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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원왕 , 소수림왕 , 고국양왕 , 광개토대왕 , 장수왕 , 문자왕>

[고국원왕대 연나라의 침공]

[고국원왕을 죽인 근초고왕]

[명군 소수림왕]

[힘을 키운 고국양왕]

[광개토대왕]

[백제 공략]

[요동수복]

[신라 구원]

[연나라 공격]

[광개토대왕릉비]

[장수왕의 평양천도]

[남진정책과 한강유역 확보]

[문자왕의 부여합병]

<라봉봉>

 

[고국원왕대 연나라의 침공]

미천왕이 사망하자

그의 태자 고사유가 왕위를 이어

고구려 16대왕 고국원왕이 됩니다

 

사극 '근초고왕' 속 고국원왕

 

고국원왕은 평양성을 넓혔고

중국과 우호적 교류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연나라 왕 모용황은

직접 4만강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고

고국원왕은 필사적으로 막았지만

고구려 군은 대패하고

수도 환도성(국내성의 산성)이 함락당했습니다

 

고국원왕 당시 동아시아 세력판도

 

고국원왕은 급하게 도주했으나

연나라 장수는 고국원왕의 어머니 주씨 태후와 왕비를 인질로 잡았습니다

 

연나라군은 고구려땅에서 오래 있을수는 없다 생각하고

고국원왕의 아버지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시체를 싣고 고구려 대궐 보물을 약탈하고 불태우고

고구려 남녀 5만명을 사로잡고 환도성을 헐어버리고 돌아갔습니다

 

(고구려가 본격적으로 중국과 거대규모로 대전을 치루는 시기)

 

이에 고국원왕은 동생을 연나라로 보내

자신을 신하로 칭하고 보물을 바쳤고

계속되는 고구려의 요청에 결국

연나라는 미천왕의 시체와 주씨 태후를 돌려보냈습니다

 

[고국원왕을 죽인 근초고왕]

안습의 고국원왕은 연나라의 힘이 너무 강하다는 것을 알고

서쪽공략을 포기하고

남쪽의 백제를 공격했으나

당시 백제는 하필 백제 최전성기 왕인 근초고왕이 있었던 시기이기에

치양전투에서 패배했습니다

 

이후 백제 근초고왕이 군사 3만명을 거느리고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합니다

 

고국원왕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을 방어하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합니다

 

백제군 활에 맞아 전사한 고국원왕

 

<백제군>우리가 고구려왕을 죽였다 !!

 

백제 최전성기 정복군주 근초고왕의 이야기를 다룬 사극 'KBS 1TV 대하드라마 근초고왕 (2010)'

 

고국원왕 시기 연나라의 공격 , 백제의 공격으로

고구려는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고

고국원왕까지 백제군에게 전사해버리는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고구려 다음 왕은

고구려 내실을 안정시킨 소수림왕이었습니다

 

[명군 소수림왕]

고국원왕의 태자

고구부는 급하게 왕위를 이어 고구려 17대 임금 소수림왕이 되었습니다

 

소수림왕

 

소수림왕은 중국 진나라에서

불상과 경문을 받아

고구려에 불교를 공인시켰고

 

고구려 불상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

 

학교인 '태학'을 세워 자제들을 교육시킵니다

 

태학

 

또한 소수림왕은 '율령(법령)' 을 반포해

고구려의 법을 만들었습니다

 

이후에도 소수림왕은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백제를 계속해서 쳤고

고구려인들은 계속해서 백제를 벼르고 있었습니다

 

[힘을 키운 고국양왕]

소수림왕이 아들없이 승하하자

소수림왕의 동생 고이련이

왕위를 이어 고구려 18대왕 고국양왕이 되었습니다

 

고국양왕은 곧 요동을 습격해 점령했으나

연나라군은 요동을 탈환했고

 

이후 고국양왕은 왕자 고담덕(광개토대왕)을 태자로 삼았습니다

담덕은 태어나면서부터 체격이 크고 생각이 대범했기에

많은 이들의 기대를 받은 태자였습니다

 

<고국양왕>담덕아 명심하거라 ,

네가 선조들의 땅을 되찾고

백제군에 억울하게 돌아가신 선왕의 수모를 씻어내야 하느니라

 

<담덕>예 , 아바마마

 

고구려는 당시 강성하게 힘을 키우고 있었고

이에 신라는 신라 왕의 조카 실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습니다

 

[광개토대왕]

고국원왕이 승하하자

태자 담덕이 왕위를 이어

고구려 19대왕 광개토대왕이 되었고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조선 세종대왕과 더불어

한국사에서 대왕이라 불리는 유일한 임금 , 고구려의 태왕입니다

 

광개토대왕

 

그는 고구려와 한국사 최전성기를 이끈 임금이었고

정복군주 광개토대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말을 타고 고구려군사들을 이끌고

사방을 정복했습니다

 

광개토대왕은 북쪽으로 거란을 공격해

거란에 있던 고구려 백성 1만명을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백제 공략]

북방이 안정되자

말발굽을 남으로 돌려

이전 백제 근초고왕에게 죽은

할아버지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으려 했습니다

 

광개토대왕은 절벽과 바다로 감싸여 있던

백제의 천혜의 요새였던 관미성을 공격했는데

 

백제 최고 요충지 '관미성'

 

광개토대왕은 일곱 방면으로 군사를 나눠

20일만에 관미성을 점령합니다

 

이후 백제는 고구려에 응전했지만

광개토대왕군에게 무참하게 패배했고

 

계속해서 백제군이 고구려에 집적대자

결국 광개토대왕은 응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직접 백제로 들어갔고

백제의 58개성과 700마을을 함락시킵니다

 

그럼에도 백제 아신왕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자

결국 광개토대왕은 아리수 , 한강을 건너

백제 수도 한성을 압박했고

곤란해진 아신왕은 광개토대왕에게 항복하고

남녀 1천명과 옷감 1천필을 바치며 항복했습니다

 

<아신왕>앞으로 영원히 고구려의 노객(노비)이 되겠습니다

 

광개토대왕은 백제 왕의 동생과

대신 10명을 데리고 수도 국내성으로 개선했습니다

 

<고구려인들>고구려 만세 !

태왕폐하 만세 !

 

[요동수복]

백제가 항복하자

이번에는 광개토대왕은 연나라를 쳐서

광개토대왕은 요동을 수복(되찾음)합니다

 

요동지방

 

요동을 수복하자 그곳의 소금과 막대한 철 생산지가 고구려의 영역에 들어가게 됬고

광개토대왕은 요동을 중심으로 철광업을 발달시켜

고구려는 강력한 철제무기를 가진 '철의 나라' 가 됩니다

 

철갑옷으로 무장한 고구려군

 

고구려 철갑기병 '개마무사'

 

이번엔 광개토대왕은

동쪽으로 눈을 돌려

동북방의 숙신족(말갈족) 을 복속시켰고

숙신족은 고구려에 복속됩니다

이로인해 고구려는 풍부한 말 생산지를 얻게 되었습니다

 

말생산지인 동북면

 

[신라 구원]

한편 백제는 매우 강성한 고구려를 이길수 없음을 알고

만만하고 약한 신라를 공격하기로 결정했고

부하로 두고 있던 왜인(일본인) , 가야인들을 데리고

신라를 두드려 팹니다

 

신라는 사신을 보내 광개토대왕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광개토대왕은

5만 대군을 편성해 신라에 보냈고

왜 , 가야군을 도륙하고

신라를 보호국으로 만듭니다

 

신라 무덤에서 발견된 광개토대왕의 이름이 새겨진 '호우명 그릇' , 신라가 고구려 속국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연나라 공격]

한편 북 , 서방의 연나라는

고구려가 남쪽의 신라를 돕는 틈을 타서

다시금 고구려를 공격했고

남쪽의 왜군을 몰아낸 광개토대왕은

다시금 말발굽을 북쪽으로 돌려 반격을 시작합니다

 

광개토대왕은 요하를 건너서 숙군성으로 진격했고

이러한 고구려의 공격에 연나라는

내부반란이 일어나 황제가 살해당했고

연나라는 고구려 유민출신 인물이 황제가 되었고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연나라 황제와

같은 피로서의 우의를 나누었습니다

 

요하를 건너 숙군성으로 진격하는 광개토대왕과 고구려군 , 대한민국 우표

 

이후 광개토대왕은 동부여가 고구려에서 벗어나려하자

직접 동부여를 토벌해 동부여 수도를 함락시켰고

동부여는 완전히 힘을 잃어버려 서서히 고구려에 합병됩니다

 

광개토대왕의 영토확장

 

[광개토대왕릉비]

동서남북으로 영토를 넓히고 고조선 고토를 수복한 광개토대왕이었고

사방의 나쁜 무리들이 쓸어 없어지자

백성들은 각기 생업에 힘써 편안히 살게 되었고

나라는 부강해지고 백성들은 풍요로워지고

농사는 풍년이 들었습니다

 

광개토대왕 시기 안정된 백성들의 삶 , 출처 : KBS 한국사기

 

그러나 하늘께서 고구려 백성들을 어여삐(사랑스럽게) 여기지 아니하셔서

광개토대왕은 고작 39세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 장수왕은 광개토대왕릉비를 세웠고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고구려 건국신화와

광개토대왕의 업적이 적혀 있습니다

 

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대왕 시기는 중국도 한국 눈치를 보던

한국사 최강시기였고

광개토대왕은 중국 중심의 천하관에 맞서

천하는 중국중심 , 중국 유일로만 움직이는 게 아닌

각국은 각기의 천하가 있다는 한국식 천하관을 만들어

 

자신의 연호를 '영락' 이라 했고

광개토대왕은 백제 , 신라 , 동부여같은 국가는 고구려 천하의 일부로 취급했고

중국 , 왜 같은 이민족 세력은 분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한국식 천하관 및 삼국통일 의식과 한민족통합의식의 시초를 보여주었습니다

 

[장수왕의 평양천도]

광개토대왕이 사망하자

그의 맏아들 태자 고거련이 왕위를이어

고구려 20대왕 장수왕이 되었고

그는 이름같이 매우 장수한 왕이었습니다 (오래산다는 '장수' 와 한자가 같음)

 

장수왕

 

호랑이 아비에서 호랑이 자식이 나오듯이

장수왕 역시 뛰어난 임금이었고

 

장수왕은 아버지가 사방으로 크게 넓혀둔 영토를 관리하기 위해

정복보다는 중국과 우호를 맺으며

내정과 안정에 치중했습니다

 

장수왕은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겼고

산지가 많고 척박했던 국내성보다는

평야가 있고 풍요로운 평양성으로 옮겨

내실을 안정시키고 국내성의 귀족들을 견제하려 했습니다

 

장수왕의 평양천도와 남진정책

 

그러나 이로인해 고구려는 점차

유목민의 습속보다는 농경민의 습속이 강해져서

내부적으로도 유목귀족과 농경귀족들이 맞서는 등

여러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고

 

[남진정책과 한강유역 확보]

하여튼 장수왕은 고구려는 남쪽의 평양으로 수도를 옮겨

중국과는 우호관계를 맺으나 남쪽의 한국지역에 진출하는

'남진정책' 을 시작합니다

 

광개토대왕 이후부터 고구려군은 신라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광개토대왕의 도움을 받고 살아났던 신라인들은

점차 고구려의 간섭에 불만을 제기하고 있었고

 

장수왕 시기부터

신라인들이 고구려 군인들을 학살해버리고 고구려에게 독립해버렸고

또 신라는 고구려에 홀로 맞설수는 없었기에

백제와 동맹 , 나제동맹을 맺고 장수왕의 남진에 맞섭니다

 

고구려에게 계속 밀리던 백제 역시

중국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침략을 해달라 요청한 사실이

고구려에 알려지게 되자

장수왕은 백제를 멸망시키기로 결정합니다

 

장수왕은 첩자 , 간첩으로 승려 도림을 개로왕에게 보냈는데

개로왕은 평소 바둑을 좋아했는데

도림은 바둑을 매우 잘하는 스님이었고

개로왕 앞에서 뛰어난 바둑실력으로 개로왕과 친해집니다

 

개로왕의 환심을 산 도림은 개로왕과 붙어다니며 바둑을 두며

개로왕에게 궁궐공사를 해야 왕의 위엄이 산다고 제안했고

그 말을 들은 개로왕은 화려한 궁궐을 지으며 국고를 탕진합니다

 

고구려 첩자 도림과 개로왕의 바둑

 

백제 의자왕이 일본 천황에게 선물한 바둑판 '목화자단기국'

 

무리한 궁궐공사로 백제의 국고가 탕진되고 힘이약해지자

장수왕은 3만 군대로 백제를 침공해 백제 수도 위례성 , 한성을 함락시켰고

개로왕은 탈출하다가 고구려군에 사로잡혔고

아차성 밑으로 끌려가 참수당합니다

 

고구려군의 한강공격 당시

백제 왕자 부여문주는

나제동맹에 따라 신라에 병사를 요청해

신라 구원병 1만을 데리고 돌아왔지만

이미 아버지 개로왕은 살해당했고

백제수도와 한강유역은 모두 고구려군에 함락되어있었고

백제 귀족들 역시 백제왕을 싫어한 최악의 상황이었기에

 

할 수 없이 부여문주는 남하해

충청도의 웅진으로 수도를 옮기고 고구려에 대항합니다

 

백제를 멸망까지 몰고간 장수왕은

이번엔 신라를 침공해 신라 북방 성들을 점령했고

이로 인해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와 적대하게 됩니다

 

장수왕의 남진정책을 상징하는 충주 고구려비(중원 고구려비)

 

장수왕은 남진정책 이외에도

외교와 안정정책을 실시해

78년간 재위하며 고구려를 평안하게한

고구려의 뛰어난 명군이었습니다

 

[문자왕의 부여합병]

장수왕은 97세까지 살았고

그가 너무 오랫동안 재위하며 너무 오래살자

그의 아들 고조다는 아버지보다 일찍 죽어버렸고

 

이에 아버지보다 명이 짧아 왕위를 못이을만큼 한심하다는 말인

'쪼다' 의 어원이 됬다는 말도 있습니다

 

하여튼 조다가 일찍 죽자

장수왕은 손자이자 조다의 아들이었던 고나운을 궁중에서 길러

태손(태자 역활의 손자)으로 삼았고

 

장수왕이 재위 79년만에 사망하자

고나운이 뒤를 이어

고구려 21대왕 문자왕이 됩니다

 

문자왕 시기부터는

남쪽의 백제와 신라가 다시 힘을 기르고 있었고

고구려는 옛날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었기에

문자왕은 광개토대왕-장수왕-문자왕으로 이어지는

고구려 최전성기의 마지막 왕이었고

 

이미 이전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힘이 빠진 동쪽의 부여는

결국 고구려에 항복함으로서

오랜 역사를 끝내고 고구려에 완전히 합병됩니다

 

부여 합병으로 인해 고구려는 최대 영토를 획득했기에

어떤 이는 장수왕이 아닌 문자왕이 고구려 최전성기 임금이라고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문자왕 당시 고구려 최대영토

 

문자왕 시기 남쪽의 신라에서는

지증왕이라는 현명하고 위대한 임금이 등장했고

백제에서는 무령왕이라는 중흥군주가 등장했기에

 

이 시기동안은 고구려 , 백제 , 신라는 전쟁보다

내실과 안정에 집중합니다

(삼국 모두 잘나갔던 시기)

 

<라봉봉>여러 왕들을 한꺼번에 쓰긴 했는데

고구려 최전성기 시절의 왕들이었고

 

일단 고국원왕은 워낙 주변세력들이 강해서

비운의 왕이 됬지만 당시에도 고구려는 강성했던 시기입니다

 

소수림왕은 고구려 내실과 기틀을 다진 고구려의 명군으로

불교 수용 , 율령반포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고국양왕은 소수림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를 안정시켰고

 

고국양왕의 태자 담덕은 한국사 최고의 명군 , 대왕이라 불리는

'광개토대왕' 으로서 그는 요동을 수복하고 고구려를 부강하게 한 인물이었고

한국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있는 대왕입니다

 

장수왕 역시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어

안정적인 치세를 이루며 고구려 최전성기를 이끌었고

남진정책으로 한강유역을 확보해

풍요로운 곡창지대 , 요충지를 얻어냅니다

 

마지막으로 문자왕은

참 이름이 예쁘다고 생각되는데

마지막 고구려 최전성기의 임금이었고

당시 한국 삼국 고구려 , 백제 , 신라는 모처럼만에

전쟁을 중단하고 잠깐동안의 평화가 있었던 태평성대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후부터 점차 남쪽의 신라가 매우 강성하게 일어나

한강유역을 확보하고 이로인해 신라는 중국과 직접교류함으로서

동아시아의 운명이 바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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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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