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냉전 대결과 케네디 암살 사건>

[미국과 소련의 우주경쟁]

[아폴로 계획]

[쿠바 미사일 위기]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

<라봉봉>

 

[미국과 소련의 우주경쟁]

한국전쟁 이후에도 미소 패권경쟁 ,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의 체제경쟁은 계속되었고

미국과 소련은 한창 전쟁 이후 여러 특수와 풍요를 누리며 전후 세계질서를 양분합니다

 

미국과 소련은 정치 , 경제 , 군사 분야 이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체제 과시 , 경쟁을 하게되는데

대표적 사건이 '미소 우주경쟁' 입니다

 

당시 지구의 모든 영역은 이미 모두 탐사되었고

지구인들은 지구 너머 세계로 나아가야한다는 것을 직감했고

당장 지구 자원 역시 무한정 있는게 아니기 때문에

옛날 세계인들이 광활하게 느꼈던 지구는 이제는 고립된 작은 섬같이 되었고

생존을 위해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세계인들은 눈을 우주로 돌리게 됩니다

 

나치독일 패망후 미국과 소련은 각각 과학대국

독일의 우수한 과학자들을 포섭 , 자국에 끌고와 산업 , 과학 발전에 기여시켰는데

소련 , 러시아 역시 수많은 기초과학자가 나오는 무시못할 과학강국이었고

또 우주개발은 로켓 , 장거리 발사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에

대륙간 탄도 미사일같은 군사기술과도 연관이 있었던 것이라

소련 정부는 서둘러 우주개발을 하게 됩니다

 

1957년 10월 4일 소련은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를 우주에 보내는데 시작하며

우주경쟁이 시작됩니다

 

스푸트니크

 

미국은 고작 농업국가수준이라 생각했던 공산국가 소련이

자신들보다 한발앞서 인류 최초로 인공위성을 발사시키자

충격을 받게 되어 우주개발에 본격적으로 뛰어듭니다

 

[아폴로 계획]

우주기술은 대륙간 탄도미사일 , 인공위성 정보수집 같은

군사기술과도 연관되있기 때문에

1960년대 미국은 집착하듯이 엄청난 예산을 NASA , 미항공우주국에 쏟아부었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소련이 인류 최초의 유인우주선을 만들어

우주 비행사 유리 가가린을 우주로 보내버리자

미국은 아주 고통에 휩싸이다가

결국 미국 케네디 대통령은 1960년대 인간을 달에 보내겠다는

'아폴로 계획' 에 대한 밑밥을 깔았습니다

 

<케네디 연설>그것은 곧 '왜 가장 높은 산을 오르는가 ?' 와 같습니다.

왜 35년 전 비행기로 대서양을 횡단했고 ,

왜 라이스는 텍사스와 경쟁합니까 ? 우리는 달에 갈 것입니다.

우리는 달에 갈 것입니다.

우리는 1960년대 안에 달에 갈 것이고 , 다른 일들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쉬운 일이기 때문이 아니라,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NASA는 60년대안에 달에 사람을 보내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 소련에게 달탐사까지 뺏기지 않기 위해

무리하게 촉박한 일정으로 우주기술연구를 시작했고

1967년에는 우주비행사 3명이 사고로 죽기도 합니다

 

이에 NASA는 조급함을 반성하고

다시금 우주연구를 시작하고

끝내 1969년 아폴로 11호를 달에 보내는데 성공합니다

 

7월 21일 미국의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은

달에 첫 발을 내딛습니다

 

<당시 닐 암스트롱>지금 어... 착륙선의 사다리 밑단에 서 있다.

착륙선 다리는 어... 어... 달 표면에 , 어... 1인치나 2인치 정도 가라앉아 있지만,

달의 표면은 가까이서 보면 꽤… 꽤 입자가 곱다.

거의 가루와 같이 보인다.

지표는, 어... 입자가 굉장히 가늘다.

 

이제 착륙선에서 내려가겠다.

 

이것은 한 명의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커다란 도약이다.

(That's one small step for a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

 

암스트롱과 그의 2명의 대원들은 달에 역사적인 발자국을 찍었고

달에 기념판을 설치하고 성조기를 꽂고 인증샷을 남깁니다

 

닐 암스트롱이 인류 최초로 달에 남긴 발자국

 

왼쪽부터 암스트롱 , 콜린스 , 올드린

 

역사적 순간 , 달에 착륙한 인간

 

또 아폴로 11호는 지구로 무사히 귀환해

암스트롱 포함 3명의 우주인은 인류의 영웅으로 높여졌고

미국은 소련을 이겼다는 승리를 만끽합니다

 

일부 사람들은 아폴로 11호의 달착륙은

소련에 대한 경쟁으로 비롯된 미국정부의 조작 , 음모론이라 주장했지만

정작 음모론을 하는 자들은 아폴로 계획이 그저 허구로만 구정짓고

비판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나 내용을 내놓지 못했고

 

(미국판 타진요급)

 

성조기가 우주에서 펄럭인다는 이유로 인류가 달에 간게 거짓이라 한다거나

하는 억지주장을 내세웠고 해당음모론은 거짓이라는 사실이 이미

오래 전에 논파되었습니다

 

[쿠바 미사일 위기]

1960년대는 우주경쟁 이외에도

미국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냉전시대를 대표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1962년 소련은 미국 본토 바로 앞의 공산국가 쿠바에

핵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려 했고

 

<소련 지도자 흐루쇼프>나는 존 F. 케네디의 불알을 움켜쥘 거요. (표현 보소 ㅋㅋ)

 

R-14 미사일

 

R-14의 사정거리 (가장 큰 원)

 

비밀리에 핵기지를 건설하다

쿠바의 하늘을 감시하던 미군 정찰기가 찍은 항공사진이

펜타곤(미 국방부)과 백악관에 전달되자

미국인들은 바로 집앞마당에 자신집을 노리는 핵미사일 기지가 건설됨에 분노했고

군부는 이를 명백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폭격이나 미사일로 쿠바의 발사시설을 날려버리는 방안이 최선'

 

이라 외칩니다

 

또 태평양전쟁때 일본 본토 공습을 주도한 커티스 르메이 장군은

아예 전면적 선제 핵공격으로 쿠바와 소련을 초토화시키자 주장할 정도였는데

 

모든 인류의 생존이 걸린 문제였고

쿠바의 핵미사일 기지 건설은

3차 세계대전까지 일어날 수 있는 문제였기에

결국 케네디 대통령은 고민끝에 소련에 단호한 대응의지를 보여주고

미사일을 철수하라 요구했고

핵전쟁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다가

결국 협상이나 폭격이냐를 두고 소련인들은 미국과의 치킨게임 끝에

GG를 치고 쿠바에 미사일을 설치하지 않겠다는 라디오 방송을 하고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시키며

쿠바 미사일 위기는 끝나게 됩니다

 

쿠바 미사일 사태 풍자 그림

 

미국은 이때 힘에 대한 의지를 보여줬다며

결국 믿을 것은 힘뿐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군사력을 강화시켰고

냉전시대 핵공포증과 군비경쟁은 더 커졌습니다

 

미국 가정들은 각각

핵전쟁의 공포속에 집 마당에

방공호 , 지하 대피소들을 만드는게 유행했고

오늘날에도 미국 영화 , 만화에서 방공호 떡밥은 쉬지않고 나오고 있습니다

 

195~60년대 미국 가정의 방공호

 

(방공호 잠깐들어갔는데 나가보니 핵으로 마을이 멸망해있다거나

핵전쟁이 일어난줄 알고 방공호에서 통조림 까먹으면서 수십년간 살았다거나)

 

이렇게 냉전으로 수많은 자원들이 사용 , 낭비되었고

미 , 소 양국간의 첩보전도 엄청났습니다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

당시 격변하는 냉전시대에 대통령이 된 인물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인데

이 인물은 부유한 명문가에서 태어나

 

'우리 집안에 대통령 하나 쯤은 나와야 한다'

 

는 교육 방침에 따라

집안의 전폭적 지원속에 엘리트 교육을 받고 자라게 되었고

 

존 F. 케네디

 

케네디는 하버드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2차 세계대전때는 해군 대위로 전역하고

1946년 하원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했고

1958년 상원의원 , 1960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을 누르고 승리해 43세의 나이로

미국 최연소 대통령이 됩니다

 

당시 미국 대선에서 최초로 개최된 생방송 텔레비전 토론은

미국 선거운동의 새로운 장을 열어주었고

미디어 정치 , 이미지 정치 시대를 열었습니다

 

케네디는 수려한 젊은 외모 ,  엘리트 코스 등 여러 모습으로

대통령이 되어 대중적 인기가 좋았고

 

미국 여왕 혹은 20세기 가장 우아한 여성이라 불린 퍼스트레이디(영부인) 재클린 케네디와 케네디 대통령

 

그는 대통령이 된 후 곧 소련과의 냉전 , 마찰에 휩싸이는데

쿠바 미사일 철수 , 베를린 장벽 사건 등 여러 문제등에

평화적으로 대처하며 소련과의 직접적인 전투 , 전면전을 막으려 했고

부분적 핵실험 금지조약 , 아폴로 계획 시행 , 흑인 민권운동 인정 등

당대 미국사회에 주요 쟁점분야등에서 여러 평화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 11월 22일 오후 12시 30분쯤

재선을 위해 유세지에서 퍼레이드를 벌이다

저격 총탄에 맞아 숨을 거두었고

갑자기 대통령이 사망하자 미국과 세계사회는 큰 충격에 휩싸입니다

 

암살 직전의 케네디 대통령

 

 

링컨에 이어 또다시 대통령이 저격된 사건이었고

링컨 암살 , 9.11 테러 등

미국 사회에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비극이었습니다

 

살해범이었던 공산주의자 오스월드는 경찰에 체포됬는데

그가 지방감옥으로 호송될때

지하주차장에 숨어있는 사람에 기습공격당해 총을 맞고 살해됬고

케네디 암살은 오늘날까지 여러 음모론이 있고 사건은 미궁속에 묻혔습니다

 

저격범 오스월드와 라이플

 

또 암살당한 링컨과 평행이론 이야기도 있는데

하필 케네디가 타고있던 차가 링컨 컨티넨탈이었다는 점 ,

두 대통령이 민주주의와 흑인을 위한 공헌을 했다는 점 ,

링컨은 1860년 대통령 당선 , 케네디는 1960년 대통령 당선됬다는 점 ,

둘째였다는 점 , 부통령 이름이 존슨이었다는 점 ,

두 사람이 금요일에 총에 맞았다는 점 등등

여러 유사점이 많아 케네디가 링컨의 환생이라던가 평행이론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고

 

또 링컨은 고생고생하며 성장한 초등학교 중퇴 흙수저였고

케네디는 영재교육을 받고자란 하버드 씹금수저 출신인데

우연의 일치이지 뭔 평행이론이냐는 반박도 있습니다

 

하여튼 케네디는 수려한 외모와 젊은 이미지 ,

평화주의적 모습 , 흑인 인권에 기여 , 암살당했다는 점때문에

대중에게 크게 각인되며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미국과 세계인들에게 사랑받는 정치인이 되었고

 

과대평가됬다는 대표적 대통령이라는 말도 있지만

재임 내에도 큰 실책은 없었기에

오늘날에도 미국 대통령에서 인지도가 빠짐없이 오르는 유명한 인물입니다

 

<라봉봉>근데 핵전쟁 공포도 공포였지만

미국은 오늘날도 총기로 죽는 사망자가 엄청나게 많고

총기문제는 참 심각한 미국사회의 문제입니다

 

미국 총기협회와 정부가 긴밀히 엮여있다고 하고

미국 건국도 개인의 총기사용 , 민병대에서 시작됬기에

총기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한 면이 있어

오늘날까지 총기난사 , 사고 등이 일어났고

미국 가보면 알겠지만

항상 길이나 도로에서도 총기공포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개인의 총기 사용을 엄격히 규제하는 다른나라들만 못한 미국사회의 문제로서

현재 시대에는 참 맞지 않는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반응형
Posted by 라봉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