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왕 , 무령왕 , 성왕 , 위덕왕>
[동성왕대 웅진백제의 재기]
[일본에서 태어난 무령왕]
[중흥군주 무령왕의 개혁]
[성왕의 한강탈환]
[관산성 전투]
[용맹했던 태자 부여창]
[성왕을 기린 위덕왕]
<라봉봉>
[동성왕대 웅진백제의 재기]
삼근왕이 사망하자
문주왕의 동생 부여곤지의 아들 부여모대가 왕위를 이어
백제 24대왕 동성왕이 됩니다
동성왕은 담력이 뛰어나고 활을 잘쏘아 백발백중이었습니다
위기의 백제였지만
동성왕대부터 다시 백제는 재기(다시 일어남)하기 시작했고
동성왕은 신라와 고구려가 싸울때 군사 3천을 신라군에 지원해
신라군을 도왔고
신라 역시 고구려가 침공해오자 원군을 보내오니
나제 동맹이 돈독해 졌습니다
이 시기부터 백제는 다시 북진해 한강유역을 탈환하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동성왕은 재위 후기로 갈수록 점차 사치에 빠졌고
흉년이 들어 굶주린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는데
창고를 풀자는 신하들에 말에도 동성왕은 창고를 풀지 않았습니다
또한 대궐 동쪽에 임류각을 세워
연못을 파고 기이한 짐승을 키웠고
신하들이 항의하는 글을 올렸지만
듣지 않고 항의하지 못하게 대궐 문을 닫어버립니다
동성왕은 측근들과 임류각에서 잔치를 베풀며
밤새도록 실컷 즐겼고
서울에서 노파가 여우로 둔갑하거나
남산에서 호랑이 두마리가 싸우는 등 기이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후 동성왕에게 원한을 품던 백가는
사람을 시켜서 동성왕을 칼로 찔러 죽입니다
[일본에서 태어난 무령왕]
동성왕이 사망하자
개로왕의 아들이었던 부여사마가 왕위를 이어
백제 25대왕 무령왕이 되었습니다
이전 개로왕이 동생 부여곤지를 왜국에 보낼때
자신의 임신한 부인을 부여곤지와 함께 왜국에 보냈고
왜국에 가던 중후쿠오카 북쪽섬 카카라노시마에 정박해
무령왕을 낳았습니다
일본어로 섬은 시마인데 (독도를 다케시마 부르는 왜놈들)
무령왕은 섬에서 태어났기에
이름이 시마 , 사마가 되었습니다
또 백제 무령왕은 일본 천황가의 조상이기에
한일 양국에서 특히 중요시하는 인물입니다
[중흥군주 무령왕의 개혁]
동성왕이 말년에 무리한 행보를 보이다 살해당하자
무령왕이 왕위에 올랐고
무령왕은 눈매가 그림같았고 인자하고 너그러워 사람들이
무령왕을 따랐습니다
곧 백가가 반란을 일으켰고
무령왕은 백가의 난을 진압하고 항복한 백가의 목을 베어
백강에 던졌습니다
무령왕은 전라도지역의 구 마한 세력을 완전히 일소하고
세력을 확장하던 가야세력을 밀어냅니다
북쪽으로는 고구려에게 한강유역을 잠시 탈환하기도 했고
무령왕은 동성왕을 시해한 귀족들을 제압하고
22개로 운영되던 담로(22개 성 , 지방)에 왕족을 보내 통치하도록 해서
웅진백제의 중앙집권화와 정치안정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외에도 무령왕은
백제 문화발전에 노력해
중국 남조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며 외교관계를 강화하고
일본에 오경박사를 보내 백제의문화를 전해줍니다
무령왕대 백제는 다시 전성기가 시작되
중흥(다시 번성함) 했고
무령왕은 백제의 중흥군주라 불리고 있습니다
1971년 충청남도 공주시(웅진) 에서 배수로 공사중
무령왕릉의 무덤이 발견되는데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이었고
화려한 유물들이 나와
백제의 국가 , 사회상 , 중국과 백제의 교류 , 장례 등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왕의 한강탈환]
무령왕이 사망하자
무령왕의 아들 부여명농이 왕위를 이어
백제 26대왕 성왕이 되었습니다
훌륭했던 무령왕의 아들이었던 부여명농에 대한 백성들의 기대가 컸고
그가 왕위에 오르자 백성들은 그를
성왕 聖王 (성스러운 임금) 이라 불렀습니다
고구려 안장왕이 직접 백제 북쪽을 침공하자
성왕은 보병과 기병 3만을 이끌고 맞서 싸우게 했지만
패배해 2천명이 전사합니다
결국 성왕은 다시금 신라와 동맹을 강화해
고구려에 공동대처하기 시작하고
성왕은 신라와 연합해
백제의 숙원사업이었던 500년 옛수도 한강을 탈환하려 결심합니다
성왕은 먼저 왕권을 강화하려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하고
나라 이름을 백제에서 잠시 '남부여' 로 바꿔
부여 계승의식을 공고히 했습니다
또 성왕은 불교 미륵신앙을 이용해
자신을 미륵이라 칭하며 왕권을 강화시키고
수도를 5부로 계획하고
지방을 동방 , 서방 , 남방 , 북방 , 중방으로 나누는 5방체제로 정비합니다
성왕은 신라와 연합해 북진해 고구려가 점거하고 있던
한강지역을 탈환하는데 성공합니다
이에 신라는 한강 상류 10군 , 강원도 일대를
백제는 한강 하류 6군 , 서울일대를 고구려에게서 탈환하는데
백제와 신라는 서로 사이가 좋아보이면서도
미묘한 관계를 이어갔고
당시 신라는 전성기 , 강성하게 일어나는 형세였기에
말은 나제동맹이었어도 백제는 신라에게 끌려다니거나 의존하는 형국이었습니다
[관산성 전투]
백제는 신라의 힘을 빌려 한강하류를 차지했음에도
한강유역은 비옥함에도 유지하기도 어려운 땅이고
내부 상황이 안좋아 한강유역을 버리고 돌아왔고
이에 신라가 한강유역을 모두 점거합니다
이후 성왕은 신라의 경계심을 풀기위해
딸을 신라왕 진흥왕에게 시집보냈는데
곧 성왕은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라를 침공해
관산성을 공격합니다
성왕은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전선을 시찰하러 나섰고
이때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성왕은 살해당합니다
백제군은 신라 김무력 장군의 신라군에게 처참히 패배했고
성왕 및 백제 좌평 4명과 백제 장병 2만 9천 600명이 참살당합니다
성왕의 죽음 이후 백제는 다시 왕권이 급격히 약화되고
귀족중심 정치체계로 전환됩니다
또한 이때를 시작으로
121년간 지속된 나제동맹은 완전히 결렬됬고
백제와 신라는 다시 멸망때까지 격렬하게 싸우는
철천지원수 국가가 됩니다
이때부터 백제는 고구려가 아닌
신라에게 활을 겨누게 되었고
고구려와는 화친 , 동맹관계로 전환하고
왜 역시 적극적으로 백제를 도와
고구려+백제+왜의 동맹관계가 형성되고
신라는 한강유역을 차지해 번성했음에도 이 세나라에게 고립되어
큰 위기를 맞게 됩니다
[용맹했던 태자 부여창]
성왕이 관산성전투에서 신라군에 사망하자
성왕의 맏아들
부여창이 왕위를 이어
백제 27대왕 위덕왕이 됩니다
위덕왕은 창왕이라고도 불리며
용맹했던 인물이라
이전 근초고왕의 태자 근구수왕처럼 전장을 지휘한 인물입니다
위덕왕은 이전 태자시절 한강 탈환전을 지휘한 인물이고
승전에 기세가 올라 연이어 신라를 치자 주장하고
늙은신하들이 반대하지만
'늙었도다 어찌 겁이 많은가 ?'
하며 끝내 아버지 성왕의 허가를 받아 신라 관산성을 공격합니다
그러나 관산성 전투의 태자를 격려하러 간 성왕은
신라군에 급습을 당해 죽었고
백제는 3만대군을 잃습니다
성왕과 백제군들이 몰살하자
죄책감에 사로잡힌 태자 부여창은
스님이 되겠다며 왕위를 승계하기를 거부하지만
여러 신하와 백성들의 만류로
끝내 왕위에 오릅니다
[성왕을 기린 위덕왕]
관산성 전투로 급하게 왕위를 이은 위덕왕으로
동성왕-무령왕-성왕 시기 세워진 강력한 백제 왕권이
한순간에 무너졌습니다
왕이 된 이후 위덕왕은 신라를 공격했지만
강성한 신라의 반격으로 사망자가 1천에 이르렀습니다
한편 중국에서는 통일제국 수나라가 등장해
중국을 통일해버렸고
중국의 통일에
고구려 , 백제 , 신라 삼국은 위기감이 돌았습니다
이외에 위덕왕은 평생을 자신때문에 죽은
부왕 성왕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렸고
성왕에 대한 효심으로 성왕의 명복을 빌려했습니다
위덕왕은 성왕이 사후
극락정토 , 천국에서 잘 지내라
이상적인 세계관을 조각한 백제금동대향로를 만들었고
성왕의 얼굴을 본딴 구세관음상을 만들어
일본에 보냈는데
구세관음상은 일본 호류사 몽전에 보관되있습니다
<라봉봉>모처럼만에 백제 왕권이 강했던 네 왕들의 이야기였고
여기서 특히 무령왕이 중요하고
무령왕은 백제의 중흥 , 2차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었습니다
이때부터 백제는 다시 안정을 찾았고
백제인들은 중국 , 일본과 우호적 교류를 통해
문화를 발전시켜 원조 '한류' 를 주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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