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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한일월드컵 4강신화>

[2002년 한일월드컵 유치전]

[축구 행정가 정몽준]

[거스 히딩크]

[한국의 4강 신화]

[붉은악마]

<라봉봉>

 

[2002년 한일월드컵 유치전]

김대중 정부는 이전 자국산업 육성으로 일본 문화를 금지했던

보수정권과 달리 (이 이야기는 다음이야기때 자세히)

일본과의 우호관계 회복에 집중했고

일단 이로인해 2000년대부터 한일우호관계는 새롭게 생겨났는데

그 결정체 및 절정은 단연

2002년 한일월드컵 공동개최였습니다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2002년 공인구 '피버노바' , 2002년 한국 어린이들의 인싸템 !

 

역대 국제스포츠대회에서 2개의 나라에서 공동개최한 것은

한일월드컵이 최초였으며

원래는 아시아에서 월드컵 개최할만한 국력을 가진 나라는

한국과 일본밖에 없었기에

두 아시아 일진국가인 한일 양국은

월드컵 개최에 자존심을 두고 경쟁했는데

 

(당시 한국도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겠다는 반일감정 및

고도경제성장 등으로 일본 바로 코밑까지 쫓아왔고

일단 아시아 및 세계국가들은 일본의 2차대전 만행+무반성+

20세기 일본상품들의 세계시장 지배등으로

일본을 싫어했기에 한국은 일본보다 더 호감있는 나라로 인식됬고

오늘날에도 한국은 일본 제외 아시아의 유일한 선진국이자

아시아의 맹주 이미지가 있습니다)

 

한일 양국은 마치 요즘말로 자강두천(자존심 강한 두천재의 대결) 급의

역대급 2002년 월드컵 유치 경쟁이 있었고

1990년대 월드컵 유치를 위해 엄청 치열하게 경쟁했는데

 

전통 축구강국이었던 남미는

일단 축구 자존심때문에 브라질 VS 아르헨티나 라이벌구도도 유명하고

이런거때매 브라질이 일본에 붙자 브라질이 싫은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는 한국에 붙고

또 이런 나라들은 서로 싫어하는 남미 나라들끼리 패가 갈려

한 , 일 양국편에 붙어버리자

 

피파는 결국 갈등도 크고 한일이 둘다 고만고만하기도 하고

한쪽만 개최하면 다른한쪽은 엄청난 좌절에 빠질까봐

한일 공동개최를 선언합니다

 

일단 한일양국은 티격태격하며

대회명칭도 한일 월드컵이냐 일한 월드컵이냐두고 엄청 신경전이 있었습니다

 

[축구 행정가 정몽준]

한국은 이전부터 꾸준히 아시아 No.1 축구강국으로서

남미나 유럽수준까진 아니지만 나름 아시아 대회나 월드컵에서 활약을 했던 나라라

특히 신경을 많이 썼고

그렇다고 막 당시 한국에는 유럽에서 뛰는 선수나 세계적 스타선수도 없었고

세계권으로 엄청 잘하는 수준도 아니었고

일본 축구는 더 병맛수준이었기에

 

한일 양국은 일단 개최국으로서 16강만 넘어도 체면치레는 하는 것이라는

마인드로 그냥저냥한 축제로 즐기고 발닦고 자자는 생각이 강했는데

 

기업인 , 정치인이자 한국축구협회의 거물 , 축구 행정가인 현대가의 정몽준은

높은 축구열정으로 특히 이 대회에 공을 많이 들였고

거스 히딩크 감독을 데려오는데 (2000년대 한국 초딩들사이에

은어로 거스는 꼬추를 의미했기에 좀 야한 이름으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2002년의 정몽준

 

세계적 명장 거스 히딩크는 대한민국이라는 듣보잡(당시기준) 나라의 국가대표 감독직 제의를

처음 받았을때

이 변방나라에서 자칫 잘못하면 자기 축구 커리어에 금이 갈수도 있기에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002년 히딩크

 

정몽준과 협상을 하는 자리에서 히딩크는 물었습니다

 

'이번 월드컵에서 어느정도의 성적을 기대하십니까 ?

제가 어느정도 해주면 되겠습니까 ?'

 

히딩크가 예상하는 답은 16강 진출 정도라 생각했는데

정몽준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생각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당연히 우승입니다. 문제 있습니까 ?'

 

히딩크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엄청난 감명과 함께

대한민국에게 월드컵이 얼마나 간절한지를 느꼈고

이 나라는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도전정신이 생겨

대한민국 감독직을 수락했다는 훈훈한 미담 , 전설이있습니다

 

[거스 히딩크]

그렇게 대한민국 대표팀 감독이 된 히딩크는

주변 사람들이 16강만 넘겨도 체면치레하는 것이라 했지만

그는

 

'한국 국민들이 원하는 16강은 나의 바람이 아니다.

내게는 그 이상의 바람이 있다'

 

라며 야망을 드러냈고

곧바로 한국 축구계에 대수술을 시작합니다

 

당시 한국은 꼰대+선배간 서열문화가 강해서

실력보다는 지연 , 학연 , 인맥으로 선수들이 선출됬는데

 

(한국사회 병폐인 이런 지연 , 학연 등은

스포츠계에 더 뿌리가 깊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이 외국인 감독은 그런것은 고려하지 않고

능력중심으로 선수들을 선발했고

그 결과 원래는 국대 탈락 1순위였던 박지성이 대표적으로 국가대표로 뽑힙니다

 

2002년의 박지성

 

한국 축구 황금세대인 2002년 국가대표팀

 

초기 히딩크의 한국국대는 월드컵 시작 전

2001년 프랑스에게 0-5로 참패했기에

한국 언론들에게 '오대영 감독' 이라고 오지게 욕을 먹었는데

그는 0-5로 지고나서도 한 번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축구강국들이랑 계속 붙어서 실전경험을 쌓아야한다 생각한 그였고

이래도 강팀과 계속 붙을 것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당연하다. 그래야 기량이 향상된다'

 

라고 말했고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는 감독의 모습에

한국 선수들도 용기를 냈습니다

 

히딩크는 한국 축구의 문제점으로

공격수는 많으나 수비수 자원이 부족하고

정신력이 나약한 것을 냉철하게 분석했고

 

(히딩크가 떠난후 다시 이런 문제들은 2010년대 부활해서 논란이 됬습니다)

 

오히려 전술 , 기술적 실수보다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선수들을 싫어한 히딩크였기에

히딩크는 선수들에게 강도높은 체력훈련을 시키며

수비력을 강화시키고 장기 합숙훈련으로 선수들의 조직력 , 단결력을 강화시키려 합니다

 

(단 당시에는 해외파 선수들이 없다싶이해

합숙훈련이 가능한 것도 있습니다)

 

2002년 한국 국대 축구선수들은

솔직히 말하면 지금 보면 기술적으로는 되게 투박하고 단순한 성향이 강한데

체력강화훈련을 엄청나게 시켜서

다들 허벅지근육이 유럽 , 남미 선수들보다 더 튼튼한 모습이고 (ㄹㅇ 피지컬에서 안밀림)

2002년 당시는 유럽리그 선수 , 딱히 별다른 기술 , 노하우도 없었던 한국축구였기에

그냥 체력강화만 엄청시키고 개같이 뛰고 뻥축구 하고

두드려 패고 계속 슈팅때려서 골넣자는 마인드였다는

오늘날 분석도 있습니다

 

근데 당시 한국선수 및 국민들은 대부분

유럽과 남미인들이 얼마나 축구를 잘하는지도 잘 감이 안잡혔던 시기이고

한국선수들도 외국선수들과 실전경험이 부족했던 시기라

이런 히딩크의 전략에

한국 선수들은 그를 깊게 신뢰하고 잘 따라주었기에

훈련도 성실히 임했고 (반대로 히딩크가 중국대표팀 맡을때는

온갖 죽을써서 당시 한국선수들도 잘한게 맞고

중국의 축구는 참 미스터리한 부분도 있습니다)

 

2002년 월드컵에서는 결국 이런 히딩크의 전략이 먹혔고

한국 축구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

 

[한국의 4강 신화]

일단 한일 양국은 각각

한국 D조 1위 , 일본 H조 1위라는 성과로

16강에 진출하게 됬고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복수의 국가가 조별리그를 통과한 것은 처음이었고

두 나라 모두 개최국이었기에

아주 기분좋은 성과였고 축제의 장이 벌어졌습니다

 

<포르투갈전 승리후 히딩크 감독>

'우린 이미 목표(16강)를 달성했다.'

'하지만, 난 여전히 배가 고프다'

 

D조 한국-포르투갈 경기에서 골을 넣고 히딩크에게 안기는 박지성 , 옆에 요즘 베트남에서 잘나가는 박항서 코치도 보입니다

 

그러나 일단 16강에서 일본은 터키와 분전하다

0:1로 패해 떨어졌고

 

한국은 이탈리아와 분전끝에

1:0으로 밀리다 88분에 설기현이 골을 넣고

117분에 안정환이 골든골을 터트리며

2:1로 8강에 진출하는 기적을 만들어냈고

수많은 한국인들이 환호합니다

 

당시 큰 화제가 된 안정환 선수의 '(결혼)반지 키스' 세레모니 , 옛날 감성이긴 한데 그는 반지의 제왕이라 불렸고 당시 한국 초딩들은 뽑기에서 안정환 반지를 뽑아 끼고 다녔습니다ㅋㅋㅋ

 

이후 또다른 축구강국 스페인과 한국은 8강에서 맞붙는데

한국은 승부차기 끝에 스페인을 누르고 4강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었고

당시 '거미손' 이라 불린 이운재 골키퍼의 활약과

마지막 국대 주장 홍명보의 승부차기 골 성공 및 팔돌리기 세레모니는 큰 화제가 되었고

온 국민을 감동과 축구 열기로 이끌었습니다

 

거미손 이운재의 선방 및 4강진출 신문기사

 

골을 넣고 승리하는 순간의 홍명보

 

승리에 기뻐하는 한국 국가 대표팀

 

그러나 4강에서 결국

'전차군단' 독일에게 '한국호랑이' 들은

선방했음에도 1:0 이라는 안타까운 차이로 패배해

한국 축구는 4강진출로 끝나게 되었고 (ㅠㅠ)

 

이후 독일은 '삼바축구' 브라질의 슈퍼스타였던

'깻잎머리' 호나우두에게 2골을 먹고 두드려 맞고 결국 2002년 한일월드컵 최종 우승자는

브라질이 됬고

한국은 3/4위전에서 터키에게 2:3으로 패하며 4위로 마감했는데

 

축구 명가 브라질의 자존심을 다시 회복시키며 우승 트로피에 키스하는 호나우두 , 당시엔 이 인물이 메시였습니다

 

월드컵에서 4위는 엄청난 성과이자

특히 동양에서는 말도 안되는 쾌거였고

당시까지만해도 16강만 해도 선방했다는 마인드였는데

계속 한국이 올라가자 온 국민들은 진짜 우승하는거 아니냐는

설레임에 휩싸이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은 홍명보등의 고참들의 안정적인 기량 ,

이영표 등 수비수의 활약 , 박지성의 발굴 등

안정적인 세대교체 및 한국축구 최고 기량이었던

대한민국 축구 리즈시절 및 황금세대였고

온나라가 올림픽 축제로 휩싸였으며

히딩크 및 한국 국가대표 선수들은 이러한 업적을 인정받아서

한국의 국민 영웅이 되었습니다

 

[붉은악마]

당시 국가대표팀과 같이 뛰었던

또한명의 국가대표선수 , 12번째 선수들이 있었는데

바로 '붉은 악마' 라 불리는 한국 응원단이었고

 

붉은악마 엠블렘

 

붉은악마 응원단

 

붉은 티셔츠를 입고 경기장을 붉게 가득 물들인 붉은악마 응원단에

외국선수들은 압도되었고

한국선수들은 그들의 응원에 힘입어 더욱 힘을 내어 뛰었습니다

 

붉은악마 응원단으로 붉게 물든 관중석 , 꿈 ★ 은 이루어진다

 

경기장 밖에서도 광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붉은 티를 입고 온나라가 붉게 물들였고

하나같이 다음과 같은 구호를 외쳤습니다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오 필승 코리아 , 오 필승 코리아 , 오 필승 코리아

오오레오레'

 

사실 이 악마라는 명칭때문에

기독교에서 반발이 컸는데

이 악마는 원래 한국 도깨비 기와인 귀면와에서 유래된 것이며

붉은 도깨비는 어감이 좀이상하니 붉은 악마가 된듯하고

붉은악마의 기면와 도안은 유사역사학과도 섞어버려

동이족의 전쟁의 신이라는 치우천왕이라 퍼졌습니다

 

또 당시 붉은색은 한국인들에게는 공포의 색이었는데

이는 북한 및 공산주의의 상징색이 붉은색이었기에

빨갱이라는 말도 이런것과 연관이 있고

일단 한국사회에서는 붉은색을 꺼리거나 사용하지 않는

'레드 콤플렉스' 가 있었고

이 시기동안 수십만명이 붉은 티를 입고 응원을 하자

붉은악마 응원이후부터는 레드컴플렉스에서 한국인들은 자유로워집니다

 

2002년 시청 앞 광장에 모인 붉은악마들

 

왜 붉은악마일까도 싶은데

일단 한국인들은 가오충도 많기로 유명해서

은근 쎄보이는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고

(혈투가 난무하는 리니지 게임이나 옛날 일진문화도 이런부류)

 

괴테의 파우스트나 데카르트의 악마 같이 옛날 지성인들도

끊임없는 호기심 , 지성의 경지에 탐구하다가

이 악마라는 거대한 악과 대면하다 악마를 물리치고 깨달음을 얻는 그런 모습이 있어

악마는 거대한 악 , 공포 , 인간의 두려움을 나타내기도 하고

 

락커들이나 중2병 걸린애들이 강해보이려 원래 크큭 거리며 악마나 해골그림 옷을 입거나

하는 경향이 있듯이

다른 나라들에게 위압감 , 공포감을 주기 위해

일부로 붉은악마라는 명칭을 사용한거 같기도 합니다

 

하여튼 당시는 ㄹㅇ 별다른 생각없이

그냥 붉은 악마구나 하며 붉은 티입고 모여서

대한민국~ 외치며 응원했던 시기이고

계속 한국이 월드컵에서 승리하자

회사나 학교도 이시간동안은 잠시 쉬고 축구를 보았고

치킨들은 오지게 팔려서 치킨집들은 대호황을 맞게 되었습니다

 

하여튼 이런거 외에도

세계 외신들도 과거 군부정권에 맞서 수십만명이 광장에 나왔던 한국 시민들이

다시 붉은 옷을 입고 수십만이 광장에 나와 응원하는 모습에 놀랬고

길거리에서 응원하다가 청년남녀가 비계획적 , 충동적으로 눈이 맞아서

2003년 출산률이 갑자기 늘어난

'월드컵 베이비 붐' 이 있기도 했고 (;;)

 

성악가 조수미씨의

 

'We are the champion'

 

도 유명했고

당시 붉은악마 구호로

 

'꿈 ★ 은 이루어진다'

 

도 유명했고

붉은악마 , 한국국인들의 열렬한 응원 덕분에 선수들은 용기를 얻었고

한국은 4강신화라는 꿈을 이뤄낼 수 있었습니다

 

<라봉봉>옛날부터 한국인들은 일본인들과 달리

신체 체격이 더 컸고 운동을 잘했고

옛날 한일 경제에서 일본은 경제력이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음에도

이상하게 운동에는 잼병이었고

한국인들은 가난한 나라임에도 운동 , 음악 , 예술쪽은 잘했기에

ㄹㅇ 괜히 동양의 흑인이라 불리는 그런 이미지도 있습니다

(인종편견이긴 한데 흑인들이 예체능 잘하는 이미지가 있음)

 

투지 , 혼신의 힘 , 헝그리 정신 , 악바리 근성 , 어려운 환경에서 이를 악물고 노력하는 것이

한국인들의 미덕이었고

히딩크라는 명감독의 지휘도 있었지만

이러한 한국인들의 승부근성 , 집착 , 간절함으로

한국은 4강신화를 이뤄낼 수 있었습니다

 

신화라 불리는 이유는

당시 한국인들도 믿기 어려울만큼 기적적인 일이었기 때문이고

나름 여러 홈어드밴티지 및 운도 따라줬기에

정말 신화같이 믿기 어려운 일이었고

결국 히딩크 감독이 떠난 후 다시 한국 국대는 본실력으로 리셋되기도 합니다 ;;

 

그러나 4강신화가 만든 한국사회에 축구에 대한 인식은 엄청나게 컸고

이것을 보며 축구선수의 꿈을 키운 수많은 한국 어린이들이

현재는 유럽 리그에서 뛰고 있고

현재 동아시아의 확고한 축구강국임을 알 수 있습니다

 

히딩크 당시에도 한국의 학연 , 지연 병폐가 컸고

여러 문제들도 일어났는데 이것을 고쳐야 한국이 4강 신화가 아닌

4강 역사가 다시 재현된다 생각하고 있고

 

또 히딩크 감독도 이후 떠나게 됬고

히딩크가 떠나자 곧 한국 국가대표팀은 리셋 , 실력이 증발됬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근데 히딩크 이전에 한국 축구선수 레전드인 차범근 감독의 프랑스월드컵 지휘도

엄청 공격적인 축구로 꿀잼이었다고 하는데

당시 차범근호는 멕시코 , 네덜란드 , 벨기에라는 축구 강호들과 붙게 됬는데

당시 한국인 , 언론들은 이 나라들이 얼마나 축구를 잘하는지도 몰랐고

국뽕에 취해서 그저 잘하겠지 낙관하다가

네덜란드에 진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며 대회도중 차범근 감독을 경질 , 음해하는

쪽팔리는 짓을 하기도 했고 (자국 레전드 대우 ㅆㅎㅌㅊ)

 

또 4강신화 이후 한국인들의 국가대표 기대치는 잠깐 비정상적으로 높아진 시기가 있었는데

이런 것들로 인해 한국 축구 국가대표 감독은 못하면 곧바로 질타당해서

'독이 든 성배' 라는 표현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이는 비단 한국 축구뿐만 아니라 한국정치계도 비슷한 양상이고

너무 쪼거나 하지좀 말고 좀 지켜보는 것도 필요하다 생각하며

개인적으로 히딩크 감독도 참 유능했지만

일단 선수시절 레전드를 찍었던

차범근과 신태용 감독이 더 오래했다면

레전드급 국대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까도 싶은데

이들이 너무 짧게 감독을 한게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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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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