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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건국 , 혁거세왕 , 남해왕 , 유리왕>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

[알영 부인]

[혁거세왕의 덕]

[무당과 차차웅]

[외적을 물리친 남해왕]

[이의 자국 이사금]

[백성을 살핀 유리왕과 도솔가]

[6부의 개혁과 17관등제]

[추석의 유래]

<라봉봉>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

옛날 고조선 유민들이 진한땅(경상도)에 내려와

여섯 마을 ,6부를 이루며 살고 있었습니다

 

신라(사로국)의 원형국가 진한

 

이들은 왕은 없었으나

화목하게 잘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6부의 한 촌장이

나정 우물 옆 숲사이에 흰 말이 꿇어 앉아 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경주 나정

 

그가 가서 보니 흰 말은 사라져있었고

다만 큰 알 한개가 있었습니다

 

알에 놀란 여섯촌장들

 

흰 말을 사랑한 신라인들 , 천마도

 

알을 쪼개자 그 속에서 어린 남자아이가 나왔고

사람들은 이 아이를 거두어 길렀습니다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

 

아이의 나이 10세가 되자 영리하며 행동이 조신했고

6부 사람들은 그의 출생을 기이하게 여겨서 높이 받들다

10살이 되자 임금으로 삼았습니다

 

진한 사람들은 박을 '박' 이라했는데

처음 큰 알의 모양이 박의 모양과 비슷했으므로

그의 성을 박씨로 하였고

그의 이름은 혁거세로서 박혁거세가 됩니다

 

박씨의 유래가 된 '박'

 

진한에서는 거서간을 귀인 , 왕이라 했기에

신라 1대왕 박혁거세왕 , 혁거세 거서간이 즉위합니다

 

신라 건국 , 박혁거세 우표

 

신라 시조 혁거세왕 동상

 

[알영 부인]

어느날은

용이 알영 우물(알영정)에 나타나서

오른쪽 옆구리로 한 여자아이를 낳았는데

한 노파(할머니)가 이를 보고 기이하게 여겨 데려다 길렀습니다

 

경주 알영정

 

여자아기의 입술은 닭부리모양이었는데

목욕을 시키니 부리가 빠졌고

알영 우물 이름을 따서

그녀의 이름은 '알영' 으로 정했습니다

 

알영은 자라면서 덕스러운 용모를 갖추었고

혁거세왕이 이를 듣고 그녀를 왕비로 받아들였습니다

 

알영부인

 

알영 왕비 , 알영부인은 행실이 어질고 내조가 훌륭해서

사람들은 혁거세왕과 알영부인을

 

'두 사람의 성인'

 

이라 불렀습니다

 

[혁거세왕의 덕]

혁거세왕시기는 왜인들이 신라를 침범하려다가

혁거세왕이 하늘에서 내려준 덕이 있다며 돌아갔고

두 성인의 덕을 따라 여러 사람들이 신라로 모였습니다

 

혁거세왕과 알영부인이 6부를 순행하며 위문했는데

혁거세왕은 남자백성들에게 농사를 ,

알영부인은 여자백성들에게 양잠(누에치기 , 옷만들기) 를 권하고

농토를 충분하게 이용하라 했습니다

 

고구려 벽화에 나타난 농사의 신 견우와 직물의 신 직녀 , 동양 농경사회에서 농사와 양잠은 국가적 중요 산업이었습니다

 

어느날은 낙랑 사람들이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침공하려다가

국경 부근 사람들이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고

노적가리(곡식더미) 가 들에 수북히 쌓인 것을 보고

 

노적가리

 

'이 지방 사람들은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으니

도덕이 있는 나라이다 ,

우리가 이러한 사람들을 군대로 몰래 기습하는 것은

도적과 다름없으니

이는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

 

하고는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습니다

 

이후 혁거세왕은

호공이라는 인물을 보내서

한국 남부에서 가장 강성했던

마한(경기+충청+전라도) 왕을 방문했습니다

 

삼한 수장노릇을 했던 마한

 

마한왕이 호공을 꾸짖으며 말했습니다

 

<마한왕>진한(신라)과 변한(가야) 는 우리나라의 속국인데

근년에는 곡물을 보내오지 않았소

대국을 섬기는 예절이 이와 같은거요 ?

 

마한왕

 

이에 호공이 대답했습니다

 

<호공>우리 나라에 두분의 성인이 출현하면서

사회가 안정되고

하늘의 시간이 조화를 이루어

창고가 가득차고

백성들은 공경과 겸양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진한의 고조선 유민부터

변한 , 낙랑 , 왜인까지

우리를 두려워하고 감동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임금께서

저를 보내 귀국을 방문하게 했으니

이는 오히려 지나친 예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왕께서 크게 성을 내고

무력으로 위협하시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

 

이에 마한왕이 분노해

호공을 죽이려 했지만

신하들이 말리자 호공의 귀국을 허락합니다

 

사실 이전부터

중국사람들중에 진나라에서 난리가 일자

한반도로 중국인들이 건너가

마한과 진한사이에서 살았는데

점차 진한 , 신라로 넘어갔고

삼한에서 마한이 아닌 혁거세왕의 진한(신라)이 덕으로 번성하며 일어나자

삼한 수장노릇을 했던 마한왕이 분노했던 것입니다

 

이후 마한왕이 죽었는데

어떤이가 혁거세왕에게 이 틈을 이용해

이전 우리 사신을 모욕한 원수를 갚고

마한을 정복하자 말했지만

혁거세왕이 말했습니다

 

<혁거세왕>다른 사람의 재난을 우리의 행복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행위이다

 

혁거세왕은 그의 말을 듣지않고

마한에 사신을 보내서 조문했습니다

 

이후 동옥저 사신이 와서 좋은 말 20필을 바치며

 

<동옥저 사신>우리 임금이 남한에 성인이 났다는 말을 들었기에

저를 보내 이를 바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혁거세왕 시기 고구려 고주몽과 백제 부여온조가

각각 고구려와 백제를 건국했고

삼국시대가 시작됩니다

 

초기 삼국 및 한국 여러 국가들

 

[무당과 차차웅]

신라 시조 혁거세왕이 사망하자

혁거세왕과 알영부인의 첫째아들 박남해가 왕위를 이어

신라 2대왕 남해왕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남해왕을 남해 차차웅이라 불렀는데

차차웅은 신라어로 무당을 뜻하는 말로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주관했기에

사람들이 무당을 두려워하고 존경하다가

마침내 존경받는 어른을 차차웅이라 불렀습니다

 

제단 앞에서의 한국 무당

 

[외적을 물리친 남해왕]

남해 차차웅 , 남해왕은

훌륭한 부모님에게서 태어난 인물답게

훌륭한 정치를 하려 노력했습니다

 

낙랑군사가 쳐들어와서 신라수도 금성을 여러겹으로 포위하자

남해왕이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남해왕>두 분의 성인이 세상을 떠나시고

내가 백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나

이는 잘못된 일이다 ,

 

조심스럽고 위태롭기가 물을 건너는것과 같은데

지금 이웃나라가 침범해오니

이는 나에게 덕이 없는 탓이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

 

이에 신하들은

 

<신라 신하들>적이 우리나라에 국상이 난 것을 요행으로 여기고

함부로 침범해왔으니 하늘은 절대 그들을 돕지 않을 것입니다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라고 말했고

얼마후 낙랑군사들은 물러갔습니다

 

남해왕은 석탈해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의 첫째딸을 석탈해에게 시집보냈고

석탈해를 재상에 임명하고

군사일과 나랏일을 맡겼습니다

 

이후 왜인이 병선 100척을 보내

신라 해변가의 민가를 약탈했고

 

일본해적 , 왜구

 

남해왕은 6부 정예병을 보내 방어했는데

낙랑 역시 이틈을 타 신라 수도 금성을 공격했는데

밤에 별똥별이 적진에 떨어지자

적병들은 두려워하며 퇴각하다가

알천가에 돌무더기 20개를 쌓아두고 물러갔고

6부 군사 1천명이 이들을 추격하다

이 돌무더기를 보고는 적병이 많은 것으로 알고 추격을 멈췄습니다

 

[이의 자국 이사금]

남해왕이 사망하자

남해왕의 태자 박유리가 왕위를 이어

신라 3대왕 유리왕이 되었습니다

 

원래 남해왕이 사망했을때

태자 유리가 왕위에 올라야한다 생각했는데

유리는 재상 석탈해가 덕망이 있다 생각해

왕위를 석탈해에게 사양했습니다

 

그러나 석탈해가 말했습니다

 

<석탈해>임금 자리는 보통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훌륭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이(이빨) 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라고 말했고

석탈해와 박유리는 시험삼아 떡을 깨물어봤습니다

 

찹쌀떡

 

그 결과 박유리의 잇자국이 더 많았기에

석탈해는 신하들과 함께 즉시 박유리를 왕위에 오르게하고

 

'이의 자국'

 

이라는 의미로

왕명을 이사금이라 불렀고

신라 3대왕 유리 이사금 , 유리왕이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사금이란 말은 이후 잇금 , 임금의 유래가 되었고

한국은 한국 고유어로 왕을 '임금' 이라 부릅니다

 

[백성을 살핀 유리왕과 도솔가]

유리왕은 어진 임금이었고

나라를 순행하다가

어느 노파가 굶주림과 추위로 죽어가는 것을 보고

 

<유리왕>내가 세상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몸으로 왕위에 앉았으나

백성을 먹여 살릴 수 없고

노인과 어린이로 하여금 이런 상황에 이르게 했으니

이는 나의 죄이다

 

라고 말하고

옷을 벗어 덮어주고

밥을 주어 먹게했습니다

 

그리고 유리왕은 관리들에게 명해서

홀아비 , 과부 , 고아 , 자식없는 노인들을 위문 , 구휼하게하고

이런 자들을 부양하게 했습니다

 

구휼

 

이 소문을 듣고

이웃나라 백성들이 신라로 오려는 자가 많았습니다

 

이해부터 백성들의 삶이

즐겁고 편안해서

백성들은 '도솔가' 라는 노래를 처음으로 지으니

이것이 한국 노래와 음악의 시초였습니다

 

도솔가

 

[6부의 개혁과 17관등제]

이후 유리왕은

6부의 이름을 고치고 성을 하사합니다

 

<6부와 성씨>

양부-이씨

사량부-최씨

점량부-손씨

본피부-정씨

한기부-배씨

습비부-설씨

 

신라 6부

 

또 유리왕은 관직에

17등급을 두어 17관등제를 시작합니다

 

신라 17관등제(골품제)

 

이 17관등제는 '골품제' 로 변화하는데

골품제는 신라의 철저한 신분제도로서

높은 골품 , 신분은 높은 관등을 대대로 독점하고

낮은 골품 , 신분은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높은 관등에 절대로 오를 수 없었습니다

 

[추석의 유래]

어느날 유리왕은

두 공주로 하여금

각각 부의 여자들을 거느려

무리를 나누어 편을 짜게 했고

이들 두 편은

가을 7월 16일부터

매일 새벽 뜰에 모여

길쌈을 시작해 밤 10시경에 끝냈고

8월 15일이 되면 길쌈을 얼마나 했는지 심사했는데

길쌈을 적게한 편에서 많이한 편에게

술과 음식을 차려 사례했습니다

 

길쌈놀이하는 여인들

 

또 이때 사람들은 노래와 춤과 여러 오락을 즐겼는데

이 행사를 '가배' 라 했습니다 (한가위 , 추석의 유래)

 

한가위 , 추석 잔치

 

가배행사중

진 편에서 한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며

탄식하는 목소리로

 

'회소 회소 會蘇 會蘇 (아서라[=하지 마라] , 말어라)'

 

라고 했는데

그 소리가 슬프고도 맑아

훗날 사람들이 이곡에 노랫말을 붙이고

회소곡이라 했습니다

 

이후 고구려 대무신왕이 낙랑을 멸망시키자

낙랑 백성 5천이 신라로 항복해왔고

유리왕은 그들을 6부에 나누어 살게합니다

 

<라봉봉>한국에서 알에서 태어난 인물로

고구려 시조 고주몽과 신라 시조 박혁거세 , 가야시조 김수로가 있는데

 

알에서 태어난 이야기는 '난생설화' 라 하며

알은 둥글기에 태양을 상징하기도 하고

난생설화는 일반 사람들과 다른 비범한 , 위인들의 출생을 의미합니다

 

혁거세 거서관과 알영부인 이야기처럼

참 신비로운 신라의 시작이고

시작부터 덕과 인 , 착함으로 나라를 다스렸고

이로 인해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가장 오래 살아남는 나라가 되기도 했습니다

 

신라 국호 , 왕호는 여러번 바뀌었는데

요즘은 고유어를 그대로 쓰는 형식이지만

저어렸을때만해도 혁거세 거서간 , 남해 차차웅이라 안하고

그냥 혁거세왕 , 남해왕 이라 불렀고

지금도 이렇게 불러도 무방하기에

왕 호칭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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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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