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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왕 , 구이신왕 , 비유왕 , 개로왕 , 문주왕 , 삼근왕>

[해씨귀족을 등용한 전지왕]

[중국 남조와 우호관계를 맺은 구이신왕]

[비유왕의 나제동맹]

[바둑에 빠진 개로왕]

[문주왕의 웅진천도]

[삼근왕대 해구의 반란]

<라봉봉>

 

[해씨귀족을 등용한 전지왕]

아신왕이 사망하자

왜국(일본) 에 가있었던 아신왕의 태자 부여전지는

돌아와 왕위를 이어 백제 18대왕 전지왕이 되었습니다

 

처음 아신왕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아신왕 막내 동생 부여설례가 쿠데타를 일으켜

자기가 왕이 됬습니다

 

이에 태자 부여전지는 왜국에서 귀국하던 중

해씨가문에게 경솔하게 입국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어

곧바로 백제로 오지 않고

바다 가운데 섬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백성들이 부여설례를 죽이자

돌아와 왕으로 즉위해 전지왕이 됬습니다

 

해씨 세력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전지왕은

즉위후 해씨 귀족들을 대거 등용합니다

 

[중국 남조와 우호관계를 맺은 구이신왕]

이후 전지왕이 사망하자

전지왕의 맏아들 부여구이신이 왕위에 올라

백제 19대왕 구이신왕이 됩니다

 

구이신왕은 중국 남조인 송나라와 우호관계를 맺었습니다

 

[비유왕의 나제동맹]

구이신왕이 사망하자

구이신왕의 맏아들 부여비유가 왕위를 이어

백제 20대왕 비유왕이 되었고 

백제 11대왕 비류왕과는 다른 인물입니다

 

비유왕은 왜국과 송나라와의 관계를 중요시했습니다

 

고구려 , 백제 , 신라 , 왜국 사신들의 모습 , 당염립본왕회도

 

비유왕은 남진하는 강성한 고구려를 막기위해

신라에 화친을 요청했고

신라 눌지왕 역시 고구려의 내정간섭에서 벗어나기위해

둘은 동맹을 하게 됩니다

 

원래같으면 신라는 백제와 원수지간이었지만

고구려의 강성함이 너무 강해 둘은 '적과의 동침' 을 하게 됩니다

 

이로인해 백제와 신라간에

'나제동맹' 이 성립되었고

나제동맹은 힘을 합쳐 고구려에 맞서게 됩니다

 

고구려 , 백제 , 신라의 갑옷 , 신라의 경우 전쟁보다 외교를 중시해서 갑옷이 화려했습니다

 

[바둑에 빠진 개로왕]

비유왕이 사망하자

비유왕의 맏아들

부여개로가 왕위를 이어

백제 21대왕 개로왕이 되었습니다

 

개로왕은 중국 북조인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쳐달라 요청했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장수왕시기였기에

엄청나게 강성했는데

위나라는 고구려를 칠 수가 없었고

백제 개로왕의 말을 듣고서는

일단 기다리라 답변합니다

 

백제 개로왕이 위나라에 사신을 보낸 사실을 알게된

고구려 장수왕은 분노했고

백제를 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장수왕은 백제를 치기 전

백제에 미리 가서 첩자를 할 사람을 구했습니다

 

이때 도림 스님이 장수왕에게 말했습니다

 

<도림>소승이 원래 도는 알지 못하지만

나라의 은혜에 보답코자 합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저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마시고

일을 시켜주신다면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장수왕은 기뻐하며 도림을 백제에 보냅니다

 

도림 스님은 거짓으로 죄를 지어 도망치는체 하고

백제로 왔습니다

 

당시 개로왕은 장기와 바둑을 좋아했는데

도림은 백제 대궐에 다달아

개로왕에게 바둑을 알려주겠다 합니다

 

백제 의자왕이 일본 천황에게 선물한 바둑판 '목화자단기국'

 

개로왕이 그를 불러 대국해보니

과연 국수(바둑고수) 였습니다

 

개로왕은 기뻐하며 도림과 매우 친하게 지냈고

개로왕과 친해진 도림은 점차 개로왕을 꼬드깁니다

 

도림은 왕의 위엄을 높이려면

궁궐공사를 해야한다 말했고

개로왕은 옳다며

백성들을 모조리 징발해 궁궐을 화려하게 짓습니다

 

이로인해 백제 창고는 텅비고 백성들이 곤궁해져서

나라가 위급해졌습니다

 

그러자 곧 도림은 다시 고구려에 돌아와

장수왕에 이 사실을 말했고

장수왕은 기뻐하며

군사 3만을 거느리고

백제 수도 한성을 포위합니다

 

개로왕과 도림 , 도림의 꾀

 

개로왕은 성문을 닫고있었으나

이미 약해질대로 약해진 백제군은 저항할 수 없었고

고구려 군사들이 사방으로 협공하고

불을 질러 성문을 태우니

개로왕은 어찌할바 모르고

성문을 나가 도망쳤으나

고구려 군사가 추격해 개로왕을 죽였습니다

 

한성백제 최후의날 , 주저앉은 개로왕

 

개로왕이 죽기 전

장수왕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개로왕은

태자 부여문주에게 말했습니다

 

<개로왕>내가 어리석고 총명하지 못해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다가

이렇게 되었다

 

백성들과 군대들은 약해졌으니

비록 위급한 일을 당해도

누가 나를 위해 힘써 싸우겠는가 ?

 

나는 당연히 나라를 위해 죽어야하지만

문주 너가 여기서 죽는 것은 유익할게 없으니

난리를 피해 있다 나라의 왕통을 잇도록 하라

 

개로왕은 성을 수비할테니

문주를 신라에 보내 구원병을 데려오라 했고

그렇게 태자 부여문주는 눈물흘리며 성을 탈출했고

문주가 신라에 간 사이

개로왕은 한성을 지키다

한성을 침공한 고구려군에게 곧 죽었습니다

 

[문주왕의 웅진천도]

문주가 신라 구원병 1만명을 얻어 돌아왔으나

고구려 군사들은 이미 한성을 파괴하고 물러간 뒤였고

아버지 개로왕은 사망해있었습니다

 

결국 태자 부여문주는 왕위를 이어

백제 22대왕 문주왕이 되었습니다

 

문주왕은 우유부단한 성격이었지만

백성들을 사랑했고

백성들도 그를 사랑했습니다

 

문주왕은 파괴된 한성을 뒤로하고

남쪽의 웅진 , 오늘날 충청남도 공주시로 수도를 천도(수도를 옮김) 합니다

 

문주왕의 웅진천도

 

백제 2번째 수도 웅진 熊津 은 곰나루터라는 뜻인데

왜 이런 이름이 붙었냐면

원래 한 암컷곰이 인간 남자를 좋아해

남자를 동굴로 납치해 바위로 굴을 막아 감금했고

암컷곰은 남자와 결혼하고 아기까지 낳았습니다

 

암컷곰은 아이들이 크자

이제 자식들이 있으니 도망가지 않겠거니 방심하고

굴을 막지 않았고

이 틈을타 남자는 뒤도 안돌아보고 도망칩니다

 

암컷곰은 쫓아나와 아이들을 강물에 하나하나 빠트리며

돌아오라 호소했지만

남자는 그냥 도망쳤고

이에 암컷곰은 매우 슬퍼하며

나루에 몸을 던져 자살합니다

 

공주(웅진) 고마나루

 

이로인해 사람들은 그 곳을 곰나루 , 고마나루라 불렀고

웅진(곰나루의 한자어)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웅진 곰 석상

 

웅진은 충청도 최대강인 금강을 끼고있었고

외적을 방어하기도 좋고

한성 못지않게 풍요로운 도시였습니다

 

한편 한성을 함락시킨 고구려 장수왕은

계속해서 남진하며 웅진성을 압박했지만

북방의 침략을 우려해 곧 돌아갑니다

 

문주왕 시대부터

477년간 수도였던 한성을 잃은 백제는 큰 위기에 빠졌고

가뜩이나 약했던 왕권은 더욱 약해져서

백제 귀족들이 크게 일어났고

새로운 도읍의 웅진지역 귀족세력들도 강성해져서

'대성팔족' 이라는 8개의 귀족 세력들이 일어납니다

 

백제 지배층들의 복식

 

문주왕은 혼란의 나라를 수습하려 햇지만

이미 추락한 왕실의 권위였고

그러한 와중에 병관좌평(국방부 장관) 해구는

마음대로 권력을 행사하며 문주왕을 무시합니다

 

이후 문주왕이 사냥하러 나가

밖에서 묵었는데

해구가 도적을 보내서 문주왕을 암살합니다

 

[삼근왕대 해구의 반란]

문주왕이 해구에게 살해당하자

문주왕의 맏아들 부여삼근이 왕위를 이어

백제 23대왕 삼근왕이 됬는데

삼근왕은 나이가 13세에 불과했고

 

어린왕 삼근왕은 자신의 아버지를 시해한 해구에게

나라일과 군사일 모두를 맡깁니다

 

곧 해구는 반란을 일으켰고

삼근왕은 군사 2천으로 해구를 토벌하게 했지만

이기지 못하다

다시 500명의 정예 군사로 해구를 공격해 죽였습니다

 

백제가 한성도 잃고

이렇게 내부 혼란이 지속되자

백제 속국이었던 가야가 다시 일어나

전라도 지역 동부를 잠식했고

또 가야가 백제를 통하지않고 중국과 직접교류하는 등

백제는 내 , 외부적으로 혼란의 시기였습니다

 

<라봉봉>당시 고구려는 장수왕이라는 최전성기 임금이 있었던 시기고

백제는 광개토대왕대부터 계속 고구려에 털리던 상황이었기에

시기적으로 매우 안좋았고

여러 반란 , 실정들까지 겹쳐

결국 500년 도읍 한성 , 한강유역은 고구려의 손에 넘어갑니다

특히 한강유역은 삼국의 패권을 상징하는 지역이었고

이곳을 차지한자가 가장 강력한 나라임을 의미했습니다

 

한강유역을 잃은

백제는 남하해 웅진으로 수도를 옮겨 다시 재기를 노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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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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