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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점>

[신진사대부 문익점]

[공민왕의 반원자주정책]

[불사이군]

[하얀 꽃]

[붓뚜껑 속에 숨긴 목화씨]

[살아남은 한 그루]

[물레 기술]

[따뜻한 겨울]

[효자는 해치지 말라]

[조선을 반대한 고려충신]

[삼우당 문익점]

<라봉봉>

 

문익점

 

[신진사대부 문익점]

삼우당 문익점은 고려시대인 충혜왕 1년 ,

1329년 2월

경상남도 산청의 강성현에서

아버지 문숙선과 어머니 함안 조씨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문익점의 아버지 문숙선은 과거시험에는 합격했으나

관직에는 나가지 않은 선비였고

문익점은 8살때부터 아버지에게 글을 배우고

12살때부터 당대의 학자 이곡의 제자가 되어

그 아들 이색과 함께 공부했습니다

 

목은 이색 ,

고려 후기의 대학자로서

포은 정몽주 , 야은 길재와 더불어

고려말 3은이라 불렸고

문익점의 원래 호도 삼우당 이전에는

사은이었기에

당시 고려말 대학자들은 은자 호를 쓰는게 유행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색은 고려말기에 활동하는 모든 사대부를 키워낸 인물로

그의 제자들은 신진사대부가 되어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건국합니다

 

이색과 어린시절부터 함께 공부한 문익점은

같이 학업에 정진하며

평생을 죽마고우(친한 벗)로 지내게 됩니다

 

16세때 문익점은 주씨 부인과 결혼했는데

주씨부인이 두 아들을 낳고 세상을 떠나자

정씨부인과 재혼했습니다

 

1350년 20세의 문익점은

성균관에 입학해서 공부했고

 

1360년 고려 공민왕 시기

30세의 문익점은 정몽주와 함께 급제해서

벼슬길에 올랐고

원나라에 사절단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문익점 영정 , 관복을 입은 문익점

 

[공민왕의 반원자주정책]

공민왕이 즉위할때는

원나라 황제 순제의 황후가 고려출신 여인인 기황후였는데

기황후가 공녀출신에서 원나라 황후가 되자

고려에서 기황후의 친오빠인 기철은 원나라 황실을 등에업고

온갖 횡포와 세도를 부리며 부원배(친원 매국노)로 지내고 있었고

반원 자주정책을 시행한 공민왕은 1356년 기철 등을 과감히 숙청합니다

 

고려 마지막 개혁군주 공민왕 초상화

 

사극 신돈의 부원배 기철

 

이에 공민왕은 원나라 황실의 미움을 사게 됬고

이에 공민왕은 원나라에 문익점 등 사신단을 꾸려 보낸 것이었습니다

 

[불사이군]

당시 원나라는 공민왕을 폐하고

원나라에 머물고 있던 충선왕의 손자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임명했는데

고려의 사절단에 원나라로 들어가자

원나라는 고려 사신들에게 좋은 벼슬을 내려주고

온갖 감언이설로 덕흥군을 지지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원나라 순제>너의나라의 공민왕이 실정을 하여

내가 그를 폐하고 덕흥군으로 하여금 새 임금이 되게 하였노라

 

이에 문익점은 초연히

 

<문익점>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없소 (불사이군 不事二君)

 

하고 거절합니다

 

문익점은 고려를 속국으로 삼았던

대국 원나라의 명령을 거역하고

자신의 군주를 일편단심으로 섬겼던 충신중의 충신이었고

 

이후에도 수차례 회유와 강권을 받았지만

문익점은 끝내 굴복하지 않아

원순제의 미움을 받아

중국 남쪽의 운남땅으로 유배당합니다

 

귀양살이 3년만인

1366년 9월 , 공민왕 15년에

문익점은 유배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하얀 꽃]

문익점은 원나라에서 3년간의 유배생활을 하는데

그곳에서 글을 가르치고 있었고

하루는 문익점이 날이 더운날 나무 아래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의 아버지인 원나라 농부와 술을 한 잔 하다가

유배지에서 목화가 엄청나게 재배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목화는 하얀 구름같이 엄청나게 피어있었습니다

 

 

목화밭의 목화

 

<문익점>저 꽃이 무엇입니까 ?

 

<원나라 농부>꽃이아니라 목화 송이입니다 선생님 ,

저 솜을 옷에 넣어 입으면

추운 겨울이라도 따뜻히 지낼수가 있고

 

또한 솜에서 실을 뽑아 옷감을 짜서 입으면

삼베 모시보다 땀을 잘 흡수하지요

 

당시까지만해도 고려백성들은 목화가 없어

추운 겨울에도 삼베옷 입고 살았고

문익점은 목화를 고려에 가져가도 되냐 물었지만

농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습니다

 

당시 원나라는 목면을 팔아서

외국과의 독점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올리고 있었기에

목면업을 엄격한 국가보호 전매사업으로 정하여

목화씨의 국외유출을 국법으로 금지하고 있었고

원나라는 이외에도 군사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화약 , 지도 등의 국외유출도 철저하게 막았습니다

 

그러나 문익점은 그럼에도

이 목화를 고려에 가져가면

고려의 백성들도 더 따뜻하게 겨울을 지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고심에 잠겼습니다

 

[붓뚜껑 속에 숨긴 목화씨]

3년만에 문익점의 유배가 끝나게 되었고

문익점은 돌아가면서

결국 심부름꾼을 시켜 목화씨를 따오게 했는데

이때 목화밭에서 일하던 한 노파(할머니)가 이를 보고 놀랐습니다

 

<노파>나라에서 목화씨 반출을 엄금하는 법이 있는데

감히 그렇게 하느냐

 

이에 문익점은 노파를 잘 타일러서

10알정도를 골라 가져갔고

원나라 관리에게 들키지 않게

붓뚜껑에 목화씨를 넣어서 고려로 향했습니다

 

붓뚜껑에 목화씨를 숨긴 문익점

 

원나라 국경에서 원나라 병사는

문익점의 물품을 검사하다가

문익점의 붓을 발견하고

문익점의 붓을 집어들었습니다

 

<원나라 병사>붓이 아름답군 !

 

다행히 원나라 병사는 붓뚜껑속에 목화씨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는 못했고

문익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려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살아남은 한 그루]

문익점은 귀국후

조정에서 내려준 벼슬을 마다하고는

휴가를 청하며 시골집에서 쉬다가

그해 봄 붓뚜껑에서 가져온 목화씨의 반은

자기집 꽃밭에 심고

나머지 반은 장인어른 정천익에게 주어 심게했는데

 

문익점의 장인 정천익

 

둘다 재배 기술도 모르고

원나라와 다른 고려의 날씨와 기후에

문익점의 목화씨는 모두 죽고

정천익의 밭에서 단 하나만 살아남아

한 그루만 겨우 살릴 수 있엇습니다

 

문익점의 고향이자 목화씨를 처음 재배한 경남 산청의 목면 시배 유지

 

그 한그루에서 다시 100여개의 씨앗을 얻어

다시 재배하는데 성공했고

문익점은 해마다 재배량을 늘려서

1367년부터는 마을 사람들에게 씨앗을 무료로 나누어 주며

심어 기르도록 권장하고 목화재배를 교육했습니다

 

[물레 기술]

3년동안 엄청난 노력끝에

목화의 재배에 성공한 문익점과 장인 정천익은

 

처음엔 목화에서

씨를 재배하고 실을 뽑을 줄 몰라서 고민하던 중

당시 정천익의 집에 머무르던

원나라 승려 홍원의 지도를 받아

씨를 빼는 씨아 , 실을 뽑는 물레 만드는 법을 배워

실을 뽑아냈습니다

 

김홍도의 길쌈(섬유로 옷짜기)

 

또한 문익점의 손자

문래와 문영은 실짜는 기구를 개발했는데

이 기구는 발명자 문래의 이름을 따와

'물레' 라 불렸습니다

 

실뽑는 기구 물레

 

김홍도의 자리짜기 속 물레돌리는 여인

 

[따뜻한 겨울]

문익점은 목화 기술들을

시중에 보급시켰고

한국 백성들은 이로 인해

면으로 된 옷과 솜이불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문익점과 목화밭속 농부들

 

문익점의 공로로 목화가 널리 전해지며

일반 백성들은 삼베옷에서 무명(면)옷으로 옷을 바꿔입었고

땀과 수분을 잘 흡수하고 촉감이 좋고

질기고 가격이 싼 면옷은 널리 퍼졌고

조선시대대부터는 세금을 내는 화폐로 사용됩니다

 

삼베옷

 

백의민족 , 하얀 면옷을 입은 조선 선비들

 

문익점이 퍼트린 목화씨는 얼마후 전국적으로 퍼졌고

이로인해 백성들은 한겨울에도 따뜻하게 지낼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와 심은지

100년도 채 안되어

한민족은 신분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삼베나 모시로 옷을 만들어입던 생활에서 벗어나

면포를 주요 재료로 해서 옷을 지어입게되었고

이는 문익점이 신변을 무릅쓰고

목화씨를 붓뚜껑속에서 숨겨온 것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효자는 해치지 말라]

문익점은 목화만 가져온 인물이아니라

고려의 대선비 , 대학자이자 효자이자 충신이었습니다

 

공민왕 18년인 1369년

39세의 문익점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불교식 100일상을 거부하고

유교식 주자가례대로 3년간의 시묘생활을 하며 효성을 다했고

우왕 2년인 1376년에 어머니 조씨부인마저 돌아가시자

문익점은 역시 시묘생활 정성껏하고 있었습니다

 

고려말기였던 이즈음에는

고려 및 동아시아 세계는 급변하고 혼란스러운 시대였고

이에 일본해적 왜구가 고려 전국토를 유린하고 있었습니다

 

1377년 왜구들은 문익점의 마을에도 쳐들어왔는데

마을 사람들은 모두 피난갔지만

문익점만은 평소같이 죽음을 불사하고

곡을 하며 어머니 무덤을 지키고 있었고

이를 본 왜구들마저 문익점의 효성에 감복하여

문익점을 차마 해치지 못하고

 

'물해효자 勿害孝子 (효자는 해치지 말라)'

 

라는 팻말을 세우고 돌아가

뒤이어 오는 왜구들로 하여금 문익점 선생님을 해치지 못하게 했습니다

 

당시 이성계 장군은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고려 전국을 돌아다니고 있었고

이 이야기를 알게된 이성계에 의해

문익점의 효성은 고려 조정에 알려졌습니다

 

이로인해

우왕 9년 , 1383년에는

고려 조정에서 문익점에게 효자문을 내리고

문익점의 마을 이름을 효자리라고 불렀습니다

 

경남 산청의 문익점 효자비

 

[조선을 반대한 고려충신]

1388년 이성계 장군이 위화도 회군을 해서

고려 정권을 장악하자

이성계는 우왕과 친원파들을 제거하는 동시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한 신진사대부들을 불러들였고

이에 문익점 역시 벼슬길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고려는 썩어있었고

이에 당시 신진사대부들은

고려를 유지하되 썩은 고려를 개혁하자는

 

'온건 사대부'

 

고려를 아예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건국해서 개혁해야한다는

 

'급진 사대부'

 

로 두 파가 나뉘어 있었는데

 

고려 마지막 충신 정몽주가 온건사대부의 대표였고

이성계의 신임을 받는 정도전이 급진사대부의 대표였습니다

 

급진사대부 정도전(왼쪽) 과 온건사대부 정몽주

 

문익점은 이색 등과 함께

온건사대부의 편에 서서

이성계의 전제개혁정책에 서명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문익점은 조준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쫓겨납니다

 

파직후 나라를 염려하며 지내던

문익점 선생님은

1392년 7월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세웠다는 소식을 듣자

학문도 걷어 치운채 은거합니다

 

[삼우당 문익점]

문익점은 이 시기

기울어가던 나라일 ,

자신의 학문을 소신껏 펴지 못하는 안타까움 ,

학문이 더욱 깊어지지 못함을 걱정하며

자신의 호를

사은 思隱 (생각하고 숨다) 에서

삼우당 三憂堂 (세가지 걱정의 집) 으로 바꾸셨습니다

 

문익점은 이전 목화씨를 가져와 백성들과 신하들의 존경을 받고있었던

고려의 대신이었고

문익점이 올곧은 선비임을 안 이성계는

문익점에게 두 차례나 사자를 보내서 벼슬을 내리고

조선왕조에 협조할 것을 권유했지만

문익점은 병을 핑계로 끝내 거절하고

고려에 대한 충절과 절개를 굽히지 않고 지키며

목화보급에 힘쓰시다가

조선 정종 2년인 1400년

70세를 일기로 작고하셨습니다

 

문익점은 항상 조정이 갈라질 경우

그것이 불리할지언정

충절과 정의의 편에 서려했던 인물이었고

그렇다고 반대편에 대해서도 온건한 인물이었기에

 

당시 조선정부 역시

문익점의 목화 보급 업적과 충절을 존중하고

그의 후손에게 벼슬을 주고

세종대왕은 문익점의 업적을 기려

영의정 벼슬을 추증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이후에도 널리 알려저

고려의 충신이자 목화씨를 한국에 가져와

백성을 사랑한 인물로서

고려와 조선 민중들에게 사랑받은 인물이 되었습니다

 

문익점 우표 , 대한민국

 

<라봉봉>문익점이 목화씨를 붓뚜껑에 숨겨와서 한국에 보급한 인물이라는 사실은

이미 유명한 이야기지만

문익점 이야기에는 이 이야기 외에는 잘 알려지지 않거나

허구나 살이 붙기도해서

그가 진정한 효자이자 선비였다는 점과

그의 인품등이 가려지는 불상사도 있습니다

 

건국후 고려정부를 깎아내려야해야했던 조선정부는

고려 초중기의 역사는 그대로 썼지만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부여해야 했기에

고려 말기 고려충신들을 폄훼했고

대표적으로 문익점은 조선인들에게 사랑받으면서도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기도 했기에

조선정부는 그를 사랑하면서도

조심히 왜곡시켰다고 보고 있습니다

 

나무위키는 문익점이 원나라에가서

공민왕이 아닌 덕흥군의 편에 줄을 섰다는

조선정부대 쓰인 고려사절요의 내용을 옹호하고 있지만

실제로 문익점의 후손들의 기록에는 엄연히 공민왕의 편에 선 충신으로서

원나라의 미움을 받아 유배갔다 전해지고 있고

 

평소 그의 행실이나 이후 행적 등은

굳이 덕흥군 편에 설 이유도 없고

명분도 없고 또 아다리가 맞지 않기에

나무위키를 제외하고는 여러 글에서는

덕흥군편 설은 조선정부의 문익점 폄훼일 가능성이 높다하고

저역시 나무위키를 많이 보는 사람이지만

나무위키도 가끔은 잘못된 정보가 섞여있기도 하기에

이 점은 공민왕 충신설이 맞다 생각합니다

 

문익점은 목화씨 이야기에 가려

여러 저평가 되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가 그저 산업스파이나 씨앗도둑놈으로 폄하될 이유는 없고

실제 문익점에 대한 여러 살이나 허구도 분명 있지만

훌륭한 정신과 백성을 사랑한 뛰어난 선비이자 충신이자

효자였던 인물이었습니다

 

이에 조선정부 역시

반대하면 죽였던 일반적인 고려신하들과 달리

이례적으로 문익점을 보호하고 사후에도 조선 최고벼슬인 영의정 벼슬을 추증한 것이었고

목화씨를 보급하여 한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게 해주어

한국 민중의 사랑을 받은 한국의 위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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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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