은 기업별 노동조합이

권력 앞에 무력할 수 밖에 없음을 깨닫고

노동조합의 연대를 모색했고

심상정 , 김문수 (오늘날 진보정당과 보수정당 인물인데 서울대 출신이라는

공통점은 있고 김문수는 이로 인해 변절자 이미지도 있다 하며

하여튼 뜬금없는 조합입니다)

 

등을 중심으로 서울노동운동 연합을 결성했고

이후 대한민국 노동운동에 많은 영향이 생겼습니다

 

파업 이후 구속되지 않은 노동운동가들은 10년에 걸친 수배생활을 해야했고

심상정은 1993년 재판에 기소되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으나

2001년 김대중 정부는 구로동맹파업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고

당시 관련자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오늘날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는 정치인 '심상정'

 

당시 경제는 그렇게 가난한 자에게는 엄격했고

부유한 자에게는 관대했는데

이는 단순히 박정희 정부대부터 심화된 양극화 문제와는 다른

사회 정의의 문제였고

 

정의사회구현을 정책모토로 내건 전두환 정부는

정작 이러한 경제적 ,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정의가 없었습니다

 

<라봉봉>하여튼 여러 이야기를 남긴 한국 80년대 경제사였고

예나 지금이나 '일확천금' 의 유혹은 컸고 또 그 독도 컸습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현재도 투기자본이 너무 커서

정상적인 경제생활이 어려운 나라이기도 하고

이러한 투기자본의 확대는 엄청난 땅값상승 , 임대료 상승으로 이어졌고

그 피해는 오늘날에도 고스란이 돌아오고있습니다

 

저도 돈을 참 좋아하지만 언제까지나

노력해서 얻은 돈 , 건강한 돈을 좋아할 뿐이고

돈에 양심을 팔거나 하지는 않으나

그런 사람들이 보이고 또 피해를 주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고

오늘날 한국은 물리적 범죄 대처는 강하나

이러한 경제사범 , 사기 범죄에 대해서는

신용을 생명같이 여기는 미국과 달리

지나치게 관대한 면이 있다 생각하고

 

한국이 진정 선진사회에 진입하려면

신용사회 건설은 반드시 우선되어야 하는 것인데

너도나도 상류층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정작 그런 절제나 신용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며 단지 성공의 환상만을 좇으며

성공을 위해 성을 판매하고 범죄를 저지르고 , 남에게 눈물나게 하고

수단 ,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들을 보면

 

아무리 한국사회가 그런 허점이 있다 할지언정

결국 그들이 필망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불쌍한 자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발 돈 많이 벌고 부자되는거 다 좋은데

서로 양심과 배려심은 챙기며 살았으면 좋겠고

 

하여튼 우리나라에서 책도 잘 읽지 않는것들이

전문가인 척 나와 뻔한 사탕발린 이야기 , 그럴 듯한 이야기들을 말하며

성공에 대해 논하는 것도 참 웃기고

한국 사회가 비록 물질적 성장은 여럿 이뤄냈지만

오늘날에도 여러 근본도 없는 찌질이들이

티비나 유튜브에 나와 전문가인냥 설쳐대는 것을 보면

한국 사회는 아직도 정신적 가치에 대해서는 미숙하고

이러한 정신적 , 심리적 성장 역시 동반되어야 된다고 생각됩니다

 

1980년대 여러 빛나는 경제발전도 있었지만

우리 사회에는 이러한 어두운면이 있었고

또 오늘날에도 이어져 오고 있고

저는 굳이 양심을 팔지 않아도 누구나 성실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 사람으로서 한국에 군대식 , 강압식 , 이기주의 경제가 아닌

올바른 기업문화 , 경제 문화가 정착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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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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