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백제 건국 , 온조왕 , 다루왕 , 기루왕 , 개루왕>

[소서노]

[바닷가와 강가]

[온조왕의 백제 건국]

[말갈과의 전투]

[마한 합병]

[다루왕과 신라]

[기루왕대의 재앙]

[개루왕과 도미 부부]

<라봉봉>

 

[소서노]

백제 건국시조 온조왕의 아버지는

고구려 건국시조 고주몽입니다

 

고구려 건국시조 동명성왕 고주몽

 

이전에 주몽이 부여에서 탈출해서

남하해 고구려를 건국했을때

졸본부여에 이르렀는데

졸본부여 왕의 딸과 결혼해

졸본부여왕이 죽고 주몽이 왕위를 이어

고구려를 건국합니다

 

주몽은 졸본부여 공주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는 비류 , 둘째는 온조였습니다

 

혹은 주몽은

졸본부여 공주가아니라

졸본 귀족 연타발의 딸 소서노와 결혼했는데

소서노는 이전에 우태라는 남자에게 시집가서

비류와 온조를 낳고

우태가 죽은 뒤 혼자살다

주몽이 부여에서 남하하자

주몽의 왕비가 되어

주몽을 내조했고

고구려 초기 건국에 소서노의 내조가 매우 컸기에

주몽은 소서노를 극진히 사랑하고

비류와 온조를 자기 친아들처럼 대우했습니다

 

사극 '주몽' 속 소서노와 고구려 주몽임금

 

그러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때

본처인 예씨부인에게서 낳은 아들 유리가

고구려에 찾아오자

주몽은 유리를 태자로 삼았고

 

주몽의 적자 유리가 찾아오자

비류와 온조는 결국

두려워했습니다

 

<비류>온조야

 

<온조>네 형님

 

<비류>처음 대왕께서 부여에서 피해

이곳 졸본에 오셨을때는

어머니가 가산을 내어주셨기에

어머니의 조력이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유리가 왕위를 있게 됬으니

우리가 괜히 여기 있으면서

쓸모없는 사람처럼 답답하고 우울하게 지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어머님을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살곳을 선택해

별도로 도읍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

 

[바닷가와 강가]

결국 비류는 동생 온조와 어머니 소서노 ,

10명의 신하 , 따르는 무리들을 이끌고

현재 서울의 한강 남쪽으로 갔습니다

 

남하하는 비류와 온조와 소서노

 

원래 그곳은 마한의 땅이었는데

마한의 왕은 그들의 인물됨을 보고

한강유역을 주어 그들에게 살게 해주었습니다

 

비류는 바닷가에 가서 살고싶었는데

10명의 신하들은 이곳이 풍요롭고 외적을 방어하기 쉬우니

이곳에 도읍을 하자했는데

비류는 듣지않고

온조와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 , 현재 인천으로가서 도읍을 정했고

온조는 하남위례성 , 현재 서울 송파구 풍납동에

도읍을 정했습니다

 

미추홀과 위례성

 

온조는 나라 이름을

10명의 신하들을 따서

십제(열명이 강을 건너다 , 열명이 돕다) 라고 했습니다

 

온조의 십제는 한강의 풍요로운 땅을 바탕으로

농사와 고기잡이가 잘 되었고

크게 번성했습니다

 

백제 첫수도 위례성 복원도 , 왼쪽 풍납토성 오른쪽 몽촌토성

 

그러나 바닷가로 간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하게 살지 못했고

다시 동생이 있는 위례성으로 돌아왔고

부끄러워하고 뉘우치다 죽었습니다

 

[온조왕의 백제 건국]

이에 모든 백성들이 온조의 위례로 모였고

그 뒤로부터 백성들이 온조왕을 즐겁게 따랐기에

나라 이름을 십제(10)에서 백제(100)라고 했습니다

 

온조왕 기념우표 , 대한민국 우표

 

온조는 자신이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다 생각해서

자신의 성씨를 부여로 했고 '부여온조' 가 되었고

백제 왕의 성씨는 '부여' 가 됩니다

 

한강유역에서 바다로 진출하며 해상대국이 된 백제

 

[말갈과의 전투]

백제 북부에는 말갈족이 용맹스럽고 사나웠기에

온조왕은 건국초부터 방어를 튼튼히 했고

말갈이 북쪽국경을 침략하자

온조왕은 정예군을 이끌고 재빨리 공격해서 그들을 격파합니다

 

말갈족(여진-만주족)

 

온조왕은 성을 쌓고 목책(나무 울타리)을 세워

방비를 튼튼히 했는데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국을 지배하기 위해 만든 한사군인 낙랑군은

새로 건국된 백제에게 성과 목책을 왜 세우냐며

빨리 제거하라 했지만

온조왕은 나라의 자위권을 이유로

듣지 않았기에

낙랑과의 우호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몽촌토성의 목책 , 토성과 목책은 백제 특유의 방어체계였고 일본도 백제의 방어체계를 그대로 수용합니다

 

이후 왕의 어머니 소서노가 61세를 일기로 사망했는데

그녀는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세운

한국사의 여걸이었습니다

 

<소서노>온조야 너는 부여의 후손이며

나와 동명성왕의 아들임을 잊어서는 안되느니라..

 

[마한 합병]

온조왕은 아버지 주몽을 닮아 뛰어난 임금이었고

마을들을 순회하며 백성들을 위로하고 농사를 장려했고

풍요로운 백제땅은 농사가 매우 잘되었습니다

 

온조왕은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궁궐은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았습니다

(검이불루 화이불치 儉而不陋 華而不侈)

 

백제 건축양식으로 건설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 '호류사' , 한국 궁궐들은 전쟁등으로 파괴되어서 오히려 일본내에 백제인들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온조왕은 마한의 힘이 점차 약해지는 것을 보고

다른 나라가 마한을 합병해버리면

상황이 더 나빠질거 같아

결국 마환을 치기로 했고

사냥을 나간다 핑계대고 군사를 출동시켜

마한을 기습공격해 마한을 합병합니다

 

백제 , 신라 , 가야의 원형이 된 마한 , 진한 , 변한

 

이후에도 온조왕은

말갈의 침략을 방어하고

백성들을 위한 선정을 하며

46년간 재위하다 사망했습니다

 

온조왕 동상

 

[다루왕과 신라]

온조왕이 승하하자

온조왕의 맏아들 부여다루가 재위해

백제 2대왕 다루왕이 되었습니다

 

다루왕은 아버지를 닮아 도량이 넓었던 인물이었고

재위초부터 말갈과의 전쟁이 있었습니다

 

말갈 이외에도

동쪽의 신라왕에게 사신을 보내서

만나기를 요청했지만

신라는 거절했고

다루왕은 신라를 공격했지만 승리하지 못했고

신라역시 백제를 공격했지만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이때부터 백제와 신라의 티키타카가 시작됬고

두 나라는 멸망때까지 , 멸망 이후에도

견원지간 , 개와 원숭이의 관계처럼 앙숙이었습니다

 

[기루왕대의 재앙]

다루왕이 승하하자

다루왕의 맏아들인 태자 부여기루가 왕위를 이어

백제 3대왕 기루왕이 되었습니다

 

기루왕의 시대는

온갖 천재지변 , 재앙이 많았고

지진 , 가뭄 , 바위가 떨어짐 , 두마리 용이 한강에 나타남 , 서리 , 우박

등 여러 천재지변과 기이한 현상들이 일어났습니다

 

두마리의 용이 한강에서 울부짖었따

다 덤벼도 두 용은 한강에서 졸라 짱쎄서 최강이었따

 

<백제인들>으악 제기랄 도망가자 !

 

[개루왕과 도미 부부]

기루왕이 승하하자

기루왕의 아들

부여개루가 왕위를 이어서

백제 4대왕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

신라의 아찬 길선이 반역을 하려다 발각되자

백제로 도망쳐왔고

신라 아달라왕이 글을 보내서 돌려보내달라했지만

개루왕은 거절했고

아달라왕이 노해서

군사를 출동시켜 공격해왔는데

백제 성들은 굳게 방어하고 싸우지 않았기에

신라군은 돌아갔습니다

 

개루왕 당시 도미라는 평범한 백성이 있었는데

가난했지만 의리는 알았던 인물이었습니다

 

도미의 아내는 아름답고 예뻤고

절조있는 행동으로 당시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유유상종 , 부창부수)

 

도미부인

 

개루왕이 이를 듣고

도미를 불러서 말하기를

 

<개루왕>평범한 부인들은

앞에서는 비록 지조를 지킨다하지만

그윽하고 어두운 곳에서 유혹하면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드물지 않겠는가 ?

 

이에 도미는

 

<도미>무릇 사람의 정이란 헤아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아내같은 사람은

비록 죽더라도 두 마음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개루왕은 이를 시험하려

도미에게 일을 시켜잡아두고는

도미부인을 강간하려 했는데

 

도미부인은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며

물러나서 계집종을 치장시켜 바칩니다

 

속았다는 것을 안 개루왕은

크게 노해서

도미를 왕을 속인 죄로 처벌해

두 눈알을 뽑고

작은 배에 태워 강에 띄웠습니다

 

개루왕은 다시 도미의 아내를 끌어다가

강간하려 하니

도미 부인이 말했습니다

 

<도미 부인>나는 지금 낭군(남편)을 이미 잃었으니

홀로남은 이 한몸을 스스로 지킬 수 없기에

왕을 모시는 일을 어찌 어길 수 있겠습니까 ?

 

그러나 지금 월경(생리) 중이라서

온 몸이 더러우니

청컨대 다음날 목욕을 하고 오겠습니다

 

개루왕은 이를 믿고 허락했고

도미부인은 곧바로 도망쳐서 강어귀를 갔는데

배가 없어 건널 수가 없었고

부인이 하늘에 부르짖으며 통곡하니

문득 외로운 배 한척이 내려왔고

도미부인은 이 배를 타고 섬에 다달았는데

남편은 아직 죽지 않은채 그곳에 있었습니다

 

남편을 찾아 배를타는 도미부인 , 조선 삼강행실도

 

두 부부는 풀뿌리를 캐 씹으며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에 도착했고

고구려 사람들은 두 부부를 불쌍히 여겨

옷과 음식을 주었습니다

두 부부는 가난히 살며 일생을 마쳤습니다

 

도미부인 사당

 

<라봉봉>백제 온조왕은

한국사의 대장부 , 여걸이었던 부모님 주몽과 소서노의 아들답게

역시

 

'쓸모없는 사람같이

답답하고 우울하게 지내지 않고'

 

고구려를 나와서 찬란했던 백제를 세운 인물이었고

 

백제는 해상강국으로서

중국과 일본을 개척했던 참 대단한 나라였습니다

 

또한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았던 ,

정조있던 백제인의 성품은

한국 문화의 근본이 되었습니다

 

반응형
Posted by 라봉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