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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고구려 고분벽화]

[오산학교]

[황소를 몸찰하다]

[소를 사랑한 이중섭]

[일본 유학]

[아고리와 아스파라거스]

[반도에서 온 천재화가]

[일본인 아내 이남덕]

[무너진 집안]

[한국전쟁과 피난]

[제주도의 화가]

[은박지 그림]

[헤어진 가족]

[순수한 그림들]

[내 그림이 비행기를 타겠네]

[비운의 천재화가]

<라봉봉>

 

이중섭

 

[고구려 고분벽화]

이중섭은 1916년 9월 16일(4월 10일생은 잘못 알려진 것)

평안남도 평원에서 부잣집 대지주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이중섭이었지만

유복했던 이중섭은 어린시절부터

하고싶은 그림공부를 할 수 있었고

어린 중섭은

동물이나 곤충을 잡는 일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살아있는 것을 그대로 보며 ,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물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이중섭의 고향 평안남도 평원군은

평양 근처에 있었는데

그렇기에 고구려 벽화가 많았고

이에 이중섭은 학교소풍때 고구려 벽화를 보고서는

민족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그는 언젠가 고분벽화를 그려보고 싶다고도 말했습니다

 

고구려 고분벽화속 사신도

 

그의 그림속 힘차고 강직한 선 역시

고구려 고분 벽화의 영향을 받았고

그는 전통 미술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바탕으로

한민족의 영혼이 담긴 그림을 그리려 생각했습니다

 

평양공립보통학교 졸업사진의 이중섭 (아래 맨오른쪽)

 

[오산학교]

이중섭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에 입학합니다

 

오산학교의 졸업사진 , 태극기를 들고있는 학생들

 

오산학교는 민족대표 33인중 한명이었던 독립운동가 이승훈이 세운 학교로서

일제에 맞서 교육으로 독립을 이뤄내자는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세워진 학교였습니다

 

독립운동가 이승훈

 

민족주의 분위기가 매우 강했던

오산학교에서 이중섭은 민족교육을 받았고

미국과 프랑스로 유학을 다녀온

서양화가 임용련으로부터

미술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유학파이자 이중섭의 스승으로 유명한 임용련(왼쪽)-백남순 부부

 

당시 오산학교 미술선생님의 말에

이중섭은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당시 오산학교 미술선생님>조선 사람은 조선 화풍으로 그려야 한다

 

이중섭 이전 한국 조선과 한민족을 대표한 천재화가 김홍도의 '서당'

 

[황소를 몸찰하다]

1930년대 오산학교에 다니던

10대의 이중섭은 학교가 끝나면

논밭에 가서 소를 관찰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중섭은 소에 사로잡히면

제일 먼저 들에 나가 해가 지도록 소만 바라보았습니다

 

<오산학교 친구들>중섭이는 소와 함께 산다

 

이중섭은

 

<이중섭>한 두번 본 것은 그릴 수 없다

 

라고 말했고

관찰만 하지 않고

소를 쓰다듬고 어루만지고

눈맞추고 등에기대보기도 하고 말을 걸기도 하고

소와 뽀뽀하기도 했습니다

 

이중섭 황소(1953 무렵) , 귀엽고 따뜻한 눈빛을 가진 황소로서 제가 제일 좋아했던 그의 그림중 하나입니다

 

이중섭의 행동을 보고 놀란 사람들은 이런 이중섭의 행동을

관찰이 아닌 '몸찰(몸으로 관찰)' 이라 했습니다

 

하루종일 앉아 소를 바라보는 젊은 남자의 모습을 수상히 여긴

소 주인은

 

<소 주인>이 녀석 ! 너 , 소도둑이지 !

 

하고 따질정도였고

이중섭이 아니라해도 참 믿기 어려운 소주인이었습니다

 

[소를 사랑한 이중섭]

이중섭은 소 , 황소를 특히 사랑했습니다

당시까지 한국을 식민지배하던 일본인들은

한국인의 상징을 소라고 여겼고

 

왜소했던 일본인들보다 덩치가 컸던 한국인은

소처럼 우직하고 강직한 모습 ,

평소에는 온순하나 화가나면 그 무엇보다 무서워지는 동물이었던

소에 비유했고

농경민족인 한민족은 특히나 소를 사랑했기에

일제는 한국인들이 소를 이야기하거나 소를 그리는 것을

못하게 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는데

민족정신이 강했던 이중섭은 이런 분위기와 일제에 비웃듯이

계속해서 한민족을 상징하는 소를 사랑하고 그렸습니다

 

이중섭의 대표작 '흰 소(1955년)' ,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우리민족을 표현

 

이외에도 한국인의 이런 민족정신을 표현하려 했던

이중섭은 닭 , 게 , 소 , 까마귀 등

한국의 토속적인 동물들을 자주 그렸습니다

 

이중섭 '닭 혹은 부부(1954년)' , 호암미술관

 

이중섭 '달과 까마귀(1954년)'

 

이중섭에게 '그린다' 는 것은

'사랑한다' , '좋아한다' 의 다른 표현이었습니다

 

[일본 유학]

1935년 20살이 된 이중섭은

더 깊이 미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 분카학원(문화학원)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훤칠하게 잘생긴 외모와 큰 키 , 운동도 잘했던 이중섭은

일본 미술학교에서 큰 인기가 있는 학생이었습니다

 

일본유학 , 문화학원 시절 인싸였던 이중섭 , 원래 조선인이던 동양인이던 '잘생긴 외모'는 세계인들이 모두 좋아합니다

 

이중섭이 학교 점심시간때 친구들과 배구를 하고 있을때

학교 2층 창가의 여학생들이 수군거렸습니다

 

'잠깐 와봐 !'

 

'저 사람이 리상(이중섭 상) 이라 하는데

잘생기지 않았어 ?'

 

한 잘생김 했던 중섭이 형

 

야마모토 마사코는 친구 이케다의 말에 맞다고 , 잘생겼다고 맞장구쳤습니다

마사코가 이중섭을 마음에 담고 있을 때 ,

어느날 마사코가 미술시간이 끝나고 수돗가에서 붓을 씻고 있을때

이중섭이 옆에 와서 같이 붓을 씻으며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후 둘은 사귀게 되었습니다

 

이중섭과 마사코

 

사실 이중섭도 이전부터 마사코에 끌렸지만

민족학교 오산학교 출신이었던 이중섭에게

일본인 여성과의 교제는 쉽지 않은 일이었고

이러지도 , 저러지도 못하고 상사병을 끙끙 앓았지만

결국 사랑의 힘은 국경과 민족과 역사를 뛰어넘었고

둘은 연인이 되었습니다

 

 

[아고리와 아스파라거스]

마사코는 이중섭을 '아고리' 라는 애칭으로 불렀습니다

아고는 턱을 뜻하는 일본어였고

턱이 긴 이중섭의 성 이(리) 씨를 덧붙여

아고리라 부른 것이었습니다

 

이중섭은 마사코의 발가락이

아스파라거스를 닮았다고

그녀를 아스파라거스라 불렀습니다

 

아스파라거스 , 어떻게 발가락이 아스파라거스가 닮겠냐만은 천재시인 이상이 좋아한 과일 멜론처럼 새로운 외국작물을 동경한 조선 지식인의 모습같습니다

 

[반도에서 온 천재화가]

이중섭은 일본 미술학교에서도 큰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미술 실력으로도 뛰어나서

1938년 도쿄 화가들이 중심이된 자유미술과 협회에서도

협회상을 받았고 평론가들은 이중섭을

 

'반도(조선반도) 사람으로 천재적인 화가가 그린 그림'

 

'천재화가가 반도에서 왔다'

 

라며 호평을 쏟아냅니다

 

이때부터 이중섭은 천재화가로 불리게 됩니다

 

일본 유학시절의 이중섭

 

[일본인 아내 이남덕]

당시 이중섭과 마사코 모두 부잣집 집안이었으며

이중섭은 어려운 친구 학비를 자신 용돈에서 떼어 대신 내줄정도로

학교를 다니는데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었고

이중섭은 마사코에게 항상 같이 프랑스에 유학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피카소같은 전설적인 화가가 한창 활동하며

세계 미술인들의 메카가 된 곳이자 예술과 낭만의 도시였고

동시대 화가였던 입체주의적인 피카소 작품에 빠져있었던

이중섭은 프랑스 유학을 갔으면 그들과 만났을지도 모르지만

 

일본이 패망전 2차 세계대전을 하고 또 이후 한국전쟁이 터져서

프랑스 유학은 단념됩니다

 

세계 미술계에 충격을 준 스페인과 프랑스의 천재화가 피카소

 

1943년 이중섭은 전람회를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점차 패망을 앞둔 일제의 상황이 악화되 돌아오지 못했고

 

당시 이중섭의 집안 가장이 되어 집을 다시 일으킨

형이 원산에서 큰 백화점을 열었기에

이중섭과 이중섭의 온 가족이 원산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해안도시 원산

 

1944년 12월 이중섭은 일본에 있는 마사코에게 전보(옛날 문자)를 보냅니다

 

<이중섭의 전보>마사코와 결혼 급하다

자세한 내용은 편지로 썼다 바로 편지 줘

 

(MMS 문자처럼 옛날 전보는 말이 길어질수록 가격이 올라가서

말투가 짧습니다)

 

이중섭은 집안의 허락을 받아

마사코에게 암호같은 전보를 보낸 것이었고

그가 마사코에게 빨리 한국으로 오라하자

마사코는 홀로 한국행을 결심합니다

 

당시 이중섭처럼 부유한 집안의 마사코의 아버지는

사위가 조선사람인 것은 상관없는데

이중섭이 화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족을 부양하기 힘들 것 같아 그 점에 대해서는 불만이었다 합니다

 

그러나 결국 애지중지하던 막내딸의 의견을 존중해

이중섭과의 결혼을 허락했고

딸의 결혼식을 보지 못해 안타까워했지만

마사코의 아버지는 직접 배표를 구해서

1945년 전쟁 막바지 , 그녀를 조선으로 보냅니다

 

마사코는 쌀까지 지고 시모노세키항으로 갔고

당시 2차 세계대전 , 전쟁 막바지라

배표를 구하기 어려웠지만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마지막 배를 겨우 타고

서울 호텔로 가서 이중섭을 기다립니다

 

전쟁시기 홀로 다니기는 남자 혼자서도 위험한 것이었지만

사랑을 위해 홀로 바다를 건너 조선에 온 그녀였습니다

 

원산에 있던 이중섭은 당시 전쟁으로 귀했던

사과와 삶은 달걀을 들고 서울에 왔고

그녀는 아주 맛있게 먹었다 합니다

 

1945년은 이중섭에게 두가지 사랑이 찾아온 해였습니다

하나는 사랑하는 마사코와 결혼을 했던 해였고

하나는 사랑하는 조국 한국이 독립을 이뤄낸 것이었고

이중섭은 무척이나 기뻤습니다

 

이중섭과 마사코(이남덕) 의 결혼

 

이중섭은 일본인 아내 마사코를 위하여

 

'따뜻한 남쪽에서 온 덕이 많은 여자'

 

라는 뜻으로

남덕 南德 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남편의 성을 따서 이남덕이 된 마사코는

한때는 부잣집 딸에 학교를 나온 엘리트 처녀였지만

모든 배경을 뒤로하고 식민지이자 막 광복을 맞았던 조선땅

원산에 와서 이남덕이 되고

한 화가의 아내가 된 것이었습니다

 

[무너진 집안]

해방 직후는

북한지역에 살았던 이중섭 부부였는데

북한 지역에서 살았던 이중섭은 강제적으로 공산당 동맹에 가입했는데

공산당에서 원하는 그림과

이중섭이 그리고 싶은 그림이 맞지가 않아

피로감을 호소합니다

 

북한이 제작한 한국 이승만 정부 비하 삐라(전단)

 

그는 공산당 회의에 다녀올때마다

 

'맥없다'

 

하고 괴로움을 호소했습니다

 

원산에서 살림을 차린 이중섭에게 신혼기간은 축복이었는데

두 아들을 낳고 프랑스 유학계획도 세운 부부였고

한창 이중섭은 일본 , 한국에서 점차 이름알려지며

화가로서 입지를 다져가던 상황이었는데

이후 갑자기 한국전쟁이 나며 모든 것이 물거품되듯 했습니다

 

[한국전쟁과 피난]

집안 가장역활을 하던 이중섭의 형은

나쁜 지주 , 자본가로 몰려서 공산당에게 조사를 받고

소리소문없이 행방불명되었고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까지 터졌는데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이었으나

당시 북한지역인 원산에서는 남한이 공격해서 전쟁이 났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당시 원산은 미군의 최우선 폭격지역이었고

결국 가장이었던 이중섭은

가족들을 데리고 남한으로 피난행렬에 오르게 됩니다

 

이중섭도 그랬고

이중섭의 어머니와 다른 가족들은

전쟁이 오래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이중섭은 아내 이남덕 , 자식을 데리고서만 남한으로 피난갔고

서너달정도만 피난갔다오면 다시 원산에 돌아와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중섭은 피난가면서 어머니에게

 

<이중섭>금방 돌아올 테니 조심하시라

 

라고 말하고 떠났는데

이는 모자의 마지막 인사였고

전쟁이 끝난후 북한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땅이 되었습니다

 

이중섭은 그동안 그린 그림들도 모두 원산에 남겨두고

돈 몇푼 , 작은 불상 하나 , 미술도구만 들었습니다

 

이중섭은 급하게 피난을 가면서도

그림도구만은 챙겨야 한다며

붓과 팔레트 등을 보따리 속에 챙겨넣었습니다

 

이남덕 여사가 기증한 이중섭 화백의 팔레트

 

이중섭 가족은 지인의 도움으로 군함을 타고

1950년 12월 9일 부산에 도착합니다

 

부산에는 피난민으로 가득차있었고

피난민들은 하나둘 움막과 판잣집을 지워

겨울 추위를 이겨냈습니다

 

가장이었던 이중섭은 아내와 어린 아들들을 위해

부두 노동자로 날품팔이를 하며 버티고

가끔씩은 아는 문인들이나 예술가들과 만나며 정보를 교류합니다

 

부산 피난시절 삼총사였던 이중섭 , 박고석 , 한묵

 

당시 부산 수용인원이 넘치자

제주도로 피난민을 옮긴다는 정보를 들은

이중섭은 아내 남덕에게

좀 더 따뜻한 제주도로 떠나자 했습니다

 

[제주도의 화가]

1951년 제주도로 건나간

이중섭 가족은 배급으로 연명하고

게를 잡아먹으며 부족한 배를 채웠는데

 

당시 게를 많이잡아먹어

미안한 마음의 이중섭은 게를 그림에 자주 그렸습니다

 

이중섭 '두 아이와 물고기와 게(1950년대)'

 

항상 부잣집 도련님으로 어려움 없이 자랐고

씀씀이가 크며 남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한 이중섭이었지만

전쟁으로 모든 기반이 파괴되며 궁핍해진 가장이 된 그였고

애써 내색은 안하려 하면서도 그에게 피난생활은 참 괴로움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산보다는 날씨도 따뜻하고 상황이 나았던 제주도는

이중섭 부부에게는 가난했지만 자유롭고 행복한 시간이었고

이중섭을 도와주려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제주도 서귀포시의 이중섭의 피난살이집

 

이중섭이 제주도에서 그린 '섶섬이 보이는 풍경(1951년)'

 

이상호 중령은

원래 화가가 되려했지만 아버지 반대로

법대를 다니다 군에 입대한 인물이었고

제주도에 왠 화가가 피난을 왔다는 소식을 듣고

이중섭을 찾아와 술을 사주며 작품을 구경합니다

 

하루는 그는 이중섭을 졸라 이중섭의 그림을 빌려달라했고

당시는 그림을 산다해놓고는 그림값도 제대로 안주는 사람이 많던 시절이었으나

이중섭은 그의 간곡한 부탁에 그림을 넘겨주었습니다

 

이후 이상호 중령은 이중섭이 없는 사이

아내 남덕에게 그림을 돌려주고는

그림 본 값이라며 쌀 한가마니를 주고 갔습니다

 

덕분에 오랫동안 쌀밥구경을 못하던 이중섭 가족은

오랫만에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은박지 그림]

그러나 전쟁으로 물자가 너무도 귀했던 시대였고

당연 이전 일본학교를 다닐때처럼

마음껏 그림도구와 종이를 구하기도 어려운 이중섭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현실과 찬란한 예술가의 이상의 사이에서

항상 고민했던 그는

이러한 처절한 밑바닥속에서도 꿋꿋이 그림을 그려나갔고

 

판잣집 비좁은 골방에서 콩나물처럼 끼어살면서도

그렸고 ,

부두에서 짐노동자로 일하며 쉬는 틈에도

그렸고 ,

다방과 대폿집(술집) 한구석에서도

그렸고 ,

떠돌아 다니면서도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에게 그리는 것은 외로움과 슬픔의 해방구이자

자기 삶의 존재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가난과 전쟁으로 물자가 귀해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으니

이중섭은 합판이나 마분지 , 담배안의 은박지에 그림을 가렸고

물감과 붓이 없어

연필이나 못으로 그렸습니다

 

그가 그린 담배갑 은박지에 그린 그림은 처절한 그의 삶의 모습으로 유명한데

담배 포장지에 있는 세로 8.5cm , 가로 15cm 의 엽서크기의 은박지를 꺼내

못등으로 은박을 긁어 그위를 잉크나 담뱃재로 바른 후

닦아내면 마치 옛날 고려시대의 상감청자처럼 패인 곳에

그림이 남게 되는 것이었고

은지화는 송곳으로 그렸기에

단 한번도 수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중섭의 은지화 '두 아이(1950년대)'

 

이중섭의 은지화 '신문보는 사람들(1950년대)' , 뉴욕 모마미술관

 

이중섭은 300여 점의 은지화를 남겼고

가난해서 , 그저 그리고 싶어서 그린 그림들이었지만

20세기부터 현대미술은 종이와 붓이 아닌

생활속 다양한 재료와 도구들로 그림을 그려내는 것이 나타나고 있었고

이중섭은 이렇게 가난속에서 은지화라는

새로운 기법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천재화가였습니다

 

[헤어진 가족]

1952년 이중섭의 아내 이남덕은

아이들과 함께 영양실조에 시달리다가

아버지의 죽음과 유산상속 문제등으로 두 아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알려진것과 달리 이중섭이 가난해서 견디다못해 도망간 그런것은 아님)

 

이중섭 '길 떠나는 가족(1954년)'

 

그녀의 나라 일본 역시 오랜 전쟁과 미군의 공습으로

폐허가 된 상태였고 집안 역시 아버지의 죽음 뒤 무너져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중섭은 다시금 아내를 만나기 위해

부두노동 및 비용 마련을 위해 미친듯이 그림을 그렸고

 

이중섭 '구상네 가족(1955년)' , 친구 구상네 가족의 화목한 모습에 손을 건네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이중섭이었고 일본에 있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의 아들에게 자전거를 사주고 싶어했던 이중섭이었습니다

 

이남덕 역시

한국에 있는 이중섭을 만나고 돕기 위해

일본서적을 한국에 팔려는 사업을 해서

한국에 수백만원어치 책을 사서 보냈다가

사기를 당해 큰 빚을 지게 됩니다

 

어려운 와중속에

이중섭은 일본에 있는 이남덕에게

계속해서 편지를 보냈고

그 편지속에서는 마치 처음만난 젊은연인처럼

서로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 넘쳐흘렀습니다

 

<이중섭의 편지>

나의 최고 최대 최미의 기쁨 

그리고 한없이 상냥한

오직 하나인 현처 남덕 군 ,

 

잘 있었소? 나는 당신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꽉 차 있소. 

속이 잘 안된다고 해서 속을 태우거나 초조해하지 마오.

소품전이 끝나면 , 곧 구 형의 도움으로 가게 될 거요 ...

 

나의 소중하고 소중한 멋진 천사 남덕 군. 

힘차게... 마음을

더욱 밝고 건강하게 가져주오 ...

 

예술은 무한한 애정의 표현이오.

참된 애정의 표현이오.

참된 애정이 충만함으로써 비로서 마음이 맑아지는 것이오.

마음의 거울이 맑아야 비로소 우주의 모든 것이

바르게 마음에 비치는 것 아니겠소 ?

다른 사람은 무엇을 사랑해도 상관이 없소.

힘껏 사랑하고 한없이 사랑하면 되오.

나는 한없이 사랑해야 할 ,

현재 무한히 사랑하는 남덕의 사랑스러운

모든 것을 하늘이 점지해주셨소 ...

 

나만의 소중한 감격 ,

나만의 아스파라거스 군은 아고리를 잊지나 않았는지요 ?

어디 물어보고 답장을 자세하게 써 보내주시오.

 

직접 그린 그림이 그려진 이중섭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

 

이중섭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동봉한 그림

 

[순수한 그림들]

한국전쟁이 끝나자

이중섭이 전쟁시기 그린 그림들은

점차 유명해지게 됩니다

 

전시회에서의 이중섭

 

그는 그림속에 어른과 아이 ,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 게나 물고기 , 새같은 동물과 알몸으로 뒹구는 모습을 즐겨그렸는데

이는 천진무구한 동심의 세계를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중섭은 일찍 잃은 첫째아들을 생각하며

장수를 기원하는 천도복숭아를 자주그렸습니다

 

이중섭의 '과수원의 가족과 아이들'

 

이중섭의 복숭아(무병과 건강 , 장수를 상징)

 

그러나 그의 전시회에서

한국정부 당국은 그림이 야해서 풍기문란을 일으킨다며

그의 은박지 그림 50여점을 철거했습니다

 

[내 그림이 비행기를 타겠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가난과 어려움속에서 은박지에 못으로 그림을 그린

극적이었던 그의 삶 ,

그림에 담겨있는 한국의 시대상등은 점차 크게 알려지게 되었고

한국전쟁이 끝나고 귀국한 미군들은 이중섭의 그림을 보며

한국전쟁과 한국을 회상하게 되었고

50년대 한국 시대상을 잘 표현했다 평가되어

그의 그림은 뜻밖에 고가에 팔리게 되고

미국에서 유명해지며

한국의 가난한 은박지 화가 이중섭은

미국에서 새로 조명받으며 재평가됩니다

 

삶의 후기에 이르러서 그림이 알려지며

약간의 돈을 만지게 된 이중섭이었지만

베풀기 좋아했던 이중섭은 자신보다 가난한 예술가 동료 ,

이전 술을 사준 친구들에게 갚기위해 술값으로 전부 썼습니다

 

1954년 미문화원 공보관은 이중섭의 은박지 그림을 구매해

미국으로 가져갔는데

이 그림은 현대미술로서 미국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1956년 까다로운 미국 미술계의 심사를 통과해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에 전시되어

이중섭은 세계적인 화가로 인정받게 됩니다

 

이중섭 복숭아밭에서 노는 아이들(1950~52년) , 뉴욕현대미술관

 

1954년 봄

이중섭은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자신의 작품이 소장된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 주변의 예술가 , 친구들은 앞다투어 덕담을 건냈습니다

 

이중섭은 유난치 않게 응대했습니다

 

<이중섭>내 그림이 비행기를 타겠네

 

그러나 비운의 천재화가 이중섭은 미국 전시 2년 후인

1956년 자신의 이름이 더 알려지기 전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중섭>어디까지나 나는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모든 것을 세계 속에 올바르게 ,

당당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오.

나는 한국이 낳은 정직한 화공으로 자처하오.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에 있는 조국을 떠나는 것은...

더욱이 조국의 여러분이 즐기고 기뻐해줄 훌륭한 작품을 제작하여

다른 나라의 어떠한 화공에게도 뒤지지 않는 올바르고 아름다운 ,

참으로 새로운 표현을 하기 위하여 참고하지 않으면 안 될 , 여러 가지 일들이 있소.

세계의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이 최악의 조건 하에서 생활해온 표현 ,

올바른 방향의 외침을 보고 싶어 하고 듣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소. 

 

[비운의 천재화가]

이중섭은 천진난만함과 함께

창조자로서의 오만한 긍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가난이라는 현실과 예술이라는 이상사이에서 ,

쉬운 세속화가와 어려운 순수미술가 사이에서

잔꾀나 타협을 거부하고 어려운 길을 택했던 인물이었고

지독한 가난과 외로움속으로 스스로를 던져넣었습니다

 

담배피는 이중섭

 

그는

 

<이중섭>내 그림은 모두 가짜

 

라며 아궁이에 넣기도 했고

 

정신과 병동에 입원해서는

외로움속에 자신의 성기에 소금을 뿌렸습니다

 

<정신병원 의사>아니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

 

<이중섭>이렇게 안하면 성기가 썩어 죽는다.

우리 남덕이 보고 싶다.

우리 남덕이 보고 싶어.

성기가 썩기 전에 소금을 뿌려야 한다..

 

이중섭은 부부관계를 너무 오랫동안 하지 못해

성기가 썩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중섭은 극심한 외로움과 가난으로 인한 가장으로서의 자괴감에 빠졌고

거식증 , 정신병 , 조현병에 시달리다가

1956년 9월 6일 간염으로 서울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친구들이 수소문해서 그를 찾아오니

이미 시체와 밀린 병원비 청구서만이 남아있었습니다

 

그가 죽고나서야 이중섭의 삶과 그림들이 알려지며

그의 그림들은 수십억대에 이르는 고가에 거래되었고

참으로 고흐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사후 1978년 이중섭은

은관문화훈장에 추서되었습니다

 

이중섭의 죽음에

화장터에서 그의 동생 박고석의 추모글

 

<박고석의 이중섭 추모글>

제 아이 자식들마저 제 손으로 먹여 살리질 못해 처가(일본)로 보내고

그저 그리움에 안타까워만 하던 꼴이 밉살머리스러워서인가?

중섭형 ,

자네같이 못난 놈은 없을 걸세.

그 좋은 재간 그 아름답고 따뜻한 마음보를 갖고

그래 사나이자식이 더 살아 배길 수가 없었단 말인가.

나같이 흉측한 놈이 이렇듯 어지러운 세상일지라도 이러 저러 살아나갈 수 있는

반성과 용기를 또 누구에게 의존해야 한단 말이냐.

내가 듣고 보아 아는 한 가장 아름답고 깨끗한 사람으로 나는 형을 우러러 사모해 왔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일(작품)을 한 화가를 치면 형을 엄지손가락에 꼽는

우리들의 심정만이라도 알아주어야 하지 않겠나? ...

임종이 외롭다기보다 살림살이가 고달프다기보다 세상사람들이 야속하다기보다

자네는 자네만 아름답게 살았고 좋은 그림을 남기고 가면 그만이라는

그 배짱은 도대체 어디서 생겨난것인가 ?

너만이 착하고 아름답고 너만이 좋은 그림을 그린 것이

우리들에겐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너같이 너만이 깨끗하고 아름답게 살려는 놈은 죽어야 마땅해.

 

이중섭 영화 이중섭의 아내(2014)

 

<라봉봉>

'날자꾸나 이상 황소 그림 중섭 역사는 흐른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노래 마지막 인물 이중섭 ,

 

흔히 말하는 '예술가병' 의 끝판왕인 인물이

이중섭이기도 해서 그는 스스로도 여러 불우한 인생을 산 인물이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그의 천재성과 미술에 대한 순수의지는 진짜였기에

아름다운 이름으로 기억되는 한국 위인입니다

 

한국이던 외국이던 예술은 좀 돈많은집이나

백수한량들이 할게없으니 거들먹거릴려고

금전적 , 정치적 의도로 하는 경향도 있는 분야라서

이름은 되게 유명하고 거장같은데

정작 대표작이 뭔지 싶은 느낌도 드는

예술가들도 있고 안좋은 시각도 있는데

 

이중섭의 경우는 반대로 오히려 이런 정치질이나 경제력에 약했던 인물이고

마치 그림을 그리려 태어난 사람처럼

수많은 대표작 , 아름다운 그림을 남겼고

피폐해지는 와중에도 그저 그리고 또 그린 인물이었습니다

 

가짜 예술가와 진짜 예술가를 구분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라 생각되며

저도 옛날엔 무조건 1등이 최고고 제일 좋은 예술이라 여겼는데

어느 분야에서 1등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노력을 한 게 맞기도 하지만

살아가며 1등들 역시 온갖 언플과 정치질로

겨우겨우 유지하는 빛좋은 개살구들도 많다는 것을 느꼈고

 

요즘 생각하기에는

중요한 것은 불안한 1등보다도

 

'안정되고 따뜻한 느낌이 있느냐 ?'

 

1등 , 일류와

일류 이상의 천재예술가를 구분하는 기준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리 분야에서 1등을 해도

인간과 자연 , 사물에 대한 이해가 없는 예술은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고

냉정하고 차가운 느낌만 날 뿐이고

잘 들여다보면 조잡하기 그지없으며

주변에서 대단하다 치켜세워도

내 마음은 그렇지 않기에 혼란만 느낄 뿐입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이해가 있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진짜 예술의 영역이라 생각하고 있고

진정한 천재화가들의 그림은 누구나 흉내낼 수 있을 것같이 쉬워보이지만

다 깊은 이해도가 있고

쉽게 여기고 덤비다 피똥쌀 수 있는게 천재의 영역이라 생각됩니다

 

항상 이중섭이나 이상같은 천재들의 기행은 따라하기 쉬워서

저는 이러한 기행을 하는 예술가들을 좋아하지는 않은 편인데

결국 이들은 자신의 작품으로 자신의 영역에 우뚝 선 사람들이고

백날 천재들의 기행을 따라해도 남긴 작품과 감흥이 없다면 그저 잊혀지기 마련일 것입니다

 

어린시절에도 이중섭의 순수한 아이같은 모습의 그림들이 참 좋아서

따라그린 기억이 있고

그러다 성년이 되고서는 따뜻한 눈매의 황소그림이 좋았고

요즘엔 그의 그림들의 진실된 의미들이 참 마음에 와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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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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