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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왕 , 영류왕 , 보장왕 , 고구려 부흥운동>

[영양왕과 수문제]

[수양제의 고구려 침공]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수나라의 멸망]

[영류왕과 당나라의 등장]

[연개소문]

[당태종 이세민의 고구려 침공]

[안시성 전투]

[나당연합군과 고구려의 멸망]

[고구려 부흥운동]

<라봉봉>

 

[영양왕과 수문제]

평원왕이 승하하자 평원왕의 맏아들

고원이 왕위를 이어

고구려 26대왕 영양왕이 됩니다

 

영양왕

 

이전 평원왕 시대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했고

고구려인들은 한나라 이후 모처럼만의 중국의 거대 통일제국의 등장에

크게 두려워하고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영양왕은 말갈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공격해 선빵을 쳤는데

 

영양왕의 요서공격

 

수문제는 대노해서

수군과 육군 30만으로 고구려를 침공합니다

 

수문제

 

그러나 군량미의 수송이 원활하지 못하고

전염병이 돌아

수나라군은 결국 8~90% 병사를 잃고 퇴각합니다

 

그러나 영양왕도 두려워해서

사신을 보내서 사죄했습니다

 

<영양왕이 수문제에게 보낸 글>

요동 더러운 땅의 신하 아무개가

사죄합니다

 

수문제 역시 무리할 수 없다 생각해

고구려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고구려 사신을 후하게 대접해 보냈습니다

 

영양왕은 이에

남쪽의 백제와 신라를 침략합니다

 

[수양제의 고구려 침공]

수문제 이후 수양제가 즉위했는데

수문제가 이성적이고 현명한 임금이었던 것에 비해서

수양제는 감성적이고 과시하기 좋아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수양제

 

수양제는 돌궐족이 있는 곳에 행차했는데

돌궐에 간 고구려 사신과 마주쳤고

수양제는 고구려 사신에게 수나라 조정에 입조하라는 말도안되는 명을 내렸고

영양왕은 이에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할 것을 걱정합니다

 

사마르칸트 벽화속 고구려 사신(오른쪽 두명)

 

결국 수양제는

113만이라는 말도 안되는 수의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합니다

 

고수전쟁

 

먼저 양제는 요동을 점령하려 했지만 실패하자

우중문 , 우문술에게 육군 30만을 맡겨

30만 별동대를 평양에 보냈는데

 

요동성 전투 , 함락되지 않는 요동성

 

별동대는 다른 성들을 재껴두고

급하게 고구려 수도 평양성으로 직진해야 했는데

병사 1인당 지고 가야할 군장의 무게가

50kg 가 됬는데

최단기간내에 평양성에 도착해야 했기에

지친 수나라 군사들은 보급품과 식량들을 길가에 버립니다

 

<우문술>도중에 곡식을 버리는 자는 참수할 것이다 !

 

그러나 수나라군은 모두 구덩이를 파고 식량을 묻어버렸고

이에 이들이 중간쯤 행군할때 군량이 거의 떨어집니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한편 영양왕은 수나라 군의 정세를 엿보기 위해

을지문덕을 수나라 군영에 보내서 거짓 항복하게 합니다

 

한국사의 위인 을지문덕 장군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영에 가서

지치고 굶주린 수나라 군사들의 상태를 보았습니다

 

이전 우문술과 우중문은 수양제의 밀지로

고구려왕이나 을지문덕이 찾아오거든 잡아두라 했는데

태연한 을지문덕의 연기에

그만 을지문덕을 되돌아가게합니다

 

그러나 우문술은 아차 싶어서

사람을 보내서 압록강을 건너는 을지문덕에게 말했습니다

 

<수나라군>더 의논하고 싶은 일이 있으니

다시 돌아오십시오 !

 

그러나 을지문덕은 돌아보지 않고

압록강을 건너 평양에 돌아옵니다

 

을지문덕을 놓친

우문술과 우중문은 고구려로 깊숙히 들어가면

위험해질까 불안해 했는데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면 황제를 볼 낯이 없다 생각해

결국 평양성으로 진군합니다

 

수나라군이 지친 것을 확인한

을지문덕은 일부로 수나라군을 더 깊숙히 끌어들이려

전투를 벌여 일부로 패배했고

 

기세등등해진 수나라군은

평양성 근처까지 와서 진을 쳤습니다

 

이에 을지문덕은 우중문을 희롱하는(놀리는) 시를 보냈습니다

 

<을지문덕의 '여수장우중문시'>

신기한 계책은 천문에 통달했고

묘한 계략은 땅의 이치를 알았도다

전투마다 이겨 공이 이미 높았으니

만족한 줄 알았으면 돌아가는 것이 어떠하리

 

神策究天文 신책구천문

妙算窮地理 묘산궁지리

戰勝功旣高 전승공기고

知足願云止 지족원운지

 

여수장우중문시

 

얼핏보면 우중문을 띄어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조롱하는 시였고

결국 우문술은

군사들이 피로하고 고달파해 더이상 싸울 수 없음을 알고

이 편지를 핑계삼아 돌아갔습니다

 

그때 을지문덕이 숨겨둔 군사들을 이끌고

사방에서 습격했고

살수에 이르러 군사가 반쯤 건넜을때

을지문덕은 군사를 전진시켜

수나라군을 궤멸시킵니다

 

살수대첩 , 박각순(1975년 작품)

 

수나라군은 허겁지겁 도망쳤는데

처음 30만 5천명의 별동대 중

돌아간 자는 고작 2천 700명이었습니다

 

패잔병들이 돌아오자

분노한 수양제는

우문술 등을 쇠사슬로 묶어서

수나라로 돌아갔습니다

 

[수나라의 멸망]

이후에도 수양제는 고구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신하들의 만류에도 4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재침공합니다 (수양제의 2차침공)

 

나름 이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칼을 간 수나라군이었고 고구려는 위기에 몰렸으나

그때 수나라 본토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수양제는 다시 돌아갑니다

 

수나라군이 갑자기 철군하자

고구려군은 조심스럽게 철군하는 수나라군을 따라가다가

그들이 다시 요하를 건너 돌아가려하는 모습을 보이자

후방을 쳐서 수나라군 수천명을 죽였습니다

 

이후에도 수양제는 또다시 고구려를 침공하는 문제를 논의하려 했는데

신하들 중 아무도 고구려 침공에 대한 말을 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당시 수나라도 , 고구려도 모두 전쟁으로 피폐해지고 지쳐있었던 상황이었는데

수양제는 다시 전국의 군사를 쥐어짜내서

고구려를 침공합니다

 

이에 두려워진 영양왕 역시 수나라에게 굽히며 화친을 요청했고

기뻐진 수양제는 군사를 거두었습니다

 

수양제는 이후에도 장수들에게 다시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했지만

이미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오랜 전쟁으로 나라가 거덜나있었고

결국 수양제의 실정과 폭정에 수나라에서는 반란이 일어나

수양제는 살해당하고

수나라는 멸망합니다

 

[영류왕과 당나라의 등장]

영양왕이 승하하자

영양왕의 이복동생 고건무가 왕위를 이어

고구려 27대왕 영류왕이 되었고

영류왕은 수나라와의 오랜전쟁으로 지친 고구려의 내정을 수습하려 노력합니다

 

중국에서는 수나라가 멸망하고

또다시 통일제국 당나라가 등장했고

중국 통일제국과의 거대한 전쟁에 충격을 받은

고구려인들은 당나라와 친하게 지내야 된다는 친당파와

맞서야 한다는 반당파로 나뉘어있었습니다

 

수나라와 당나라 지도

 

일단 영류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조공하며

눈치를 보고 잇었고

당황실이 믿던 불교와 도교의 교리를 수입해옵니다

 

영류왕은 태자를 당나라에 보내서 조공하기도 했고

이에 당황제는 태자를 보낸것에 대한 답례로

진대덕이라는 인물을 사신으로 보냈는데

진대덕은 순진한 척을 하며

고구려의 경치를 구경하고 싶다했고

 

중국의 재침공을 극심히 두려워하던

고구려 관리들은 기꺼이 진대덕을 정성껏 안내하며

이곳저곳 진대덕과 함께 고구려를 유람합니다

 

이에 진대덕은 고구려 지리를 한눈에 파악하고

당태종에게 보고합니다

 

[연개소문]

지나친 친당정책에

고구려 내부에서도 불만이 나오기 시작했고

한편 영류왕은

서부 대인 연개소문에게

중국을 막기위한 천리장성을 쌓는 일을 시켰는데

 

연개소문은 잔치를 열어

대신들을 초대했고

대신들이 오자 대신들을 모두 죽이고

궁중으로 달려들어가서 영류왕을 살해하고

 

사극 '칼과꽃' 에서 영류왕을 살해하는 연개소문

 

영류왕의 동생의 아들 고보장을 왕위에 세웠고

고보장은 고구려 마지막왕 , 27대왕 보장왕이 됩니다

 

허수아비왕 보장왕을 앉힌 연개소문은

스스로 막리지(대막리지)가 되어서

고구려의 모든 직책을 가지게 됩니다

 

연개소문은 이전부터

성격이 잔인하고 포악하다 여겨져서

고구려인들이 꺼려했지만

영류왕을 시해하고 막리지가 되어 전권을 휘두르자

고구려인들은 그를 두려워했고

 

연개소문은 매우 위엄이 있었고

몸에 칼 다섯자루를 차고 다녔는데

사람들은 감히 그를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연개소문은 말에 올라가거나 내려올때마다

귀족 장수를 땅에 엎드리게 해서

발판으로 삼아 말위에 올라탔으며

그가 행차할때마다

사람들은 두려워해서 구덩이라도 피하지 않고 숨었습니다

 

귀족은 크게 그리고 시종은 작게 그린 고구려 벽화 , 고구려가 철저한 신분사회임을 나타내는 그림으로 해석됩니다

 

연개소문은 영류왕의 지나친 친당정책에 분노한

고구려 강경파이기도 했고

농경귀족에게 잠식되가던 유목귀족의 대표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연개소문은 포악하다는 일방적 평가와 달리

고구려 마지막 실권자로서 고구려의 자존심을 지키려했던

고구려 마지막 불꽃이었던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중국의 동북공정 , 고구려 역사침탈에 맞서 제작한 한국 고구려 사극 '연개소문(2006)'

 

영류왕과 연개소문을 다룬 사극 '칼과 꽃 (2013) Sword And Flower'

 

중국 경극속의 연개소문(오른쪽) , 중국인들이 두려워한 고구려인

 

[당태종 이세민의 고구려 침공]

하여튼 연개소문이 집권하고

허수아비왕 보장왕이 고구려 왕 자리에 앉았고

또 연개소문은 신라를 공격했는데

 

당태종 이세민은 이를 구실삼아 고구려를 침공합니다

 

고당전쟁

 

<당태종>연개소문은 왕을 시해한 반역자이다 !!

 

<연개소문>지랄하지 마라

세민이 니놈은 형제의 난을 일으킨 패륜아 아니냐 !!

 

당태종은 이전 수나라의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철저한 준비를 했고

수나라와의 전쟁동안 100만대군도 버텨냈던 요동성은

돌을 날리는 당나라군의 투석기의 공격앞에

결국 함락됩니다

 

중국 투석기

 

연개소문은 15만 대군을 보내서 당나라군에 맞서는데

당태종은 보통 인물이 아니기에

당나라군과 정면대결을 피해야한다는 말이 나왔지만

15만군대에 자신만만했던 고구려 장수들은

정면대결을 결심했고

'주필산 전투' 가 일어납니다

 

노련한 당태종의 당나라군은

고구려 15만대군을 격파시켰고

고구려군은 살수대첩급의 전과를 꿈꾸다 정예병력을 잃고

혼란에 빠집니다

 

[안시성 전투]

주필산 전투에서 승리해 의기양양해진 당태종과 당나라군은

안시성을 침공합니다

 

<당태종>내가 듣건대

안시성은 성이 험하고 군사가 강하며

성주가 용맹스러워

연개소문이 반란을 일으킬때도 항복하지 않아

연개소문이 그를 공격했으나

그를 굴복시킬 수 없었기에

그냥 성을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원래 당태종은 안시성을 치지 않으려하다가

후방이 막힐까 두려워 결국 안시성을 공격하게 됬고

안시성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당군에 맞섰습니다

 

안시성이 쉽게 함락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당나라군은 안시성 동남쪽에 흙으로 된 거대한 토산을 쌓아서

성 가까이 접근해왔고

이에 안시성에서도 역시 성을 높게 쌓으며 방어했습니다

 

안시성 전투 , 흙산을 쌓은 당나라군

 

당태종은 밤낮을 쉬지않고 60일동안

50만명이 동원되어 토산을 쌓았는데

그러던 중 토산 한쪽이 허물어져서 안시성을 덮쳤고

이틈에 고구려군이 토산으로 들어가

토산을 뺏어버립니다

 

도저히 안시성을 함락할 기미가 나오지 않자

곧 겨울이올것을 두려워한 당태종은

군대를 철수시킵니다

 

당군이 돌아가자

안시성은 굳게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고

안시성주 양만춘은 성에 올라가 떠나는 당황제에게

절을 했습니다

 

<양만춘>다시는 우리 땅을 침공하지 마십시오 폐하

 

당태종은 양만춘이 성을 굳게 지킨 것을 가상히 여기며

비단 1백필을 주고 돌아갑니다

 

안시성 전투를 다룬 영화 '안시성 (2018) 安市城 The Great Battle'

 

그러나 수양제처럼 고구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당태종은

이후에도 재차 대규모 고구려 원정을 계획하나

실행전 사망했고

아들 당고종의 군사적 역량을 믿지 못한 당태종은 유언으로

 

<당태종의 유언>요하를 넘지 말라(고구려를 치지 말라)

 

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그러나 일단 고구려는 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오랜 전쟁으로 매우 지쳐있었고

나라 안에서는 온갖 흉흉하고 불길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나당연합군과 고구려의 멸망]

당과의 전쟁이 끝나고 한시름 놓은

고구려는 백제 , 말갈과 연합해

신라를 공격해 신라 수도 금성까지 위협했고

 

이에 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당군과 연합해서

나당연합군을 이끌고 백제 수도 사비성을 공격해

백제를 멸망시킵니다

 

백제가 멸망하자 고구려는 서쪽으로는 당나라 ,

남쪽으로는 신라에게 고립된 상황이 됬고

 

이전 당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하지 말라는 유언에도

당나라에게 너무 유리한 상황이 전개되자

결국 나당연합군은 고구려를 침공합니다

 

그러나 사비성과 달리 평양성은 만만한 성이 아니었고

강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요새였기에

장기전으로 이어지고 겨울이 오자 당군은 신라군이 가져온

군량미로 밥을 지어먹고 급하게 퇴각합니다

 

고구려는 나당연합군을 필사적으로 방어했지만

고구려 실권자 연개소문이 사망해버리자

큰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연개소문은 죽으면서 자신의 아들들에게

당부하고 당부했습니다

 

<연개소문>너희 형제는

물과 고기처럼 화합해서

작위를 둘러싸고 다투지 말라

만일 그리하지 못하면

반드시 다른 나라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그의 맏아들 연남생이 막리지 직위를 계승했고

연남생의 두 아우인 연남건과 연남산이 형을 도왔는데

주변 사람들은 이 삼형제를 이간질했고

세 형제는 결국 싸우며 고구려에서는 내전이 벌어져

연남생은 당나라로 투항해버립니다

 

고구려에 내분이 일어나고

최고권력자가 당나라에 투항해버리자

전쟁은 당나라에 매우 유리하게 돌아가게 됬고

결국 668년 당고종과 신라의 나당연합군에게

고구려 평양성은 함락되고

고구려 700년 왕조는 멸망합니다

 

나당연합군의 진로 , 고구려 멸망

 

이미 고구려와 당나라와의 국력차도 매우 컸는데

고구려의 내분 , 신라의 공격 등까지 여러 악재가 겹치고 겹쳐

고구려는 멸망했고

보장왕과 고구려 백성들은 당나라에 끌려갑니다

 

[고구려 부흥운동]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도 고구려인들은 고구려 부흥운동을 시작했고

검모잠 장군과 고구려유민들에 의해

보장왕의 서자 고안승은 고구려 왕으로 추대되어

황해도 지역에서 고구려 부흥운동을 주도했으나

당나라 군대의 토벌전으로 실패합니다

 

고구려 부흥운동

 

안승은 이후 남쪽 신라로 달아나서

옛 백제땅에서 보덕국이라는 신라의 괴뢰국(허수아비 국가)의 왕이 되다가

신라에서 김씨 성을 받아

신라 귀족으로 편입되고 고구려 유민들은 신라인으로 흡수됩니다

 

<라봉봉>이 시기 고구려 기록은 매우 길어서

이전에 여러번 쪼개서 쓴바가 있는데

나름 요약해서 썼습니다

 

항상 고구려 이야기를 하면서 느끼는 바지만

고구려 멸망시기 기록은

참 슬픈게 많고

고구려 역시 내분과 내란이 있어서 멸망한 것도 있었지만

수나라 , 당나라에 비해 국력이 훨씩 작았던 고구려가

이정도 버틴것만 해도 엄청나게 대단했던것이 맞고

 

만약 당시 신라가 고구려의 편이었다면

한국사는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신라는 고구려 멸망이후 계속해서 야심을 드러내는

당과 국경을 맞대고

결국 당과 전쟁을 벌여야했기에

 

고구려가 수나라 , 당나라를 막아낸 의의는

'민족의 방파제' 로 이야기 되고 있고

고구려나 발해같은 한국 만주 왕조가 중화제국을 막아냄으로서

남쪽의 신라나 백제는 중국의 직접적인 전쟁위협은 없었다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보고 봐도

멸망시기 고구려 , 백제 , 신라 삼국의 이야기는 모두 다 참 비통하고 슬픈것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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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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