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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장왕 , 안원왕 , 양원왕 , 평원왕>

[안장왕과 한씨미녀]

[안원왕 시기 귀족들의 다툼]

[양원왕대의 신라의 북진]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평원왕 시기 중국의 통일]

<라봉봉>

 

[안장왕과 한씨미녀]

문자왕이 승하하자

태자였던 고흥안이 왕위를 이어

고구려 22대왕 안장왕이 되었습니다

 

안장왕 , 흥안태자는 태자시절 상인 복장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이었던

개백현 , 오늘날 고양시로 염탐을 갔는데

 

그곳의 한씨의 딸

한주라는 여인은 절세미인이었는데

 

흥안태자는 백제 정찰관의 눈을 피하려

한씨의 집에 도망쳐 숨어있다가

한주를 보고 반해서

정을 통하고 부부가 되기로 약속합니다

 

안장왕과 한씨미녀의 사랑 , 고양시 전설

 

흥안태자는 고구려로 돌아가면서 한주에게

 

<흥안태자>나는 고구려의 태자이니

귀국하면 대군을 거느리고 와서 이 땅을 고구려 땅으로 만들고

그대를 아내로 맞이할 것이다

 

라고 말하고 돌아가고

한편 개백태수는 한주가 미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녀를 첩으로 맞이하려 했으나

한주는 마음에 든 남자가 있다며

죽기를 결심하고 거절합니다

 

<한주>나는 이미 정을 준 남자가 있는데

멀리 가서 돌아오지 못하였으니

그 남자의 생사나 안 뒤에 결혼 여부를 말하겠습니다

 

이에 개백태수는 노해서

 

<개백태수>그 남자가 누구냐 ?

어찌하여 바로 말하지 못하느냐 ?

고구려의 첩자라 말을 못하는 것이냐 ?

적국의 첩자와 정을 통하였으니 너는 죽어도 죄가 남겠다

 

하고 옥에 한주를 가두었고 한편으로는

달콤한 말로 한주를 꾀었습니다

 

옥중의 한주는 노래를 지어 불렀습니다

 

<한주>이몸이 죽어죽어

일백번 다시죽어

백골이 진토되고

넋이야 있건없건

임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

 

이에 보는 이들이 모두 눈물흘렸습니다

 

춘향전속 옥에 갇힌 춘향이 , 한씨미녀는 춘향전의 모티브가 되었습니다

 

개백태수는 결국 한주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알고

한주를 죽이려 했습니다

 

한편 고구려에서는 문자왕이 죽어 흥안태자는

왕위에 올라 안장왕이 되었고

 

안장왕은 하루빨리 한주를 구하기위해

군사와 장수를 모집했습니다

 

<안장왕>만일 개백현을 회복하고

한주를 구원하는 자가 있으면

천금과 만호후의 상을 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백제는 강성했고

개백현은 위험한 지역이었기에

아무도 하는 자가 없었고

 

이에 안장왕의 여동생 안학을 사랑했던 장군 을밀은

신분의 차이로 괴로워하다

벼슬을 버리고 집에 있었는데

이 소문을 듣고

안장왕에게 가서

 

<을밀>천금과 만호후의 상이 다 신의 소원이 아니라

신의 소원은 안학과 결혼하는 것 뿐이옵니다

신이 안학을 사랑함이

대왕께서 한주를 사랑하심과 마찬가지입니다

 

대왕께서 만약 신의 소원대로 안학과 결혼케 하신다면

신은 대왕의 소원대로 한주를 구해오겠습니다

 

이에 안장왕은 을밀의 청을 허락했고

을밀은 결사대를 뽑아 변장시켜 개백현으로 들여보냅니다

 

개백태수는 그 사실을 알지못하고

생일잔치를 열고있었고

친구들과 잔치를 열며 옥중의 한주에게 사람을 보내서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죽인다고 협박했지만

한주는 듣지 않았습니다

 

이때 변장해있던 을밀의 결사대들이 칼을뽑아

생일 손님들을 살상하고

고구려 군사들이 온다 외치자

성안은 어지러워졌고

 

이에 을밀은 군사를 몰아 성을 넘어가

감옥을 부셔서 한주를 구해내고

한강일대의 성읍을 쳐서 항복을 받았습니다

 

이에 안장왕은 다시 개백현에 이르러

한주를 만나서 장가를 들었고

여동생 안학은 을밀에게 시집보냈습니다

 

안장왕과 한주의 재회

 

정몽주의 단심가나 춘향전과 상당히 비슷한 구조를 띈 이야기인데

실제 이 두 이야기의 원조인 이야기가

'안장왕과 한씨미녀의 사랑이야기' 라고 합니다

 

안장왕은 아버지 문자왕의 뒤를 이어

훌륭한 정치를 하였고

고구려는 안장왕때까지 평안의 시대였습니다

 

(사실 고구려는 워낙 풍요롭고 강한나라였는데

멸망원인이 내부적 혼란보다는

중국에서 거대통일제국 수나라와 당나라가 등장해

오랜 전쟁으로 고구려는 이 둘을 상대하며

국력이 약화되어 혼란을 겪다 멸망한 것도 있습니다)

 

[안원왕 시기 귀족들의 다툼]

안장왕이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자

안장왕의 동생 고보연이 왕위를 이어

고구려 23대왕 안원왕이 되었고

 

안원왕은 도량이 커서 형 안장왕이 사랑했던 인물이고

이외에는 별다른 기록은 없지만

큰 혼란도 없이 조용한 편이었습니다

 

단지 이 시기부터 고구려 신진 , 구 귀족들간의

내부다툼이 시작됬다고도 합니다

 

단장하고 서커스를 구경중인 고구려 귀족들 , 수산리 고분벽화

 

[양원왕대의 신라의 북진]

안원왕이 승하하자

안원왕의 맏아들 고평성이 왕위를 이어

고구려 24대왕 양원왕이 되었고

 

이 시기부터는 백제뿐만 아니라

한창 강성해진 신라가 북진해 고구려 영토들을 점령합니다

 

또한 한창 고구려 초기수도였던 국내성의 구 귀족 , 유목세력들은

현 수도인 평양성 귀족 , 농경세력들에 대항했고

환도성(국내성) 의 간주리가 반역하다가

처형됬습니다

 

고구려 영역과 수도 평양성(남부) 과 국내성(북부) 귀족들의 대립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양원왕이 승하하자

양원왕의 맏아들

고양성이 왕위를 이어

고구려 25대왕 평원왕(평강왕)이 되었고

 

평원왕은 바보온달과 평강공주의 이야기에서

평강공주의 아버지인 인물로 유명합니다

 

평원왕 시대에는

온달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온달은 얼굴이 못생겨 남의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마음씨는 밝았습니다

 

집도 매우 가난해서

항상 밥을 빌어다가 눈 먼 늙은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떨어진 옷을 입고 해어진 신을 신고

저자거리를 돌아다녔기에

사람들은 그를 '바보온달' 이라 불렀습니다

 

평원왕에게는 어린 딸 , 평강공주가 있었는데

매일같이 울어댔기에

평원왕은 일부로 평강공주를 놀리면서

 

<평원왕>네가 항상 울어서 내귀를 시끄럽게 하는데 ,

너는 사대부의 아내는 못되고

바보온달에게나 시집가야겠구나 ㅋ

 

그런데 그럴때마다 평강공주는 이상하게

울음을 뚝 그쳤고

이에 평강공주가 울때마다

평원왕은 늘 그렇게 말했습니다

 

사극 '칼과 꽃'의 고구려 공주

 

평강공주가

16세 , 성년의 나이가 되자

평원왕은 사대부의 자제에게 평강공주를 시집보내려 했는데

평강공주가 말했습니다

 

<평강공주>대왕께서는 항상

 

'너는 반드시 온달의 아내가 된다'

 

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무슨 까닭으로 전의 말씀을 고치나이까 ?

 

평범한 남자도 허튼소리를 하지 않으려 하는데

지존(임금) 께서야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임금의 말은 헛된 말이 없다고 하는데

지금 대왕의 명령은 잘못된 것이니

소녀는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이에 평원왕은 분노해서

 

<평원왕>네가 나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정말 내 딸이 될 수 없으니

어찌 함께 있을 수 있겠느냐 ?

그냥 니가 가고싶은데로 가라 !

 

이에 평강공주는 왕궁에서

보물 팔찌 수십개를 팔꿈치에 매고서는

궁궐을 나와서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온달의 집에 이르렀습니다

 

온달의 집에는 눈먼 늙은 할머니가 있었고

이에 평강공주는 앞에 가서 절하고

아들이 어딨냐 물었습니다

 

<온달의 어머니>우리 아들은 가난하고 추하여

귀인이 가까이 할 인물이 못됩니다

 

내 눈은 안보이지만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으니

향기가 이상하고

손을 만지니 부드럽기가 풀솜과 같으니

 

반드시 천하의 귀인인데

누구의 속임수로 이곳에 오게되었소 ?

 

내 자식은 굶주림을 참지 못해

산으로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간지 오래입니다

 

이에 평강공주는 산으로 가서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는 온달을 보았고

온달에게 자기의 뜻을 말했습니다

 

이에 놀란 온달은

 

<온달>이는 어린 여자가 행동할 바가 아니다

분명코 사람이 아니라 여우나 귀신일 것이니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 !

 

하고 돌아보지도 않고 도망쳤습니다

 

이에 다시 평강공주는 온달의 집에가서

문 앞에서 자고 다음날 온달과 그의 어머니에게

상세한 이야기를 말했는데

온달은 우물쭈물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했고

이에 온달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온달 어머니>내 자식은 지극히 누추하여

귀인의 배필이 될 수 없고

내 집은 지극히 가난하여

귀인의 거처할 곳이 못되오

 

이에 평강공주는

 

<평강공주>옛 사람 말에

한말 곡식도 방아 찧을 수 있고

한 자 베도 꿰맬 수 있다 합니다

 

진실로 마음만 맞는다면

어찌 반드시 부귀한 후에야 함께 지낼 수 있겠습니까 ?

 

이에 평강공주는 온달과 부부의 연을 맺었고

자신이 왕궁에서 가져온 금팔찌를 팔아서

살림살이를 갖추어 갔습니다

 

평강공주는 온달에게 시장에서

말을 사오되 병들고 약해서 내다파는 것을 사오라했고

 

온달이 그말대로 하자

평강공주는 매우 부지런히 말을 먹여서

말을 살찌우고 건강하게 했습니다

 

이에 평강공주는 온달에게 말타는법 , 사냥하는 법 ,

학문을 교육시켰고

이에 이전의 바보온달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온달을 공부시키는 평강공주

 

고구려에서는 한창 봄인 3월 3일에

낙랑언덕에서 사냥대회를 열었는데

 

평원왕은 그날 신하들과 병사들을 데리고

사냥대회에 참여했고

 

온달 역시 기른 말을 타고 대회에 나섰는데

달리는 품이 언제난 남들보다 앞서고

잡은 짐승도 많아

온달을 따를 사람이 없었습니다

 

무용총 사냥도의 당당한 고구려 남아

 

이에 평원왕이 그를 불렀는데

그가 자신의 딸과 결혼한 온달임을 알고

놀라고 또 기특하게 여겼습니다

 

이후 중국군이 요동에 쳐들어오자

온달은 선봉장이 되어

날쌔게 싸워서 수십명을 베었고

이에 고구려군사들은 승세를 타고 분발해서

크게 이겼습니다

 

공을 논할때 모두가 온달을 제일로 삼았고

평원왕은 온달을 가상히 여겨 칭찬하면서

 

<평원왕>이 사람이 나의 사위다 !

 

하고 정식으로 사위로 인정하고

온달을 대형 벼슬에 삼았습니다

 

온달의 위엄과 권세는 날로 커졌고

이후 영양왕이 즉위하자

온달은 고구려 남쪽땅을 빼앗은 신라에 맞서

남쪽 고구려 땅을 되찾아오겠다 말했고

영양왕은 이를 허락합니다

 

떠나는 온달은 이렇게 맹세했습니다

 

<온달>계립현과 죽령 이서의 땅을 되찾지 못하면

나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

 

마침내 온달은 신라군과 맞서 싸웠지만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넘어져 죽었고

온달의 장례를 치루려

그의 관을 들어 돌아가려 했는데

관이 움직이지가 않았습니다

 

이에 평강공주가 찾아와 관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평강공주>죽고 사는 것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아아 돌아갑시다 !

 

라고 하였고

이에 관이 움직였습니다

 

영양왕과 고구려인들이 온달의 죽음에 몹시 슬퍼했습니다

 

아차산 입구의 온달장군과 평강공주 동상

 

[평원왕 시기 중국의 통일]

이외에도

평강공주의 아버지 평원왕 시대에는

중국이 오랜 분열을 끝내고

새롭게 들어선 왕조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해버리자

평원왕은 크게 두려워하며

수나라와의 전쟁을 준비했고

수나라의 석궁기술자들을 돈을 주고 데려와서

무기를 만들고 전쟁을 준비합니다

 

당시 수나라 황제인 문제는 고구려에게 사신을 보내

복종을 권유했고

수문제의 조서에

고구려인들은 분개했지만

평원왕은 일단은 참고 참아야한다 생각했습니다

 

<라봉봉>참 고구려 왕조 700년 역사는

희노애락이 뚜렷한데

건국초기가 희 ,

전성기가 노의 시기였다면

이 시기는 한씨미녀 , 평강공주 설화가 있는

애의 시기였다 생각됩니다

 

한씨미녀 이야기는 춘향전의 실제 모티브였다고 하고

이외에도 한국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랑이야기중 하나인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 등

여러 이야기속 고구려인들의 사랑은 그들답게 진취적이고 당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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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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