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의암 손병희>

[동학과 최제우]

[호방한 아이]

[동학에 입도하다]

[스승 최시형]

[동학 농민 운동]

[해외 망명]

[삼전론]

[신생활운동]

[러일전쟁]

[일진회 청산]

[천도교]

[경술국치]

[1차세계대전과 민족자결주의]

[사위 방정환]

[3.1 운동]

<라봉봉>

 

의암 손병희

 

[동학과 최제우]

의암 손병희 선생님은

조선 철종 12년인

1861년 4월 8일 충청북도 청주시 북이면 금암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손병희 선생님이 태어나던 당시에는

조선시대 말기로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왕실 외척가문이 독재하는 것) ,

삼정의 문란(세금제도의 횡포) , 탐관오리(백성을 착취하는 관리) 가 극심하던 시기로

백성들은 탐관오리의 횡포속에 굶주려 죽어가고

서양 등 외세는 점차 동양과 조선에도 세력을 뻗어가려 했던 혼란의 시기였습니다

 

삼정의 문란

 

서양 종교 , 학문으로 대표되는 천주교 역시

조선정부의 탄압을 피해 조선으로 암암리에 들어오고 있었고

이러한 시기

국내외적으로 민족적 위기를 느낀 최제우는

손병희가 태어나기 1년 전인

1860년 민족종교 '동학' 을 창시합니다

 

최제우

 

당시 세상의 중심이자 유일한 강대국이라 여겨진

중국 , 청나라가

서방의 작은 섬나라 영국에게 일방적으로 패배하자

세계가 크게 놀랐고

조선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점차 세계 사람들은

힘의 균형이 서양으로 완전히 바뀌게 되감을 인식해갔고

서양인들이 세계에 침략전쟁 , 식민지를 넓히며

기독교 선교사들을 앞세우는 모습에

 

최제우 역시 이에 충격을 받고

기독교도 아닌 새시대를 위한 새로운 학문의 필요성을 느꼈고

지극한 사람 중심 , 인본주의적 학문 및

동양의 사상과 천주교의 사상을 섞은

'동학(동쪽의 학문)' 이라는 종교를 만들어

'서학(서쪽의 학문)' 이라 불린 천주교 , 기독교에 대응하려 했습니다

 

최제우가 한문으로 쓴 동학경전 '동경대전'

 

점차 동학은 포교 4년만에 신도가 3천여명에 이르는등 세력이 커졌지만

불안해진 조선정부는

동학 창시자이자 동학 1대교주 최제우를

1864년 3월 혹세무민 ,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는 이유로

체포해 대구감영에서 처형시켰습니다

 

[호방한 아이]

이러한 동학이 창설된 다음해

손병희 선생님은 태어났습니다

 

손병희 선생님 생가 , 충북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금암리

 

손병희의 어머니는 마을 아낙네들과 뒷산 망월산에

달마중을 갔는데

어머니가 제일 먼저 달이 아닌

둥굴고 붉은 해를 치마폭으로 받는 태몽을 꾸고

손병희를 낳았습니다

 

손병희의 아버지는 첫부인이 일찍 사망해

재혼을 한 인물이었기에

손병희는 첩의 자식이 아닌 재가녀의 자식이었지만

이로인해 괜한 적서차별을 받게 되었고

 

손병희의 집은 가난해

정상적인 교육은 받지 못하고

가난과 냉대속에서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내며

반항아로 성장합니다

 

그러나 손병희는 항상 의협심이 강하고 강직해서

어릴적 본 농민수탈 , 적서차별 등

조선의 적폐와 악습등에 분노했고

의리도 남달리 뛰어났습니다

 

12세의 손병희는 아버지 심부름으로 관청에 세금을 내려가다가

눈길에 쓰러진 사람을 보고 그를 돕는데 사용하기도 했고

 

어느날 손병희의 친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손병희를 찾아왔는데

아버지가 관가의 돈 100냥을 축내서

감옥에 갇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손병희는 친구에게 자신의 집에 100냥이 있으니

몰래 가져가라했고

덕분에 친구 아버지는 풀려났지만

손병희 집안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결국 손병희가 사실대로 털어놓자

아버지는 친구가 어려울때 돕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며

오히려 손병희를 칭찬했습니다

 

1875년 12월 24일

15세의 손병희는 3년 연상의 곽씨처녀와 결혼했고

어느날은 문중에서 제사를 지낼때

성년이 됬기에 당연히 제사에 참여하려 하자

문중의 어른들은

감히 서자가 묘역에 올라왔다며 손병희를 쫓아내려했습니다

 

이에 손병희는 물러서지 않고

 

<손병희>나도 손씨가문의 뼈를 받아서 태어났는데

조상에게 참배도 하지 못하게 하면

부득이 나한테 뼈를 주신 조상의 뼈라도 파가서

별도로 산소를 모시고 참배를 하겠다

 

라고 말하고

곡괭이를 들어 산소를 파헤치려 하자

문중 어른들은 결국 참배를 허락하며

당돌하고 논리정연한 손병희의 언행에

혀를 내둘렀습니다

 

17세의 손병희는 관리가 어떤 사람의 상투를 말꼬리에 매어

학대하는 것을 보고

마부를 덮쳐서 구해주기도 했고

 

21세때는 초정약수터에서

양반이 약수를 독점하자 즉시 달려들어

그들을 잡아 힘없는 백성들에게

약수를 마시게 하기도 했고

 

그의 정의지심은 여러 거친 행동으로도 나타났고

청년시절 방황도 했습니다

 

[동학에 입도하다]

이후에도 호방한 생활을 하던 청년 손병희는

손병희는 조카의 권유로

21세때인

1882년 10월 5일

동학에 입도합니다

 

이때부터 손병희는 호방한 생활을 청산하고

매일 천도교 교리를 공부하며 지극한 수련에 임했고

교리 공부도중에도 매일 짚신 두 켤레씩을 삼아

청주 오일장에 나가 한달에 6번씩 팔았고

이같은 생활을 3년간 반복합니다

 

[스승 최시형]

지극한 종교적 수행과 뛰어난 인품에

손병희는 동학 2대교주 최시형의 수제자가 되었습니다

 

최시형은 일부로 선병희에게

어려운 문제를 풀게 했는데

정성껏 문제를 풀려 애쓰는 모습을 보고 손병희를 제자로 받아들였습니다

 

최시형과 손병희

 

최시형은 손병희에게

 

'바람처럼 흔들리지 않는 나무처럼 꿋꿋할 것'

 

을 가르쳤습니다

 

최시형은 손병희의 성실한 생활태도와 지략을 인정하며

의암 義菴 이라는 도호를 주었고

의암은 그의 호가 되었습니다

 

[동학 농민 운동]

1894년 갑오년 ,

탐관오리였던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폭정에 대한 반발로

동학접주 전봉준과 농민을 중심으로

동학 농민 운동이 전라도 고부에서 일어났고

동학농민운동의 불길은 점차 충청도로 , 조선 전국으로 번졌습니다

 

동학농민운동

 

동학 농민 운동은 동학농민혁명 , 동학농민전쟁 , 갑오동학혁명 등

여러 명칭으로도 불리는 농민운동으로서

탐관오리에 반대한 일반적인 농민봉기가 아닌

반외세 , 반봉건의 운동이었고

한국 민주주의 , 민주화 운동의 근본이 된 아주 중요한

민족운동이었습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은 넓어진 세력을 관리하려

남접과 북접으로 세력을 나누었고

남접의 전봉준 , 북접은 손병희가 통령이 되어

손병희는 북접의 혁명군을 이끌고

전봉준과 논산에서 합세해

남부지역을 석권하며 관군을 격파합니다

 

전봉준과 손병희

 

그러나 외세인 일본군이 개입하고 전봉준 역시 잡혀 사형당하며

동학농민운동은 끝나게 되었고

(이전 녹두장군 전봉준 이야기에서 자세히 썼음)

 

연행되는 전봉준의 마지막 모습 , 한국의 위인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던

탐관오리 조병갑은 고종의 사면을 받고

고등재판소 판사를 맡아

1898년 동학농민운동을 지지하고 참여한 동학 2대교주 최시형에게

직접 사형판결을 내렸습니다

 

최시형이 서울 감옥에서 처형되자

손병희가 뒤를 이어 3대 동학교주가 되었고

손병희 역시

여러 지역에 은신하다

최시형의 뒤를 이어 지하에서 교세확장에 힘썼습니다

 

[해외 망명]

1901년 손병희는 안경장사로 변장해

일본을 경유해 상하이로 망명했고

이리저리 국외를 떠돌다가

오세창 , 박영효 등을 만나

1903년 귀국합니다

 

양복을 입은 손병희

 

망명생활 동안 세계사정을 살핀 의암 손병희 선생님은

세계사회의 힘을 느끼고

일본과 외세에 한국이 독립을 하려면

이전 동학농민운동 당시처럼

국내 지배층과 외세를 모두 거부하는 동학의 노선이

시세에 맞지 않다 보았고

서구의 선진문화 수용 , 교육이 절실함을 느꼈습니다

 

[삼전론]

이에 손병희는

'삼전론' 을 발표합니다

 

삼전론이란

군사로 싸우는 병전(兵戰) 보다 더 무서운 세 가지가

 

'도전(道戰), 재전(財戰), 언전(言戰)'

 

의 삼전(三戰)인데

 

도전은 정신상태를 높이는 전쟁을 뜻하고 (사상전) ,

언전은 이런 정신을 세상에 전파하는 언론전을 ,

재전은 모든 사람이 그 재주와 기술을 발달시킴으로써

한편으로는 외국 자본을 막아내는 방책이고 한편으로는 나라가 부유해지는 기술

 

을 뜻하는 것이었고 이는 일제에 무력이 아닌

교육을 통해 독립해야한다는

'애국계몽운동' 에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손병희는 천도교인들에게 이러한 사상을 전파했고

이에 손병희는 동학교도들에게 새로운 문명학술을 배우게 하려

일본유학을 알선해

청년 64명을 선발해 일본에 유학시켰습니다

 

[신생활운동]

1904년 손병희는

갑진개혁운동을 전개해

전회원에게 검정물든 옷을 입고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령을 내리는 등

신생활운동(신문화운동)을 전개했습니다

 

한복차림과 양복차림의 손병희 선생님

 

[러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손병희는 같은 황인 , 동양인인 일본 당국과 협조해

한국 정치개혁의 밀약을 굳게 맺어

같이 백인 , 서양인인 러시아를 물리치고

국권을 잡아 독립에 힘쓰자 했고

 

일본에 군자금 1만원을 헌금하는 한편

국내 동학조직에 일본군을 지원할 것을 지시합니다

 

이때 동학의 이용구와 일본군 통역 송병준은 일본 군부에 적극 접근했고

일본은 군사 행동상의 안전 , 한국내 치안유지등 여러가지 측면에서

동학이 도움이 된다 판단하고 러일전쟁기간동안 동학과 손을 잡았습니다

 

이에 당시까지만해도 조선민중들에게는

일본이 러시아와 싸우는 것은 동양평화와 관련이 있다 생각했고

동양평화를 위해 같은 황인종인 동맹국 일본을 도와야 한다는 인식이 퍼졌습니다

 

다윗(일본)과 골리앗(러시아)의 싸움같이 여겨졌던 러일전쟁

 

러일전쟁의 현실 , 조선을 두고 싸우는 일본과 러시아

 

[일진회 청산]

그러나 일본은 애초에 러시아 세력을 한국에서 몰아내고

한국지역을 전부 지배할 생각을 가지고 러일전쟁에 나선것이었기에

동학과의 협력할 생각이 없었고

이와중에 송병준 등의 일진회 회원들은

일본군의 비밀지원을 받아 활동하며

전국적으로 거대규모로 회원을 늘려 친일단체로 활동했고

점차 일진회가 극우 일본인들의 전폭적인 지원아래 친일선전을 계속하며

한국과 일본을 동등하게 합병 , 한 나라로 만들자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펼치자

 

매국단체 일진회

 

당시 손병희 선생님과 조선 지식인들은

점차 일진회의 친일 선전주장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경지가 되었고

동학과 엮여있던 일진회가 나라를 팔아먹기위한 행위와 친일행위를 노골화하자

위기의식을 느낀 손병희는

동학과 일진회가 엮이는 것을 우려해

결국 이용구 , 송병준에게 일진회 지방지부를 폐하고

경성본부만 두라 지시합니다

 

일진회 고문 우치다 료헤이와 송병준 , 우치다와 다케다 한시와 일진회 회장 이용구

 

그러나 이용구와 송병준은 이를 거부했고

일진회에 대한 반발이 동학에게까지 엮일까 우려한 손병희는 결국

이들의 매국행위를 이유로

이용구와 송병준을 동학에서 출교시키고

일진회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 60여명의 친일 간부들에게

천도교에서 떠날 것을 지시합니다

 

정치와 경제가 유착되있다는 것을

'정경유착' 이라 하고

이는 한국 20세기 경제사에서 크나큰 적폐가 되었는데

정치계는 외국 상품들의 국내시장 진입을 막고

이로인해 한국 경제계는 싸구려 상품들을 만들어 국내시장을 독점해

재벌로 성장할 수 있었고 정치자금 , 뇌물등을 정치계에 뿌렸습니다

 

이와같이 종교와 정치가 유착되는 것을

정교유착이라 할 수 있는데

정치권에서 표나 힘을 얻기위해 종교를 이용하고

또 종교 역시 정치권과 유착해 타락할 수 있음은

역사에서 여럿 있어왔는데

 

손병희 선생님은 이때 일진회와의 관계를 끊는 용단을 내리며

정교분리를 실행했습니다

 

[천도교]

1906년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해

3대 교주로 정식 취임했고

천도교적 이상세계 및 사회현실 개혁에 노력합니다

 

천도교는 지상천국 건설 및

영육쌍전(정신과 육체를 모두 온전하게 보전) ,

보국안민(나라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 ,

광제창생(널리 백성을 구제함)을 기치로 내걸었습니다

 

전봉준 장군 탄생기념행사에서의 동학 사상들 , 제폭구민과 보국안민

 

이러한 사회 , 현실 참여성격이 강한 천도교는

한국 민중개혁 , 독립운동에 앞장서게 됩니다

 

손병희는 교세 확장운동을 벌이는 동시에

출판사를 창립하고

보성(현재 고려대학교) , 동덕 등 학교를 인수해 교육사업에 공헌합니다

 

'민족고대' 라는 별명이 있는 고려대학교(옛날 보성전문학교) , 고려대는 손병희나 방정환을 냅두고 왜 친일파 김성수 동상을 세웠는지도 의문입니다

 

손병희는

1908년 천도교 교주자리를 박인호에게 인계하고

서울 우의동에 은퇴해 수도에 힘썼습니다

 

[경술국치]

그러나

1910년 일제는 한국을 강점해

대한제국을 멸망시키고 한국을 강제 합병 , 한국인들의 주권을 빼앗았고

한국의 정신과 땅을 수탈 , 강탈했습니다 (경술국치)

 

경복궁에 걸린 일장기

 

한국이 일본에 치욕적인 통치를 당하게되자

나라잃은 슬픔속에서 손병희와 천도교 민족지도자들은

특별수련을 하며 정신력을 강화하려 했고

이러한 것들은 훗날 3.1 운동의 준비가 되었습니다

 

일제는 손병희와 천도교를 탄압하려했고

천도교의 교세확장을 막기위해

손병희를 헌병대에 소환했지만

그럼에도 손병희는 포교에 더욱 힘쓰고

더욱 활발하게 활동합니다

 

일제의 탄압은 더욱 혹독해져갔지만

우리민족의 민족의식은 그럴수록 더욱 높아졌습니다

 

[1차세계대전과 민족자결주의]

20세기부터는 점차 서양 , 열강들도

지구 모든 지역에 깃발을 꽂아버려서 식민지 확장이 끝나게 되었고

결국 자기네들끼리 식민지를 두고 다투게 됩니다

 

이로인해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세계 열강들은 엄청나게 싸우게 되었고

 

1차 세계대전

 

천도교 역시 이런 틈을타서

슬슬 한국독립을 계획하려 합니다

 

손병희 선생님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

세계의 상황이 크게 바뀔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손병희는

 

<손병희>이 일은 나뿐만이 아니라 일반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믿는다. 

나는 유럽전쟁(1차 세계대전) 중에 교도들과 우이동에 갔을 때 ,

전쟁이 끝나면 상태가 일변해 세계에 임금(왕)이 없어질 것

 

이라 이야기했습니다

당시까지 망국의 한국 선비 , 유생들은 대한제국 , 조선왕정의 부활을 이상으로 여겼지만

손병희 선생님의 생각은 달랐고

손병희는 앞으로 한국에는

왕정이 아닌 민주정의 나라를 세워야 한다 생각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이 승리하고

1918년 승전국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각 민족이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서 그 귀속과 정치 조직, 운명을 결정하고

타민족이나 타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을 것을 천명한 집단적 권리'

 

를 주창하는 '민족자결주의' 를 주창하자

세계 사회는 크게 흔들립니다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

 

원래 미국은 독일 등 1차 세계대전 패전국의 식민지 , 영토를 축소시키기위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한 것도 있었지만

당시 세계 열강들은 해외에 막대한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었고

식민지인들에게 민족자결주의는 큰 희망으로 다가왔습니다

 

[사위 방정환]

이 시기 1918년 손병희 선생님은

어린이날을 만드신 독립운동가 방정환 선생님을 사위로 맞아들였고

손병희는 방정환을 첫눈에 보고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느끼셨습니다

 

소파 방정환

 

장인 손병희는 어린 방정환에게 존대를 사용했고

방정환은 장인의 가르침을 받아

인간존중사상을 배우고 한국독립과 연관이 있는

애국계몽운동 '어린이 운동' 에 힘쓸 수 있었고

3.1운동때는 장인을 도와 독립운동에 힘쓰셨습니다

 

[3.1 운동]

전쟁이 끝나고 새로운 평화의 바람이 불자

우리민족의 민족의식은 더욱 높아졌고

결국 손병희 선생님은 1919년 독립운동을 거국적으로 벌이기로 했습니다

 

손병희 선생님은 독립운동은 대중화하고 일원화해야하며

비폭력으로 진행해야한다 했고

독립선언서를 쓰는 최남선(이후 친일민족반역자로 변절)에게

 

<손병희>되도록 온건하게 쓰라

 

고 누차 부탁했습니다

 

손병희 선생님은

어디까지나 비폭력 시위 , 만세운동으로 독립을 이루기를 희망하셨고

그 길만이 쉽게 독립을 얻는 길이라 믿었습니다

 

<3.1 운동을 앞둔 손병희가 천도교 간부들에게 한 말>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오.

 

1919년 2월 27일 밤 천도교 보성사에서

독립선언문 2만 1000매가 인쇄되고

 

독립선언서

 

다음날 2월 28일 밤 서울 재동에 있는

손병희의 집에서 민족대표 23명이 모여

다음날 , 3월 1일에 있을 거사를 재확인합니다

 

2월 28일 밤

손병희 선생님 집에서 한국민족대표들은

결의를 새롭게 하는 동시에

3.1운동의 결과로 수립될 새로운 국가의 정체에 논의했는데

손병희는 당연히

 

'공화정 , 민주정'

 

이라 소신을 밝혔고

그로인해 3.1운동의 결과로 태어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실제로 공화정을 체제로 채택합니다

 

손병희와 민족대표들은

파고다공원(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할 경우

학생과 일제 경찰들간에게서

자칫 폭력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는 불상사를 염려해

파고다공원 부근의 기생요릿집 태화관에서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했고

태화관에 들어갔습니다

 

결국

1919년 3월 1일 낮 12시쯤

인사동 태화관에 모인 손병희와 33인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축배를 들며

3.1운동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손병희와 민족대표 33인

 

민족대표들은 이후 태화관 주인에게

조선총독부에게 전화를 걸어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식을 열고 있다 연락하게 했고

곧장 일제경찰 80명이 태화관에 들이닥쳤습니다

민족대표들은 일제에 폭력으로 맞선게 아닌

비폭력 정신으로 일본 경찰에 자진 체포된 것이었습니다

 

일제경찰들이 에워싸고 있는 가운데

한국 불교대표 한용운 선생님은

 

<한용운>오늘은 조선독립을 선언하기 위한

영광스러운 날이며 ,

공동합심하여 조선독립을 기도하자

 

고 말씀하셨고

 

만해 한용운 , 한국의 위인

 

민족대표 일동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선독립만세를 높이 불렀습니다

 

<민족대표 33인>조선독립 만세 !

조선독립 만세 !

조선독립 만세 !

 

민족대표들은 만세를 삼창한 후

일제 경찰에 차례로 연행됬습니다

 

그들이 차에 태워실려져갈때

군중들은 2~300장씩 독립선언서를 뿌리며

 

'대한독립만세'

 

를 크게 외쳤고

태화관 바깥과 시내의의 군중들은

차례로 민족대표들이 연행되고 있는 차를 에워싸고

감격과 흥분속에서 목이 터져라 만세를 따라 외쳤습니다

 

마지막으로 한용운과 최린이 실려갈때는

목이 쉬어 군중들이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독립선언 장소가 변경된 것을 모르고

탑골공원에서 기다리던 수천명의 학생과 시민들은

2시 30분까지 탑골공원에서 민족대표들을 기다렸지만

민족대표들이 나타나지 않자

학생대표들이 태화관으로 가서 거세게 항의했지만

손병희는 이해를 시키며 그들을 돌려보냈습니다

 

결국 학생대표 , 시민들은 따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습니다

3월 1일 2시가 되자 청년 정재용은 팔각정위로 올라가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습니다

 

<정재용>우리는 여기에 우리 조선이 독립된 나라인 것과 

조선사람이 자주 국민인 것을 선언하노라...

 

파고다공원의 3.1독립만세시위 - 문학진

 

시민들은 '대한독립만세' 를 부르며 종로쪽으로 행진했고

총칼이 아닌 맨손으로 만세를 외치며 몰려오는 한국민중들에

일본경찰은 크게 당황했습니다

 

3.1운동 당시 행진하는 여성들

 

손병희 선생님과 한국의 비폭력정신이 담긴 3.1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졌고

세계에도 큰 충격을 주어

세계는 일제에 가혹하게 탄압받는 식민지 한국의 실상을 알게되었고

중국과 인도에도 퍼져

중국 5.4운동 , 인도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운동에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손병희 선생님은

일제경찰에 체포되 3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손병희 선생님은 이렇게

일반적인 종교인이 아닌

민족지도자이자 뛰어난 선각자였습니다

 

<당시 일제 판사>조선이 독립하면 어떤 정체의 나라를 세울 생각이었나 ?

 

<손병희>민주정체로 할 생각이었다

 

손병희 선생님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다음해 10월 병보석으로 출감됩니다

 

평생을 민중과 민족을 위하여 혼신과 정성의 힘을 다한

손병희 선생님은 요양치료 중

1922년 5월 19일 62세를 일기로 서거하셨습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손병희 선생님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탑골공원에 있는 손병희 선생님 동상

 

<라봉봉>원래 등잔의 밑이 가장 어둡듯이

의외로 너무 중요한 인물들의 경우

주변사람들은 다 유명한데

의외로 본인은

유명하지 않거나 이야기들이 덜 알려진 경우들이 있습니다

(너무 소중해서 일부로 숨겨야 하는 케이스도 있음)

 

손병희 선생님이 바로 그 예로서

손병희 선생님이 없으면 한국 근대사를 이야기 할 수 없을만큼

시대의 주요사건들을 주도하신 민족 지도자셨고

굳이 한국 근현대사 민족 , 독립지도자를 계보를 이어본다면

 

전봉준-손병희-안창호-김구

 

가 아닐까 싶고

굳센 모습으로서 일제에 맞서고

한민족의 큰 존경을 받은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하지는 않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정신의

원조인물이었다는 사실에 한국사의 큰 자랑이라 할 수 있고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건국을 구상한 인물로서

한국사의 적통중의 적통인물입니다

 

저는 모태신앙으로서 기독교지만

동학 , 천주교는 한국적 사상이 크게 들어간 민족종교로

존중하고 있고

다른 종교들과 달리 한국 독립사 , 근현대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종교입니다

 

요즘 사이비종교에 대한 말이 많지만

사실 불교나 기독교 역시 처음 나왔을때는

사이비식으로 몰려서 가혹한 탄압을 받았고

세계나 한국에도 참 많은 사이비종교가 있지만

그럼에도 미국이나 선진국들이 사이비종교를 내버려 두는 이유가

 

탄압받은 불교나 기독교처럼

정말 올바른 종교가 나올경우

열명의 범죄자를 놓치더라도 한명의 억울한 종교가 나오지 않게하려는 배려가 아닐까 싶고

꼭 진짜 사이비들은 당장은 세력이 커지고 과시하는 모습이 강하나

결국 필망하고

참종교들은 고난과 탄압을 받지만 끝내 살아남는게 아닐까도 싶습니다

 

어린시절에 봤던 한국위인들의 이야기를 다시쓰며

왜이리 가슴이 벅차고 끓어오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참 위대한 사람들의 후손입니다

 

 

반응형

'어린이 개인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익점  (0) 2020.04.28
슈바이처  (0) 2020.04.27
토머스 에디슨  (0) 2020.04.21
백사 이항복  (0) 2020.04.15
윈스턴 처칠  (0) 2020.04.11
Posted by 라봉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